‹ 목록으로 귀환했더니 지구가 던전이라니

2화

다음 순간, 뜯긴 철망 사이로 뭔가가 튀어나왔다. 개만 한 크기였지만 생김새는 개가 아니었다. 몸통은 검은 털로 덮여 있었고, 등에는 뾰족한 가시가 세 줄로 솟아 있었다. 눈은 붉은색으로 빛났고, 입에서는 침 대신 연기 같은 게 흘러나왔다. 도시락을 먹던 사람들이 그제야 비명을 질렀다. "뭐, 뭐야! 등급 오류 아니야?" "저거 E랭크 아니었어? 왜 D-27에서 저런 게 나와!" 사람들이 우르르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시락 뚜껑이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누군가는 신발이 벗겨진 채로 뛰었고, 누군가는 휴대폰을 떨어뜨리고도 줍지 않았다. 그 와중에 한 사람은 짐승 사진을 찍겠다고 폰을 들었다가 옆 사람에게 팔을 잡혀 같이 끌려갔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몸이 굳었다. 붉은 눈이 나를 향했다. 피 냄새가 나기 전에 도망쳐야 한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 나는 뒤돌아 달렸다. 검을 잡던 반사신경 같은 건 이미 저 밑바닥에 묻어두기로 했으니까. 10년이면 충분히 잊을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몸은 여전히 옛날 방식대로 반응하려 했다. 그게 문제였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짐승의 것치고는 지나치게 무거운 소리였다. 쿠릉. 쿠르릉. 나는 옆 골목으로 몸을 틀었다. 다행히 좁은 길이었다. 짐승이 몸통을 부딪히며 뒤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이다. 몸집이 커서 좁은 골목엔 못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골목 끝이 막혀 있었다. 망했다. 담벼락이 어른 키의 두 배는 됐다. 예전 같으면 넘을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몸이 10년 전 습관대로 굳어서 반응이 늦었다. 손끝이 벽돌을 짚었다. 틈이 얕았다. 발을 걸칠 데가 없었다. 나는 등을 벽에 붙였다. 짐승이 골목 입구에서 몸을 비틀며 억지로 밀고 들어오려 했다. 가시가 벽을 긁으며 시멘트 가루가 튀었다. 피할 곳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몇 가지 선택지가 지나갔다. 짐승의 목을 부러뜨리는 것. 가시를 피해 다리를 노리는 것. 둘 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방법이었고, 둘 다 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다. 죽이면 편하다. 그런데 그 편함의 대가를 이제 와서 다시 치르고 싶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확 잡아당겼다. "거기 서 있으면 죽어요!" 낮고 다급한 목소리였다. 나는 끌려가듯 옆으로 몸을 틀었다. 벽 사이에 숨겨진 작은 쪽문이 있었다. 페인트가 벗겨져 원래 색을 알 수 없는 철문이었다. 나를 잡아당긴 사람은 그 문을 통해 나를 밀어 넣고, 뒤이어 자신도 들어와 문을 닫았다. 철컹.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밖에서 짐승이 문을 긁는 소리가 이어졌다. 끼익. 끼이익. 발톱이 철문을 스치는 소리가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 소리에 맞춰 문틀이 조금씩 떨렸다. 나는 손바닥으로 벽을 짚었다. 벽도 같이 떨렸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나를 구해준 사람을 봤다. 짧게 자른 머리에, 회색 후드티를 입은 사람이었다. 나이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십 대 후반쯤으로 보였지만, 눈빛이 그보다 훨씬 지쳐 있었다. 허리춤에는 작은 완장이 있었는데 거기에 '탐색자 안전관리단'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완장 옆에는 무전기 같은 게 매달려 있었고, 그 위로 스크래치가 잔뜩 나 있었다. 손에 익은 물건이라는 뜻이었다. "괜찮아요? 다친 데는 없고요?" 예의는 있었지만 말투는 사무적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 짐승, 뭡니까." "임프울프. 원래 E랭크 게이트에서만 나오는데, 저놈은 좀 이상하네요. 등급이 안 맞아." 그 사람은 문에 귀를 대고 소리를 확인하며 말했다. 그러면서 무전기 버튼을 눌렀다가 이내 다시 놓았다. 신호가 안 잡히는 모양이었다. "그보다, 손님. 자격증 없이 이 근방 다니시면 안 돼요. 여긴 안전지대 경계선이라, 게이트 오류 나면 바로 사고 나요." "자격증이요?" "탐색자 자격증. 등급 검증받고, 최소 F랭크 이상 나와야 발급되거든요. 없으면 안전지대 밖으로 못 나가요. 원래 나가면 이런 일 생기라고 만든 규칙이에요." 그 사람은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여전히 이세계 갑주 차림이었다. 좁은 문틈으로 스며드는 빛에 갑주 표면이 희미하게 반사됐다. "그런데 그 갑옷, 코스프레예요? 요즘 그런 유행 있나." 대답하려는데, 밖에서 긁는 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정적이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 우리는 문에 등을 대고 숨을 죽였다. 몇 초, 몇 초, 계속 정적이었다. 그 정적이 오히려 더 나빴다. 짐승이 뭘 하는지 보이지 않아서였다. 나는 숨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옆에 선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숨소리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짐승의 침묵과 대치했다. 쾅. 갑자기 문이 안쪽으로 크게 휘어졌다. 임프울프가 몸으로 들이받은 모양이었다. 문틀에서 나무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문 경첩 한쪽이 벌써 비틀려 있었다. "이거 못 버텨요." 그 사람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뒷문으로 가야 하는데, 거리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다시 한번 안으로 휘었다. 이번엔 경첩에서 끼익, 하는 쇳소리가 났다. 오래 못 간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순간 결심했다. 아니, 결심이라기보다는 몸이 먼저 반응했다. 피 안 봐도 돼. 죽이지 않아도 돼. 그냥 시간만 벌면 돼. 나는 문을 살짝 열었다. 문틈으로 붉은 눈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임프울프가 다시 몸을 들이받으려는 순간, 나는 손을 뻗어 그 짐승의 목덜미를 잡았다. 힘을 조절했다. 죽이지 않게. 그냥 제압만. 짐승이 버둥거렸다. 발톱이 허공을 긁었다. 가시가 팔뚝을 스쳐서 옷이 살짝 뜯겼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짐승의 몸을 통째로 들어 골목 반대편으로 던졌다. 쿵. 짐승이 담벼락에 부딪혀 잠깐 정신을 잃은 듯 축 늘어졌다. 목이 부러지지 않았는지 확인하듯 가슴이 오르내리는 게 보였다. 다행이다. "...뭐예요, 지금." 뒤에서 그 사람이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손을 털며 대답했다.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니라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다. 피는 안 봤다. 죽이지도 않았다. 그거면 됐다. 그 사람은 나를 한참 쳐다보다가 완장을 고쳐 매며 물었다. 눈빛에 아까와는 다른 무게가 실려 있었다. "손님, 이름이 뭐예요?" "서준호입니다." "서준호... 씨. 저는 안전관리단 소속이고, 이름은 몰라도 돼요." 그 사람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런데 방금 그거, 순수 힘으로 저걸 던진 거예요? 스킬도 안 쓰고?"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경계 반, 흥미 반이었다. "자격증 없다고 했죠. 등급 검증 한번 안 해봤어요?" "편의점에서 하려다가 크리스탈이 깨졌습니다." 그 말에 그 사람은 잠깐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입꼬리가 씰룩였지만 끝내 웃지는 않았다. "그거, 흔한 일 아닌데. 그 편의점 알바생 표정이 볼만했겠네요." 그 사람은 완장 안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뭔가를 적었다. "아무튼, 공원 쪽에 정부 운영 안전지대 있어요. 거기서 정식으로 검증받으세요. 이 근처는 게이트 오류가 잦아서 위험해요. 오늘 같은 일, 한 번 더 겪으면 운이 나쁜 게 아니라 그냥 다치는 거예요." "가족을 찾아야 합니다. 오래 못 만났어요." 그 사람이 잠깐 나를 쳐다봤다. 뭔가 묻고 싶은 눈치였다. 눈동자가 내 갑주를, 그다음엔 내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대신 수첩을 다시 집어넣으며 짧게 숨을 뱉었다. "그럼 서두르세요. 대신, 그 갑옷은 좀 갈아입고. 사람들 놀라니까." 그 사람은 쓰러진 임프울프 쪽으로 걸어가며 덧붙였다. "그리고 다음엔 이런 골목으로 도망치지 마세요. 운 좋게 저 만난 거예요."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 그 사람이 쓰러진 임프울프를 회수용 그물로 감싸는 소리가 들렸다. 그물이 짐승의 몸에 걸리는 소리, 무전기에서 이번엔 잡히는 듯한 잡음, 그리고 그 사람이 낮게 뭐라고 보고하는 목소리까지. 나는 그 소리들을 등 뒤에 남겨두고 걸음을 옮겼다. 집까지는 이제 두 블록 남았다.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지만 참았다. 두 블록. 두 블록만 가면 된다. 10년 만이었다. 그 사이 아버지는 얼마나 늙었을까, 어머니는 여전히 화단에 상추를 심고 있을까, 그런 생각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가 흩어졌다. 골목을 두 개 지나고, 익숙한 슈퍼 자리를 지나고, 놀이터였던 자리를 지났다. 놀이터는 그대로였다. 녹슨 미끄럼틀도, 삐걱거리는 그네도 그대로였다. 그것만으로도 조금 안심이 됐다. 그런데 집 앞 골목에 다다랐을 때, 나는 걸음을 멈췄다. 우리 집이 있던 자리에, 전혀 다른 건물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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