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귀환했더니 지구가 던전이라니

1화

빛이 사그라들자마자 냄새가 바뀌었다. 피 냄새, 화약 냄새, 그리고 뭔가 타는 냄새로 가득했던 공기가 사라지고, 대신 매미 울음소리와 아스팔트 열기가 몰려왔다.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익숙한 벚나무 가로수길이었다. 10년 전, 학교 가는 길에 매일 지나던 그 길이었다. 돌아왔다. 그 말이 실감 나지 않았다. 마왕의 심장을 뚫었을 때도, 소야가 나를 보며 웃었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뒤늦게 명치 어딘가에서 뻐끗거렸다. 나는 손을 내려다봤다. 검을 쥐던 손이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쥐지 않은 빈손이었다. 다행이다. 검이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숨이 좀 트였다. 나는 원래 겁이 많은 인간이었다. 이세계에서 10년을 버틴 건 용맹함이 아니라 그냥 죽지 않으려는 발버둥이었을 뿐이고, 사람들이 나를 용사라고 부를 때마다 속으로는 다른 말을 삼켰다. 아니거든요. 저는 피 보면 손이 떨려요. 그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알 필요도 없었다. 마왕을 죽이는 데 굳이 담대함이 필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필요한 건 그저, 오늘 죽지 않으면 내일도 살아있을 거라는 얄짤없는 계산뿐이었다. 나는 발밑을 내려다봤다. 아스팔트에 낀 껌 자국까지 그대로였다. 10년이나 지났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이 길만은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벚꽃은 이미 다 지고 초록 잎만 무성했다. 계절은 여름이었다. 내가 떠났던 계절도 여름이었다. 나는 가로수길을 따라 걸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골목 어귀에 커다란 철제 게이트가 서 있었다. 예전에는 없던 구조물이었다. 게이트 위쪽에는 노란색과 검은색이 교차된 경고 테이프가 둘러져 있었고, 그 아래 표지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제3구역 - E랭크 게이트 - 출입 전 탐색자 자격증 확인 필수] 게이트? 랭크? 탐색자? 나는 표지판을 다시 읽었다. 세 번을 읽어도 뜻이 이해되지 않았다. 마왕을 잡느라 10년을 보낸 사이에, 여기서도 뭔가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표지판 아래에는 작은 안내판이 하나 더 붙어 있었다. 코팅된 종이에 인쇄된 걸로 봐서 관공서에서 붙인 물건 같았다. [게이트 발생 5년차 - 시민 여러분의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 OO구청] 5년차. 소야가 말했던 그 숫자가 다시 눈에 박혔다. 지구는 5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 5년 사이에 이런 게이트라는 게 발생하고, 등급이 매겨지고, 자격증까지 필요한 세상이 된 거였다.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마왕을 잡으러 간 사이에 지구는 자기 나름대로 마왕을 만들어낸 모양이었다. 조금 더 걸어가자 편의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통유리 안쪽으로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는데, 그 줄 끝에 낯선 물건이 있었다. 사람 팔뚝만 한 크기의, 살갗이 반투명한 슬라임 비슷한 게 계산대 옆 어항 같은 통에 담겨 팔리고 있었다. 옆에는 손글씨로 '몬스터 부산물 - 초급 연금 재료'라고 적혀 있었다. 망했다. 뭔지는 몰라도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줄을 서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그 슬라임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거 3등급짜리 맞아요? 요즘 시세가 좀 이상하던데." "3등급 맞다니까요, 라벨 보세요. 요즘 D랭크 게이트에서 나온 거라 물량이 없어서 그래요." 나는 그 대화를 흘려들으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려다 멈춰 섰다. 유리문에 붙은 스티커 하나가 눈에 밟혔기 때문이었다. [탐색자 등급 검증 서비스 - 스테이터스 확인 1회 3,000원] 스테이터스. 그 단어는 낯설지 않았다. 이세계에서도 비슷한 게 있었으니까. 다만 그게 지구에도 있다는 게 문제였다. 이세계에서는 여신이 부여한 힘이었는데, 여기서는 3,000원짜리 서비스로 팔리고 있었다. 나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 종이 딸랑, 울렸다. 카운터에 있던 점원이 나를 힐끗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저기, 손님. 그 복장으로 들어오시면..." 나는 그제야 내 옷차림을 자각했다. 이세계에서 마왕을 잡을 때 입던 갑주였다. 반쯤 그슬리고 여기저기 찢어진 채였다. 지구로 돌아오면서 갈아입을 생각도 못 했다. 애초에 그럴 정신도 없었다. 마왕이 죽어가는 걸 보면서 옷 매무새를 걱정할 여유가 어디 있었나. "미안합니다." 나는 짧게 사과했다. 점원은 여전히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혹시... 탐색자세요? 그 갑주, 진짜 좋은 등급 같은데. 어디서 드랍된 거예요? 아이템 감정하는 사람들이 저거 보면 난리 날 것 같은데." 좋은 등급이라니. 이건 그냥 소야가 만들어준 마법 갑주였다. 등급이라는 개념 자체가 나한테는 없었다. 옷이 좋고 나쁨을 따진 적도 없었다. 그냥 안 죽으면 좋은 옷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스테이터스 확인이라는 스티커를 가리켰다. "이거, 되나요." 점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카운터 밑에서 작은 수정구 같은 걸 꺼냈다. 손바닥만 한 반투명한 크리스탈이었다. 표면에 잔금이 몇 개 나 있는 걸 보니 꽤 오래 써먹은 물건 같았다. "손 올려보세요. 근데 이거 진짜 대충 만든 거라 오차 좀 있어요. 3,000원 값어치는 없다고 다들 그러던데." 나는 손을 올렸다. 순간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이름: 서준호] [레벨: 95] [직업: 없음] [칭호: 마왕 토벌자] [특수: 여신 소야의 가호] 점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걸 봤다. 크리스탈이 손안에서 파직,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저... 이거, 고장 난 것 같은데요." 점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손에 든 크리스탈 조각을 내려다보는 표정이, 마치 로또를 잘못 긁은 사람 같았다. 나는 갈라진 크리스탈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괜찮다. 이런 건 익숙하다. 이세계에서도 내 능력치를 처음 본 사람들은 다들 저런 얼굴을 했으니까. 소야조차 처음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나는 그게 좋은 반응인지 나쁜 반응인지도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좋은 쪽이었다. 그런데 여긴 지구고, 점원은 소야가 아니었다. "레벨 95라니, 이거 국내 최고 랭커도 저 정도는 아닌데. 손님, 혹시 어디 소속이세요? 헌터 협회? 아니면..." 점원이 뭔가 더 물으려 했지만 나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지갑을 열었다. 이세계 화폐뿐이었다. 금화 몇 개와 은화,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준 나무 조각 부적 같은 게 전부였다. 당연히 3,000원을 낼 수 없었다. "수리비는 나중에 드릴게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편의점을 나왔다. 등 뒤에서 점원이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손님! 손님, 잠깐만요! 명함이라도!" 하는 소리가 유리문 너머로 멀어졌다. 다시 길을 걸으며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5년. 소야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지구는 5년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나는 이세계에서 10년을 보냈지만, 이곳의 시간은 그보다 절반만 흘렀다. 부모님과 지은 누나는 여전히 나를 15살짜리 실종된 동생으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생각을 하자 걸음이 빨라졌다. 집으로 가는 길은 기억보다 훨씬 낯설었다. 익숙한 골목 세 개 중 하나는 아예 사라지고, 대신 거대한 철망으로 둘러싸인 공터가 자리했다. 철망 안쪽에는 커다란 균열 같은 것이 지면에 새겨져 있었고, 그 균열 주변에서 푸른 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안전지대 - 던전 게이트 D-27 - 민간인 접근 금지] 안전지대라는 표현이 이상했다. 게이트 자체는 위험한 것 아닌가. 그런데 그 앞에 몇몇 사람들이 돗자리를 펴고 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마치 소풍 나온 것처럼. 한 아주머니가 철망에 기대 서서 안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지혁이 아빠, 몇 시간 안 남았지? 물 챙겨왔어!" 안쪽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며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무슨 헌터팀 이름 같은 걸 외쳤다. 팀 이름 뒤에 붙은 숫자가 아마 등급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광경을 한참 바라봤다. 이해가 안 됐다. 이세계에서는 게이트 비슷한 균열이 열리면 마을 사람들이 전부 도망쳤는데, 여기서는 도시락을 먹었다. 균열 하나에 마을 하나가 통째로 사라지는 걸 두 눈으로 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그 균열 앞에서 아이스박스를 열고 있었다. 다행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두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세상이 이 정도로 익숙해졌다는 게 다행이면서도, 그 익숙함이 어디서 왔는지를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했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저 균열 안에서 죽어나갔기에, 이렇게 태연하게 도시락을 펼 수 있게 됐을까. 나는 그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집이 멀지 않았다. 골목을 하나 더 돌자, 낯익은 슈퍼 간판이 보였다. 예전에 자주 가던 곳이었는데, 간판 아래 붙은 현수막에 '탐색자 전용 할인 - 포션 재료 20% 세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슈퍼 주인도 바뀐 세상에 발을 맞춘 모양이었다. 나는 그 앞을 지나며 잠깐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걸었다. 지금은 슈퍼보다 집이 먼저였다. 그런데 그 순간, 등 뒤에서 낮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끄르르릉. 짐승 울음 같기도, 기계 마찰음 같기도 한 소리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다. 오래 훈련된 반응이었다. 이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에 새겨진 습관이었다. 무릎을 굽히고 무게중심을 낮추는 그 동작 하나에, 10년 치의 공포와 반사가 다 들어 있었다. 돌아보니, 안전지대라던 그 철망 한쪽이 완전히 뜯겨 있었다. 찢어진 틈새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꿈틀거리며 빠져나오고 있었다. 돗자리를 펴고 도시락을 먹던 사람들이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얼굴로 하나둘 일어섰다. 누군가의 젓가락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주머니가 아까 손을 흔들던 그 자리에서, 이번엔 다른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거 뭐야, 던전 안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아직 갑주도 벗지 못한 채로, 검 없는 빈손을 내려다봤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아무도 나한테 설명해준 적이 없었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