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메이드라니, 그게 무슨 말이니." 윤서연이 가장 먼저 목소리를 냈다. 당황이 그대로 드러난 어조였다.
포크를 든 손이 허공에서 멈춰 있었다. 접시 위 스크램블에그가 식어가는 것도 잊은 채였다.
"우리는 너를 딸로 데려왔다." 강태준이 뒤이어 말했다. "입양 서류에도 이미 그렇게 올렸어."
"알고 있습니다." 아린은 흔들리지 않고 답했다.
목소리에 떨림 하나 없었다. 여섯 살 아이의 것이라 보기 힘든 침착함이었다.
"그런데 왜." 윤서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린은 하은을 흘긋 보았다. 하은은 숟가락을 든 채 굳어 있었다.
숟가락 끝에서 죽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하은은 그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시선은 오직 아린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하은이가 저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아린이 말했다. "자리를 빼앗길까봐요."
"그건 시간이 지나면." 강태준이 말을 이었지만, 아린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지나도 그 두려움은 자리 자체가 없어지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늘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말한다.' 아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은 상처를 낫게 하지 않는다. 그저 흉터로 굳게 만들 뿐이다.'
하은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끄윽 소리를 냈다.
"내가 언제 두려웠다고 그래!" 하은이 소리쳤다. 얼굴이 붉었다. "멋대로 말하지 마!"
"하은아, 앉아서 얘기하자." 윤서연이 손을 뻗었지만 하은은 이미 몸을 돌린 뒤였다.
그러곤 방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쾅- 소리와 함께 문틀이 흔들렸다. 벽에 걸린 액자 하나가 살짝 기울었다.
식탁에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시계 초침 소리만 유독 크게 들렸다.
"봐라, 하은이도 저렇게 화를 내잖니." 윤서연이 말했다. "네가 스스로를 낮출 이유가 없어."
"제가 낮추는 게 아닙니다." 아린이 말했다. "제가 있을 자리를 정하는 겁니다."
강태준은 팔짱을 끼고 아린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어린아이를 대하는 어른의 시선과는 다른, 무언가를 가늠하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사업을 하며 수많은 사람을 상대해온 그였다. 상대의 진의를 읽어내는 눈이 자연스레 몸에 배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눈이 여섯 살 아이 앞에서 자꾸 흔들렸다.
"여섯 살짜리가 할 말치고는 너무 무겁구나." 그가 말했다.
"제 생각은 확고합니다." 아린이 답했다.
"안 된다." 강태준이 잘라 말했다. "우리는 너를 던전에서 구해온 게 아니라, 가족으로 맞은 거다. 그 결정을 뒤집을 생각은 없어."
목소리에 단호함이 실려 있었지만, 그 단호함 밑에 미묘한 균열이 있다는 것을 아린은 느꼈다. 확신이 아니라 다짐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대화는 그렇게 일단 끝났다. 윤서연은 아린의 어깨를 다독이며 방으로 돌려보냈지만, 표정엔 여전히 근심이 가득했다.
"먹던 거 마저 먹고 가." 윤서연이 다시 자리에 앉히려 했지만, 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날 오후, 아린은 정원 구석에서 하은을 다시 마주쳤다. 하은은 토끼 인형을 끌어안고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나무 그늘이 벤치 위로 얼룩진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 무늬가 흔들렸다.
다가가지 않고, 그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저리 가." 하은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응." 아린은 순순히 몸을 돌렸다.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굳이 실랑이를 벌일 필요가 없었다. 하은의 마음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다.' 아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하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너 진짜로 메이드 하려는 거야?"
아린이 걸음을 멈췄다. "응."
"왜." 하은의 목소리엔 여전히 날이 서 있었지만, 조금 전과는 다른 떨림이 섞여 있었다.
토끼 인형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네 자리를 뺏고 싶지 않아서." 아린이 답했다.
"...나는." 하은이 무언가 말하려다 멈췄다. "나는 그런 거 신경 안 써."
"그래." 아린은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하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토끼 인형의 귀를 만지작거리는 손만 바쁘게 움직였다.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새 한 마리가 나무 위에서 짧게 울다가 날아갔다.
아린은 그 자리에 더 머물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굳이 답을 강요할 필요는 없었다.
몇 걸음 걷다가 아린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하은은 여전히 벤치에 앉아 있었지만, 시선은 아까와 달리 아린의 등을 좇고 있었다.
'하은이의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아린은 그렇게 느꼈다.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균열이 생긴 것 같았다.
균열은 작았다. 하지만 균열이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벽은 한 번에 무너지지 않는다. 작은 틈이 쌓여야 비로소 무너진다.
+++
밤이 되자 강태준과 윤서연은 서재에서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린은 복도를 지나며 그 대화를 우연히 들었다.
서재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걸음을 멈춘 것은 우연이었지만, 그대로 지나치지 않은 것은 아린의 선택이었다.
"저 애 말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잖아." 강태준의 목소리였다.
"그래도 여섯 살짜리한테 그런 결정을 시킬 순 없어요." 윤서연이 반박했다.
"결정은 벌써 저 애가 내렸어. 우리가 막고 있는 거지."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강태준이 서류를 뒤적이는 듯했다.
"당신도 봤잖아." 강태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은이가 그렇게 화를 낸 것도 처음이야. 저 애 앞에서만."
"그건 하은이가 불안해서 그런 거예요. 아린이 탓이 아니라."
"내 말은 그게 아니야." 강태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저 애는... 여섯 살답지 않아. 그게 걱정된다는 거야."
윤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종이 넘기는 소리도 멈췄다.
아린은 그 자리에 서서 잠시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의 태도가 처음보다는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강태준의 목소리에는 곤혹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딸로 데려온 아이가 스스로 자리를 낮추겠다 나서는 상황을, 어떤 아버지가 태연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곤혹스러움이 오히려 균열의 틈을 넓히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확정된 것은 없었다. 강태준은 여전히 반대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윤서연은 하은의 상처를 더 우선했다.
"일단 며칠 더 지켜보죠." 윤서연이 말했다. "하은이도 저러다 괜찮아질 수도 있고."
"그래, 그러자." 강태준이 동의했지만, 목소리에는 확신이 부족했다.
'시간이 필요하다.' 아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낮에 있었던 일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하은의 붉어진 얼굴, 토끼 인형을 쥔 손, 등을 좇던 시선. 그리고 서재에서 흘러나온 두 사람의 흔들리는 목소리까지.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 아린은 그렇게 판단했다. '이대로라면 결국 원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다음 날 벌어진 일이 곧 알려주었다.
이른 아침, 저택 안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하인들이 뛰어다니는 발소리와 다급한 목소리가 뒤섞여 복도를 울렸다. 아린이 방문을 열고 나갔을 때,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하얗게 굳은 표정의 윤서연이었다.
"아린아." 윤서연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은이가 밤새 열이 나서 쓰러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