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여섯 살에 내려놓은 이름

3화

저택에서의 시간이 열흘을 넘어가면서, 하은의 거부는 잦아들기는커녕 더 뚜렷해졌다. 처음 며칠은 그저 서먹함이었다. 낯선 아이가 갑자기 딸의 자리에 들어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린은 그렇게 이해하고 넘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먹함은 날이 선 것으로 바뀌었다. 아린이 정원을 지나가면 하은은 굳이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식사 자리에서는 늘 시선을 피했다. 눈이 마주칠 것 같으면 젓가락질에 더 집중하는 척했다. 하녀들도 그 변화를 눈치챘는지, 하은의 앞에서는 유독 말을 조심했다. 그러나 아린이 없는 곳에서는 수군거림이 그치지 않았다. 그 수군거림이 결국 아린의 귀에까지 흘러들어 온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날은 아린이 선생님에게 배운 마법 기초를 연습하던 중이었다. 손끝에 작은 빛을 모으는 연습이었다. 선생님은 이 연습이 마력 회로를 여는 첫걸음이라 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반년이 걸려도 성공하지 못하는 연습이라고도 했다. 아린은 방문을 잠그지 않았다. 숨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숨을 고르고, 마력을 손끝으로 밀어냈다. 전생의 기억에도 없는 감각이었지만, 몸이 알아서 길을 찾아가는 듯했다. 반짝- 작은 빛이 손끝에서 피어올랐다. 은은한 빛이 방 안을 잠시 밝혔다가 사그라들었다. 그 순간, 하은이 문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린은 문틈의 그림자를 늦게 알아챘다. 이미 하은의 눈에 빛이 다 담긴 뒤였다. "흥, 그런 것도 못하면서." 하은이 문을 벌컥 열며 들어왔다. 문이 벽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하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뭘 못한다는 거야." 아린이 담담하게 되물었다. 되묻는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하은의 화를 부추기는 모양이었다. "엄마 아빠가 너 칭찬하는 거 다 들었어. 마력이 좋다고, 재능이 있다고." 하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여섯 살까지 마력이 하나도 안 늘었는데." 말끝이 잦아들면서, 하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가 이내 참는 듯 사라졌다. 자존심이 눈물을 삼킨 모양이었다. '그것이었구나.' 아린은 그제야 하은의 분노 아래 깔린 것을 짚어냈다. 단순한 자리 다툼이 아니었다. 비교당하는 두려움이었다. 여섯 살 아이에게 재능이란 곧 존재의 값어치였다. 부모의 칭찬이 갑자기 다른 아이에게 쏟아진다면, 그 아이는 자신이 밀려났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른의 눈으로 보면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아이의 세계에서는 전부였다. "나는 너랑 경쟁할 생각 없어." 아린이 말했다. 진심이었다. 딸의 자리에도, 재능을 인정받는 것에도 아린은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 진심이 하은에게는 다르게 들렸을 것이었다. "거짓말." 하은은 그렇게 쏘아붙이고 나가며, 아린의 연습용 마법 도구를 밀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쨍그랑- 유리 구슬이 깨졌다. 선생님이 특별히 빌려준 도구였다. 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바닥에 작은 은빛 반사를 남겼다. 아린은 잠시 그 조각들을 내려다보았다. 화가 나지 않았다. 다만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 하인들이 소리를 듣고 몰려왔다. 문 열리는 소리와 유리 깨지는 소리가 복도까지 울린 탓이었다. 그중 나이 든 하녀 한 명이 혀를 찼다. "쯔쯔, 아가씨가 심술이 나셨구먼. 새로 온 애가 얼마나 얄미웠으면." 그 말은 아린을 향한 게 아니었지만, 아린의 귀에는 또렷이 박혔다. 하녀는 아린을 힐끗 보고는 다시 하은이 사라진 복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 편을 들어야 하는지, 이미 정해져 있는 눈치였다. '내가 얄미운 존재로 비치는구나.' 그는 그렇게 정리했다. 다른 하녀가 유리 조각을 치우며 중얼거렸다. "고아 출신이 어디 감히 이 댁에 들어와서." 작은 목소리였지만, 아린은 놓치지 않았다. 빗자루로 조각을 쓸어 담는 손길이 유독 거칠었다. 그 거친 손길에서, 하녀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 있는지 다 드러났다. '이 저택에서 나는 딸이 아니라 이물이구나.' 그 생각이 가슴 깊은 곳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아린은 그 자리에 서서 하녀들이 조각을 다 치울 때까지 기다렸다. 아무도 아린에게 다친 곳은 없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유리 조각만이 중요한 문제였다. 방으로 돌아온 아린은 침대 끝에 앉아 깨진 구슬이 놓여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텅 빈 자리였다. 그 텅 빈 자리가, 지금 이 저택에서 자신이 서 있는 위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밤이 깊었다. 아린은 잠들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바람 소리가 낮게 들렸다. 저택은 조용했지만, 그 조용함이 오히려 낮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되짚게 만들었다. 전생의 아버지가 자주 하던 말이 떠올랐다. "싸움에서 이기는 법은 상대를 이기는 게 아니다. 상대가 싸울 이유를 없애는 거다." 그 말은 사업 이야기를 할 때 나온 것이었다. 경쟁사와의 다툼에서, 상대를 짓밟기보다 다툴 필요가 없게 만드는 것이 더 오래가는 승리라는 뜻이었다. 그때는 그저 어른의 말이라 흘려들었다. 지금 이 순간, 그 말이 전혀 다른 무게로 돌아왔다. 하은은 아린을 이기고 싶어서 싸우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밀려날까 봐 겁이 나서 싸우는 것이었다. 그 두려움은 아린이 아무리 경쟁할 생각이 없다고 말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말로는 지울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그 두려움의 뿌리를 뽑아야, 진짜로 싸움이 끝날 터였다. '그렇다면 내가 밀려나는 위치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면 되지 않을까.' 아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딸의 자리를 다투지 않으면 된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앉지 않으면 된다.'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아린은 스스로도 놀랐다. 여섯 살 아이의 몸이었지만, 판단은 어른의 것이었다. 몸과 생각의 나이 차이가 이럴 때마다 낯설게 다가왔다. '딸이라는 신분을 내려놓는다.' 그는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되뇌어 보았다. 이상하게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한구석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딸이라는 자리는 처음부터 아린이 원해서 얻은 것이 아니었다. 강태준과 윤서연이 베푼 온정이었고, 하은에게는 침입이었다. 그 자리를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메이드. 이 저택에는 수십 명의 사용인이 있었다. 그들은 가족이 아니었지만, 저택의 일원으로 존재했다. 하은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자리였다. 사용인의 자리라면 재능을 뽐낼 필요도 없었고, 부모의 칭찬을 받아낼 필요도 없었다. 그저 주어진 일을 하고, 그 대가로 이 집에 머무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 자리라면, 나는 이 집에 남을 수 있고, 하은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아린은 그렇게 결론지었다. 결론에 이르자, 마음이 이상하게 가벼워졌다. 딸이라는 지위에 애초에 큰 집착이 없었던 탓일지도 몰랐다. 전생에서도 가족이란 이름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그였다. 사업을 물려줄 자식도, 정을 나눌 형제도 없이 홀로 회사를 키워온 삶이었다. 가족이라는 단어는 그에게 낯선 개념에 가까웠다. '내일, 강태준 님과 윤서연 님께 말씀드려야겠다.' 그는 그렇게 결심하며 눈을 감았다.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눈을 감고서도 낮에 있었던 일들이 자꾸 되풀이해서 떠올랐다. 유리 구슬이 깨지는 소리, 하녀들의 수군거림, 하은의 떨리던 목소리.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지며 결론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 아침이 밝았다. 식탁 위엔 여느 때처럼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하은은 여전히 아린을 쳐다보지 않았다. 어제의 일이 남긴 앙금이 그대로 식탁 위를 떠돌았다. 강태준은 신문을 뒤적이며 조용히 식사를 했고, 윤서연은 하은의 눈치를 살피듯 이따금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이 하은에게 가 닿을 때마다, 하은은 애써 밥그릇에 눈을 박았다. 아린은 그 모든 풍경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이 어색함을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지, 그 답을 이제는 내놓아야 할 때였다. 식사가 끝나자, 아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강태준과 윤서연을 향해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아린에게 쏟아졌다. 하은도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니." 윤서연이 물었다. 목소리에는 걱정이 섞여 있었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그녀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눈치였다. 아린은 잠시 숨을 골랐다. 여섯 살 아이의 목소리로 어른의 결심을 전해야 했다. 문장을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정리했지만, 실제로 입 밖에 내는 순간의 무게는 또 달랐다. "저를 딸이 아니라, 이 저택의 메이드로 써주십시오." 식탁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강태준의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혀 짧은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하은의 눈이 순간 커졌다. 표정이 무너지듯 흔들렸다.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던 모양이었다. 승리감보다는 당혹감이 먼저 얼굴에 떠올랐다. 윤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아린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시선 속에는 놀람과 함께, 무언가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린도 아직은 짐작할 수 없었다. 식탁 위의 정적은 좀처럼 깨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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