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일주일 후, 나는 은행 앞 ATM기 앞에 서 있었다.
아침부터 고시원 원장이 방문을 두드렸다.
"오늘까지 밀린 거 정리 안 하면 짐 뺀다." 원장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나는 문틈으로 고개만 내밀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문이 닫히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밀린 돈이 얼마였더라.'
나는 손가락을 접어가며 숫자를 셌다.
'월세 15만 원, 그중 절반은 지난달에 냈고, 남은 게 7만 5천 원.'
'거기에 이번 달 치까지 합치면...'
계산이 끝날 때마다 숫자가 점점 커져서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방송 후원금 12,000원과 강몬 토벌 보상금 38,000원이 통장에 들어와 있었다.
합쳐서 50,000원이었다.
그 돈이 지금 내가 가진 전부였다.
고시원 월세가 밀려 있었다.
그중 3만 원을 인출해서 오늘 안에 원장에게 건네야 했다.
나머지 2만 원은 일주일 치 식비로 남겨둘 계획이었다.
편의점 삼각김밥 하나가 1,200원이니, 하루 두 끼만 먹으면 열흘은 버틸 수 있었다.
은행 안은 한산했다.
창구 앞에 놓인 대기표 발급기 옆으로 낡은 소파가 하나 있었고, 그 위에 누군가 흘린 커피 얼룩이 갈색으로 눌어붙어 있었다.
나는 그 앞을 지나 ATM기 앞으로 곧장 걸어갔다.
화면에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손끝이 떨렸다.
작은 손가락으로는 숫자 버튼도 헛짚기 일쑤였다.
세 번째 시도에서야 겨우 숫자 네 개를 제대로 눌렀다.
'3만 원.'
'3만 원만 뽑으면 돼.'
인출 버튼을 누르기 직전, 은행 앞 유리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에이!"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나는 그대로 몸이 굳었다.
뒤를 돌아보니 리아가 서 있었다.
청색 머리를 양쪽으로 묶고, 상어 헤어핀을 꽂은 채였다.
교복 위에 걸친 후드집업은 어디서 봤는지 낯익은 캐릭터 로고가 박혀 있었다.
발에는 새하얀 운동화가 신겨져 있었는데, 흙 한 톨 묻지 않은 걸 보니 오늘 새로 산 것 같았다.
"여, 여긴 어떻게..." 나는 말을 더듬었다.
"서연 언니가 여기 근처라고 해서 와봤어!" 리아가 씩 웃으며 다가왔다.
'서연이 어디까지 알아낸 거지.'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리아는 성큼성큼 다가와 내 앞에 딱 붙어 섰다.
키 차이가 커서 나는 리아를 올려다봐야 했다.
바닥과 리아의 눈높이 사이 거리를 가늠하며, 나는 속으로 얼마나 더 작아 보이는지를 계산했다.
"오늘도 신발 그대로네." 리아가 내 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근데 볼 때마다 뭔가 이상해."
나는 신발 코를 슬쩍 뒤로 뺐다.
닳아서 밑창 옆이 벌어진 부분이 보일까 봐 신경이 쓰였다.
리아는 갑자기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파란 눈동자가 나를 뚫어질 듯 응시했다.
속눈썹이 길어서 눈을 깜빡일 때마다 그림자가 잠깐씩 뺨에 어렸다.
"너..." 리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서 본 것 같아."
나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봤을 리 없어.'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이 몸은 다섯 달 전에 생긴 몸이야.'
'이전의 나를 알 사람은 아무도 없어.'
하지만 확신이 들지 않았다.
리아의 시선이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다.
"저, 그냥 흔한 얼굴이라서요." 나는 겨우 대답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리아가 미간을 좁혔다.
"눈빛이. 눈빛이 어른 같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목구멍이 바짝 말랐다.
그 순간, 리아의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
리아가 화면을 확인했다.
서연에게서 온 문자였다.
화면 일부가 내 시야에 스쳤다.
"구조 배지 번호 조회 완료. 신원 대조 중. 나이 불일치 항목 발견."
나는 그 문구를 보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이 불일치.'
서연이 이미 뭔가를 발견한 게 분명했다.
'구조 배지 번호로 뭘 조회했다는 거지.'
'설마 원래 나이랑 지금 이 몸의 나이가 다르다는 걸 알아낸 건가.'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리아는 문자를 다 읽지 않고 화면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뭔데 그렇게 굳어?" 리아가 물었다.
눈치는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 아니에요." 나는 손을 내저었다.
목소리가 떨리는 걸 감추려고 억지로 웃어 보였다.
"됐고!" 리아가 갑자기 밝은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나 오늘 너한테 할 말 있어서 온 거야."
"뭔데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 집 가자." 리아가 씩 웃으며 말했다.
"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우리 집, 이 근처야." 리아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같이 밥 먹자!"
"저, 저는 괜찮아요." 나는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등에 ATM기가 닿아서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안 괜찮아." 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눈빛에는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
"너 오늘 밥 안 먹었지?" 리아가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이었다.
아침에 물만 두 컵 마시고 나온 게 전부였다.
"그럴 줄 알았어." 리아가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손아귀 힘이 셌다.
라피도 마법을 쓰는 몸이라 그런지, 뿌리치려 해도 꼼짝하지 않았다.
손목에 닿은 리아의 손이 따뜻해서, 오히려 그 온도가 더 무섭게 느껴졌다.
"저, 정말 안 가도..." 나는 다시 손을 빼려 했다.
발끝을 뒤로 끌었지만 신발 밑창이 바닥에 미끄러지기만 했다.
"싫어." 리아가 짧게 말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파란 궤적을 일으키며 발을 뗐다.
순간 세상이 흐릿하게 번졌다.
귓속이 먹먹해지고, 위장이 뒤집히는 듯한 느낌이 스쳤다.
"으악!" 나는 짧게 소리쳤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아직도 리아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발밑은 은행의 대리석 바닥이 아니라 매끈한 보도블록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쳤다.
우리는 이미 은행에서 몇 블록 떨어진 낯선 건물 앞에 서 있었다.
고급 오피스텔이었다.
1층 외벽은 전면 유리로 되어 있었고, 그 안으로 대리석 로비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천장에는 샹들리에처럼 생긴 조명이 매달려 있었고, 로비 한쪽에는 안내 데스크에 앉은 경비원이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숙였다.
로비 유리문에 '리아'라는 이름이 새겨진 명패가 붙어 있었다.
'저 나이에 이런 데서 사는 애가 있나.'
나는 명패를 올려다보며 잠시 넋을 놓았다.
'서연도 이 근처에 산다고 했지.'
"다 왔다!" 리아가 여전히 내 손목을 붙잡은 채 활짝 웃었다.
나는 그 손을 뿌리치지 못한 채, 서연이 보낸 문자의 마지막 문구를 떠올렸다.
나이 불일치 항목 발견.
그 뒤에 어떤 내용이 더 있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리아의 손에 끌려 로비 문턱을 넘는 순간에도, 나는 그 문장 하나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