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꼬마 배신자, 정체 들켰다

1화

새벽 다섯 시, 나는 강남 던전 입구 앞에 서 있었다. 기온은 영하 3도였다.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퍼졌다. 입장 게이트 옆 자판기에서 산 800원짜리 캔커피를 손에 쥐고 있었다. 캔이 미지근했다. 그마저도 아까워서 아직 뜯지 않았다. 손이 시렸다. 장갑을 살 돈이 없어서였다. 지난주에 다이소에서 2천 원짜리 장갑을 살까 고민했지만, 결국 사지 않았다. 그 2천 원이 이틀 치 탄약값이었기 때문이다. 허리에는 성진정밀 SP-9을 차고 있었다. 중고나라에서 23만 원에 산 리퍼브 권총이었다. 탄창은 여섯 발이 들어갔지만, 실제로 쓸 수 있는 건 다섯 발뿐이었다. 한 발은 늘 걸렸다. 수리를 맡기고 싶었지만 수리비가 8만 원이었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방송 준비 화면이 떠 있었다. 액정 모서리에 금이 가 있었다. 채널명은 '에이'였다. 구독자 수는 8명이었다. 어제도 8명이었고, 그 전날도 8명이었다. 후원금은 지난 한 달간 0원이었다. '오늘은 한 명이라도 늘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방송 시작 버튼을 눌렀다. 화면 구석에 채팅창이 떴다. "에이님 오늘도 강몬 잡으러 가세요?" 닉네임 '탐험러버'가 물었다. "네." 나는 짧게 답했다. 목소리가 어렸다. 내 목소리라는 게 아직도 낯설었다. 27년을 살아온 정신이 이 몸에 갇힌 지 다섯 달째였다. 키는 130센티도 안 됐다. 손가락은 얇았고, 손등에는 아직 젖살이 남아 있었다. 흰 머리는 등 중간까지 내려왔고, 눈은 붉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남의 얼굴 같았다. 캔커피를 결국 뜯었다.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게 목을 넘어가자 정신이 조금 들었다. 던전 게이트를 통과하자 축축한 흙냄새가 밀려왔다. 강남 던전 3층 입구였다. 입구부터 회색 이끼가 낀 벽이 이어졌다. 벽 틈에서 물이 새어 나와 바닥에 얕은 물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신발이 젖었다. 이 운동화도 벌써 밑창이 갈라지고 있었다. 채팅창에 '민들레'가 물었다. "에이님 신발 또 그거예요?" "네, 아직 신을 만해요." 나는 답했다. 사실 신을 만한 건 아니었다. 걷다 보니 슬라임 무리가 보였다. 등급은 E급, 강몬이라 불리는 강남 던전 몬스터였다. 나는 은신 스킬을 켰다. 몸이 순간적으로 투명해지는 게 아니라, 기척이 옅어지는 감각이었다. 살갗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함께 왔다. 슬라임 다섯 마리가 눈치채지 못한 채 젤리처럼 흐물거리고 있었다. 색은 청록색이었고, 표면에 작은 기포가 계속 올라왔다 터졌다. 나는 오른쪽 눈을 가늘게 떴다. 배릿마크가 발동됐다. 슬라임 중심부에 붉은 십자 표식이 떠올랐다. 약점 부위였다. 권총을 들었다. 손목이 후들거렸다. 다섯 발. 다섯 마리. '하나라도 빗나가면 안 돼.'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탄약값이 없어서 못 사.' "에이님 손 왜 떨려요?" 채팅창에 '민들레'가 물었다. "긴장돼서요." 나는 짧게 답했다. 사실은 추위 때문이기도 했다. 탕. 첫 발이 표식을 정확히 맞췄다. 슬라임이 녹아내리며 사라졌다. 탕. 탕. 탕. 세 마리가 더 사라졌다. 채팅창이 조금 빠르게 움직였다. "오 잘하시네요" "에이님 실력 좋아지셨다" 마지막 한 발이 걸렸다. 탄창이 걸린 것이다. 익숙한 일이었다. 나는 재빨리 단검을 뽑아 남은 슬라임에게 달려들었다. 아사신 클래스답게 몸이 가벼웠다. 발끝으로 바닥을 밀어내는 순간, 몸이 예상보다 멀리 튀어 나갔다. 일격에 슬라임이 터졌다. 터진 자리에 작은 결정 몇 개가 떨어졌다. 슬라임 코어였다. 개당 500원짜리였다. 나는 허리를 굽혀 하나씩 주웠다. 다섯 개면 2,500원이었다. 오늘 저녁 컵라면 두 개는 살 수 있었다. "오늘도 별일 없이 끝나겠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통로가 점점 좁아졌다. 천장에서 물방울이 이따금 떨어졌다. 발소리가 벽에 부딪혀 조금씩 울렸다. 그런데 그때, 저 앞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비명 같았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었다. 채팅창도 조용해졌다. "방금 그 소리 뭐예요?" 탐험러버가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좁은 통로 끝에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초보 탐험가용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갑옷 여기저기가 찢어져 있었다. 다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바닥에 붉은 자국이 길게 끌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를 둘러싼 건 D급 강몬, '록그렘린'이었다. 돌덩이 같은 몸에 팔이 길고, 손끝이 곡괭이처럼 뾰족했다. 세 마리였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돌과 돌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살, 살려줘..." 남자가 기어가며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셋인데.' 나는 계산했다. '탄창은 다섯 발, 록그렘린은 한 발로 안 죽어.' '최소 두 발씩은 필요해.' '여섯 발이 필요한데 다섯 발밖에 없어.' 채팅창이 갑자기 빠르게 올라갔다. "에이님 조심하세요!" "저거 D급이잖아요!!" "그냥 신고하고 도망가세요 제발" 나는 숨을 골랐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남자의 신음이 계속 들렸다. '구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은신 스킬을 다시 켰다. 기척이 다시 옅어지는 감각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리고 록그렘린 무리 쪽으로 몸을 낮춘 채 다가가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디딜 때마다 물웅덩이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했다. 바로 그 순간, 등 뒤에서 뭔가 파란빛이 스쳐 지나가는 걸 느꼈다. 번개처럼 빠른, 무언가의 잔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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