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뽑기로 오르는 계단

5화

귀환석을 사용하자 시야가 하얗게 번쩍였다. 눈앞이 온통 새하얀 빛으로 가득 찼다가, 서서히 색을 되찾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청명 길드 강남지부 로비에 서 있었다. 익숙한 대리석 바닥과 은은한 조명이 눈에 들어왔다. 던전 안의 습하고 비릿한 공기와는 전혀 다른, 서늘하고 깨끗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온몸이 흙과 검붉은 액체로 얼룩져 있었다. 셔츠 소매는 어딘가에 걸려 찢어져 있었고, 손등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상처가 욱신거렸다. 로비를 지나던 몇몇 사람들이 나를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이 꼴로 로비를 걸어 다니면 눈에 띄겠지.) 나는 대충 옷매를 정리하며 접수창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연이 접수창구에서 나를 발견하고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녀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어깨, 그리고 손등으로 빠르게 옮겨갔다. "많이 다치셨네요. 치료실로 안내해드릴게요." 낮고 담담한 어조였지만, 걸음은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 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나를 안내했고, 복도를 지나는 동안 몇 마디 짧은 질문을 던졌다. "출혈은 없으신가요?" "찢어진 것 같긴 한데, 심하진 않아요." "일단 치료사분께 보여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치료실 문 앞에서 서연은 나를 안으로 들여보내고,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문이 닫히는 걸 지켜봤다. 치료실에서 간단한 응급처치를 받았다. 젊은 치료사는 내 손등의 상처를 소독하고, 회복 마법이 걸린 붕대를 감아주었다. 손등이 따끔거리다가 이내 미묘하게 저릿한 온기로 바뀌었다. "오늘 하루에 이 정도 상처면 운이 좋으신 편이에요." 치료사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운이 좋았던 게 아니라, 나리가 잘 해준 거지만.) 치료가 끝난 뒤, 나는 다시 서연의 창구로 돌아왔다. 서연은 던전 로그를 확인하며 미간을 좁혔다. 화면 위로 빠르게 스크롤되는 로그를 그녀의 눈동자가 좇고 있었다. "미확인 개체와의 전투 기록이 있네요. 정확히 어떤 형태였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으세요?" 그녀의 손가락이 서류 위에서 멈췄다. 나는 몬스터의 생김새와 검붉은 색, 촉수의 형태를 최대한 자세히 설명했다. "몸통은 슬라임보다 컸고, 색은 검붉었어요. 등 쪽에서 촉수 같은 게 세 갈래로 뻗어 나왔고, 움직임이 일반 슬라임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말을 하는 동안에도 그 눈빛이 자꾸 떠올랐다. 검붉은 표면 위에서 번뜩였던, 사람의 눈과는 다른 이질적인 광채였다. 서연은 그 내용을 빠르게 받아 적었다. 펜 끝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슬라임 던전에 이런 개체가 나타난 건 이례적인 일이에요. 보고서는 상부에 전달하겠습니다." "상부라면..." "길드 본사 조사팀입니다. 이런 이상 개체는 등급 재분류가 필요할 수 있어서요." 그녀는 서류를 정리하며 덧붙였다. "보통 초보 던전에서는 나오지 않는 형태거든요. 등급 외 개체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별다른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등급 외라니, 생각보다 심각한 건가.) 서연은 잠깐 서류를 넘기다가, 문득 시선을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이 서류를 훑을 때와는 다르게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그런데 이도현 탐사자님." "네?" "오늘 하루에 슬라임 다수 처치, 미확인 개체 처치까지 하셨는데, 부상 정도가 생각보다 적네요." 그녀의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책상 위에 놓인 내 던전 로그와, 방금 치료사에게 받은 처치 소견서를 번갈아 보는 시선이었다. "파트너 요정의 지원 능력이 상당히 우수한 것 같습니다." 나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심장이 한 박자 빠르게 뛰었다. (설마 나리에 대해서 뭔가 알아챈 건가.) 머릿속으로 온갖 변명이 스쳐 지나갔지만, 입 밖으로는 최대한 태연한 말이 나와야 했다. "아, 네. 운이 좋았습니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을 흘렸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서연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별다른 말 없이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그 짧은 침묵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정산해드릴게요. 오늘 처치 보상입니다." 그녀가 화면을 조작하자 곧 결제 알림음이 울렸다. 정산 결과, 슬라임 처치 보상과 미확인 개체 처치 보너스를 합쳐 예상보다 훨씬 큰 금액이 통장에 들어왔다. 나는 화면에 뜬 숫자를 보며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정도면... 확실히 서류 넣는 것보다 낫네.) 몇 달 동안 이력서를 넣으며 벌었던 돈보다, 하루 만에 벌어들인 금액이 몇 배는 많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성취감이었다. 서연에게 짧게 인사를 하고 창구를 벗어나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길드를 나서서 걷는 길, 나리가 내 어깨 위에 앉아 조잘거렸다. 저녁 무렵의 강남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네온사인 불빛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계약자님, 오늘 첫날인데 벌써 미확인 개체까지 잡으셨어요! 완전 대박이에요!" 나리의 목소리가 유난히 신나 있었다. 작은 날개가 파닥거리며 반짝이는 빛을 흩뿌렸다. "그건 사실 네가 다 한 거잖아." "에헤헤, 그런가요?" 나리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뺨을 살짝 콕 찔렀다. 작고 차가운 손끝이 스치는 감각이 묘하게 간지러웠다. 나는 그 손길을 슬쩍 피하며 웃었다. "아무튼, 내일도 던전 갈 거야. 이번엔 좀 더 안전한 곳으로." "네! 제가 최고의 루트로 안내해드릴게요!" 나리가 어깨 위에서 폴짝 뛰며 대답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오늘 하루의 피로를 조금 덜어주는 것 같았다. 집으로 가는 길, 편의점에 들러 간단히 먹을 걸 사 들고 걸었다. 봉투 안에서 캔맥주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오늘은 이 정도 사치 부려도 되겠지.) 그날 밤, 나는 자취방으로 돌아와 상태창을 다시 열어봤다. 방 안의 낡은 형광등이 깜빡이다가 이내 안정적으로 켜졌다. [레벨 3] [가챠 소비 가능 레벨: 2] 화면에 뜬 숫자를 보며 손끝이 저릿해질 정도로 기대감이 커졌다. (다음번엔 또 뭐가 나올까.) 당장이라도 가챠를 돌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애써 참았다. (급할 건 없지. 상황 봐서 천천히.) 동시에 낮에 봤던 검붉은 몬스터의 눈빛이 자꾸 머릿속을 스쳤다. 그 눈빛은 단순한 몬스터의 것이라기보다, 뭔가를 관찰하는 듯한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그냥 우연히 나타난 개체는 아닐 것 같은데.) 캔맥주를 따서 한 모금 마셨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차가운 감각이 잠시 생각을 흐트러뜨렸다. 스마트폰이 짧게 울렸다. 모르는 번호로 온 문자였다. [청명 길드 본사입니다. 오늘 강남 1번 게이트에서 확인된 이상 개체와 관련하여 면담을 요청드립니다. 시간 되실 때 연락 주십시오.] 나는 그 문자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화면의 글자가 눈에 익을 정도로 훑고 지나갔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아니라 믿기지 않아서였다. (본사에서... 직접 연락이 왔다고?) 초보 탐사자 등록 첫날에 본사가 직접 연락하는 일은 흔치 않다고 들었다. 지부 게시판이나 커뮤니티에서 봤던 글들이 떠올랐다. 보통은 등급이 높은 개체나, 사건성 있는 던전에서만 본사가 직접 개입한다고 했었다. (그럼 오늘 그 슬라임은... 그냥 이례적인 게 아니라 진짜 문제가 있는 건가.) 나리가 내 손에 들린 스마트폰 화면을 슬쩍 들여다봤다. "어? 이거 뭐예요?" 작은 얼굴이 화면 가까이 다가오며 문자를 읽는 게 보였다. "본사에서 면담하자고 연락이 왔어." 나리의 표정이 순간 미묘하게 굳었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싹 사라진 얼굴이었다. "...본사가요?" 평소와는 다른,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나는 그 반응을 눈치채고 나리를 바라봤다. 어깨 위에서 내려온 나리는 책상 위에 살짝 앉아 나를 마주 봤다. "왜, 뭔가 문제 있어?"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나리는 말을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작은 손끝이 자기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는 게 보였다. 평소라면 곧바로 명랑하게 넘겼을 텐데, 이번에는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나리." "...네." "진짜 아무 일 없는 거야?" 나리는 잠시 나를 올려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냥, 본사라는 곳이 좀... 예민한 곳이라서요."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밤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와 벌레 울음소리가 뒤섞여 방 안까지 스며들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들릴 그 소리가, 오늘은 어쩐지 묘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바람 소리 사이에 섞인, 삐걱거리는 듯한 미묘한 파열음이 신경을 긁었다. (그냥 기분 탓이겠지.) 나는 다시 문자를 내려다봤다. 답장을 보내야 할지, 잠시 손끝이 화면 위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옆에 앉은 나리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평소보다 훨씬 조용한 얼굴로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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