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뽑기로 오르는 계단

3화

붉은 눈은 어둠 속에서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발바닥에 닿는 흙바닥의 감촉이 평소보다 차갑게 느껴졌다. 나리가 내 어깨 옆으로 바짝 다가와 낮게 말했다. "계약자님, 저거 슬라임 던전 몬스터가 아니에요." "그럼 뭐야?" "모르겠어요. 처음 봐요." 그녀의 목소리에서 평소의 여유가 사라져 있었다. 나리는 지원형 요정답게 늘 침착한 편이었는데, 지금은 목소리 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몬스터가... 초보자 던전에?)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던전 입구에서 안내받았던 정보로는 이 구역에 나오는 몬스터는 전부 슬라임 계열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저 붉은 눈은, 내가 알던 그 어떤 슬라임과도 닮지 않았다. 주변의 공기마저 미묘하게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도, 벌레 우는 소리도 어느샌가 뚝 끊겨 있었다. 그 고요함이 오히려 더 불안하게 다가왔다. 그 순간, 저 멀리서 사람의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악! 살려주세요!" 소리가 나는 방향은 붉은 눈이 있는 쪽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계약자님, 위험해요!" 나리가 소매를 붙잡았다. 그녀의 손끝이 옷깃을 파고들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발을 옮기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지만... 저대로 두면 죽어.) 머릿속에서는 온갖 계산이 스쳐 지나갔다. 레벨도 부족하고, 상대의 정체도 모른다. 그런데도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이유를 따질 시간조차 없었다. 모퉁이를 돌자 좁은 공터가 보였다. 그곳에는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 탐사자가 바닥에 넘어져 있었다. 그의 다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바닥에 스며든 피가 흙과 뒤섞여 검붉게 번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지금까지 본 슬라임과는 전혀 다른 형체의 몬스터가 서 있었다. 몸은 검붉은 색으로 번들거렸고, 팔처럼 보이는 촉수가 여러 개 늘어져 있었다. 촉수 표면에는 미끈한 점액이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달빛도 없는 던전 안에서도 이상하게 번쩍이며 빛을 반사했다. 덩어리진 눈알 두 개가 이쪽을 향해 돌아갔다. 그 눈이 나를 향하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나는 목소리를 낮춰 외쳤다. 남자는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도, 도와주세요... 발이 안 움직여요..."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이대로 두면 몇 초 안에 저 촉수에 휘감길 게 분명했다. 나는 상태창을 재빨리 열었다. [가챠] [소비 가능 레벨: 0] (젠장, 레벨이 부족해.) 방금 뽑은 나리 이후로 아직 다음 레벨을 못 채운 상태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새로운 정령을 뽑아 도움을 받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내가 가진 건, 이 단검 하나와 아직 익숙하지 않은 몸뿐이었다. 몬스터가 촉수 하나를 휘둘렀다. 촤악. 나는 몸을 굴려 간신히 피했다. 어깨에 둔한 통증이 스쳤다. 바닥에 흩어진 자갈이 팔꿈치를 긁으며 지나갔다. "나리, 뭐라도 방법 없어?" "저는... 지원형이라 전투는 잘 못 해요!" 나리가 당황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도 방어 결계 정도는 잠깐 펼 수 있어요! 준비할 시간이 필요해요!"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데?" "적어도... 십 초는 벌어야 해요!" 십 초. 지금 상황에서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이 상태로는 답이 없어.) 나는 단검을 고쳐 쥐고 넘어진 남자 앞을 막아섰다. 몬스터가 다시 촉수를 뻗었다. 나는 몸을 낮춰 옆으로 굴렀다. 탁. 바닥을 짚은 손끝이 시큰거렸다. 일어서자마자 반대편 촉수가 날아왔다. 나는 단검으로 그것을 쳐냈지만, 힘의 차이가 확연했다. 손목이 저릿하게 울렸다. 팔 전체로 충격이 퍼졌다. (이거... 슬라임 잡던 감각이랑 완전히 달라.) 지금까지 상대했던 슬라임은 몸통이 물렁해서 단검 한 번이면 갈라지곤 했다. 그런데 이 몬스터의 촉수는 마치 강철에 고무를 씌운 듯한 감촉이었다. 베어내도 곧바로 다시 형태를 되찾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몬스터의 몸통에서 검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나는 그 액체가 바닥에 닿을 때마다 미세하게 지글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치이익. 흙바닥이 그 액체에 닿아 순간적으로 색이 변했다. (저거 맞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산성 물질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몸에 닿아서는 안 된다는 감각뿐이었다. 나는 넘어진 남자의 팔을 붙잡고 뒤로 끌어당겼다. "잠깐, 조금만 참으세요." 남자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다리 상처에서 계속 피가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오래는 못 버텨.) 몬스터가 다시 앞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단검을 앞으로 내밀며 자세를 잡았다. (막을 수 있을까...) 촉수 끝이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이었다. 나는 온몸에 힘을 주고 몸을 비틀었다. 간발의 차이로 촉수가 옆구리를 스쳤다.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찌익. 따끔한 통증이 뒤늦게 밀려왔다. 옆구리를 내려다보니 옷 사이로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깊지는 않았지만, 상처에서 스며나온 피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계약자님!" 나리가 다급하게 외쳤다. "이대로면 위험해요!" "나도 알아!"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숨이 가빠오고 있었다. 이 정도 상대는 지금 내 능력치로는 감당이 안 된다는 걸,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팔다리에 힘이 조금씩 빠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여기서 도망치면 저 사람이 죽어.) 나는 남자를 등 뒤에 두고 몬스터를 향해 다시 단검을 겨눴다. "나리, 결계는 얼마나 남았어?" "조금만... 조금만 더요!" 그녀의 목소리에도 다급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몬스터의 눈알 두 개가 다시 이쪽을 향해 돌아갔다. 마치 먹잇감을 고르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때였다. 몬스터의 촉수 하나가 순식간에 뻗어와 내 발목을 휘감았다. 스르륵. 나는 그대로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등에서 둔한 통증이 퍼졌다. 숨이 턱 막히는 충격이 뒤통수까지 전해졌다. 몬스터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검붉은 몸통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발목이 움직이지 않았다. 촉수가 발목을 조여올수록 다리 전체가 저려왔다. (젠장...)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뒤에서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하세요!" 나리 역시 뭐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그 소리마저 귓가에서 흐릿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몬스터의 눈알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다. 검붉은 몸통에서 흐르는 액체가 바닥에 닿아 또다시 지글거렸다. 치이익. 그 소리만이 이상하게 선명하게 들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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