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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 2화 다음 날 밤, 나는 다시 미륵상 앞에 서 있었다. 바람이 찼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입김이 하얗게 번졌다. 마을 사람들은 진작 문을 걸어 잠그고 이불 속에 들어갔을 시간이었다.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어제의 그 온기, 그 목소리. 분명히 들었다. 분명히 느꼈다. 그런데 낮 동안 몇 번이고 되짚어봐도, 그게 진짜였는지 자신이 없었다. '꿈이었을 수도 있어.'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걸 수도 있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설득해보려 했지만, 결국 발은 다시 이 골목으로 향했다. 육 년 전, 할아버지를 따라 이 미륵상을 손봤던 기억이 났다. 갈라진 돌 틈을 메우고, 이끼를 벗겨내고, 마지막으로 표면을 사포로 다듬었던 그 여름. 그때는 그냥 낡은 석상 하나 고치는 줄로만 알았다. 손바닥을 석상 표면에 얹었다. 차가웠다. 정말 그냥 돌덩이였다. '역시 착각이었나.'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나이에 돌 앞에서 뭘 기대한 건지,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손을 떼려던 참이었다. 스으으. 석상 전체가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연한 다홍빛이었다. 마치 저녁노을이 돌 속에서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심장이 세게 뛰었다. 숨이 턱 막혔다. '이게 뭐야.' 빛은 점점 짙어지더니, 한 지점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흐릿한 윤곽이었다가, 곧 어깨선이 생기고, 팔다리가 생기고, 마지막으로 얼굴이 드러났다. 반투명한 소녀였다. 다홍색 저고리 같은 옷을 입고, 맨발로 석상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달빛이 그 몸을 그대로 통과해 반대편 바닥에 그림자도 없이 떨어졌다. 나는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는지 모른다. 그럴 때마다 소녀는 그대로 있었다. 사라지지 않았다. "드디어 알아채셨네요." 소녀가 웃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입만 벙긋거렸다. 목소리가 목구멍 어딘가에 걸려서 나오지 않았다. "누, 누구야." 간신히 한마디를 짜냈다. 손끝이 떨렸다. "저요?" 소녀가 자기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장난스러운 표정이었다. "저는 오빠가 육 년 전에 고쳐놓은 거예요." "...뭘 고쳐?" "이 돌." 소녀가 자기 발밑, 미륵상을 톡톡 두드렸다. 손이 돌을 통과하지 않고, 정확히 표면에 닿았다. 탁, 탁, 하는 소리까지 났다. 그 순간 마을 어귀 가로등 불빛이 살짝 흔들렸다. 치직. 전기가 튀는 것 같은 소리였다. 나는 흠칫하며 그쪽을 돌아봤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놀라긴 이르실 텐데." 소녀가 손끝을 들어 허공에 원을 그렸다. 작은 빛 알갱이 하나가 손끝에서 피어올랐다. 빛은 서서히 응축되며 형태를 갖췄다. 주먹만 한 크기의, 붉은빛이 도는 결정체였다. "이거 마석이에요." 마석. 던전에서 몬스터를 잡아야 나온다는 그 마석이, 지금 눈앞에서 소녀의 손끝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탐색자 시험 문제집에서나 사진으로 봤던 물건이었다. 실물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저한테 빌잖아요. 아침저녁으로, 몇 명씩." 소녀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세는 시늉을 했다. "그 마음들이 저한테 쌓여요. 그걸 이렇게 바꿀 수 있어요." "쌓인다고... 어떻게?" "저도 몰라요. 그냥 돼요." 소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 태연한 대답이라 오히려 맥이 빠졌다. 신앙이 힘이 된다는 소리였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눈앞에 있는 마석은 진짜였다. 손을 뻗어 만져 보니 서늘하고 단단한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결정체 안쪽에서 미세하게 붉은 빛이 맥동하듯 움직였다. 마치 심장이 뛰는 것 같았다. "이거... 팔면 돈 되는 거 아니야?"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소녀가 킥킥 웃었다. "오빠, 지금 그게 중요해요?" "...아니, 그냥." 민망해서 헛기침을 했다. "이름이 뭐야, 너." 나는 겨우 화제를 돌렸다. "이름이요?" 소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석상 위에 앉은 채로 다리를 대롱대롱 흔들었다. "없었는데. 오빠가 지어줘요." 나는 소녀의 옷 색을 보고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다. "다홍." "다홍." 소녀가 그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보더니 씩 웃었다. "좋네요. 저 이제 다홍이에요." 이름이 정해지자 소녀의 윤곽이 살짝 더 또렷해진 것 같았다. 착각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 방금 전보다 색이 진해 보였다. 그날 밤 나는 다홍에게서 많은 걸 들었다. "마을 사람들 기도가 쌓이면 쌓일수록 나 이렇게 또렷해지는 거예요." "끊기면?" "흐려지죠. 예전엔 거의 안 보일 정도였어요." "...안 보였다고?" "네. 오빠가 이 돌 고쳐주기 전까지는요." 그러니까 육 년 전 할아버지를 따라 갈라진 틈을 메우고 표면을 다듬었던 그 작업이, 이 존재를 다시 세상에 붙잡아둔 거였다. 나는 그때 아무것도 모르고 사포질만 했는데. "그럼 지금, 이 마석 에너지로 원한다면..." 다홍이 말을 흐리며 나를 슬쩍 올려다봤다. "뭔데." "작은 던전, 만들 수도 있어요." "던전을... 만들 수 있다고?"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작게는요. 저랑 오빠 둘이 함께라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이번엔 두려움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떨림이었다. '이거면.' 탐색자 시험에서 두 번 떨어진 것. 학교에서 목공과 진로를 반대하던 담임의 얼굴. 흐릿해진 목공 재능, 손끝에서 예전만큼 살아나지 않는 감각. 그 모든 게 이 작은 소녀 하나로 뒤집힐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진짜야? 진짜 던전을 만들 수 있다고, 이걸로?"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다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조건이 있어요." "조건?" "마을 사람들 기도가 계속 쌓여야 해요. 그리고—" 그런데 그때, 골목 어귀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타박, 타박.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다홍을 향해 소리쳤다. "숨어!" 다홍의 몸이 빛의 알갱이로 흩어지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석도 함께 사라졌다. 방금까지 있던 붉은 빛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숨을 죽이고 뒤를 돌아봤다. 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골목에서 나타난 건 김시우였다. "너 여기서 뭐 해?" 시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 얼굴이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시선이 내 발밑, 미륵상 표면을 훑고 지나갔다. "방금... 누구랑 얘기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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