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강사님, 그 피는 못 드려요

4화

강도희는 안뜰 평상에 앉아 하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을 햇살이 마당을 가로질러 평상 위로 비스듬히 떨어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처마 끝 풍경이 딸랑, 딸랑 울렸다. 강도희는 그 소리를 들으며 손끝으로 평상 나무결을 문질렀다. 상어를 닮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얼굴이었다. 날카로운 눈매, 짙은 눈썹. 웃을 때조차 그 눈빛만은 서늘함을 잃지 않았다. 지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멀리서 하린의 발소리가 들렸다. 종종걸음, 그러나 어딘가 무거운 걸음이었다. 강도희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그 걸음의 무게를 읽어냈다. 네 살배기 딸의 걸음걸이 하나에도 뭔가 얹혀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하린이 평상 앞에 섰다. 소매 끝을 잡아당겨 손목을 가리려는 버릇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곽 선생이 오늘 낯빛이 안 좋더라." 강도희가 대뜸 말을 꺼냈다. 시선은 여전히 딸의 손목께에 머물러 있었다. "무슨 일 있었니." 하린은 대답을 고르며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때까지 소매를 움켜쥐었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사흘이 이틀로 줄어든다.〉 머릿속에서 청구서의 문구가 스쳐 지나갔다. 붉은 글씨, 마감 시각, 위약금 액수. 목구멍이 바싹 말랐다. "어머니." "응." "저, 계약서 하나 보여드릴 게 있어요." 강도희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평상 위에 얹혀 있던 손이 천천히 무릎으로 내려앉았다. "계약서?" 하린은 서고에서 훔쳐본 아홉 번째 조항을 최대한 기억나는 대로 읊었다. 문장 하나를 뱉을 때마다 숨이 짧아졌다. 말하는 내내 목소리가 떨렸다. 네 살짜리가 계약 조항을 줄줄 외우는 모습이 낯설어 보일까 봐 겁이 났다. 어른들 눈에 이상하게 비칠까 봐, 뭔가 잘못됐다고 여겨질까 봐.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곽 선생님이 어제 저한테 다른 계약서에 피로 서명하라고 했어요. 사영계약서라고. 안 하면 사흘 안에 위약금 청구서가 온대요." 강도희의 표정이 굳었다. 눈매가 한층 더 날카롭게 좁아졌다. "위약금이라니, 무슨 소리야." 목소리는 낮았지만 끝이 갈라져 있었다. "입회 계약서 아홉 번째 조항에요. 삼속성 미만이면 사영계약서 미체결 시 중도 이탈로 처리한다고." 한참 정적이 흘렀다. 풍경 소리만 딸랑, 딸랑 울렸다. 강도희가 몸을 일으켰다. 평상이 삐걱, 소리를 냈다. "그 계약서, 지금 가져와 봐." "제가 서고에서 몰래 봤어요. 다시 훔쳐볼 순 없어요, 유모한테 걸려요." 하린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소매를 쥔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됐어. 내가 직접 확인하마." 강도희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분노를 삼키는 소리였다. 말투는 담담했지만 턱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린은 그 목소리에서 뭔가 다른 걸 느꼈다. 〈어머니는 나를 의심하지 않는다.〉 네 살짜리가 계약 조항을 외워 왔다는 것 자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사실 여부만 확인하려 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가슴을 눌렀다. 안도감과 동시에,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 비슷한 게 목구멍 아래에 걸렸다. 〈믿어준다는 게 이렇게 무거운 거였나.〉 그때 사랑채 쪽에서 서준혁이 걸어왔다. 발소리가 가벼웠다. 여우를 닮았다는 소리를 듣는 남자였다. 눈매가 가늘고 입가에 늘 옅은 웃음이 걸려 있어, 처음 보는 사람은 그를 만만하게 여기다가 낭패를 보곤 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심각하게 해." 서준혁이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손을 멈췄다. 손끝이 허공에서 굳었다. 하린의 손목에 남은 붉은 자국을 본 것이었다. "이거 뭐야." 서준혁의 목소리에서 옅은 웃음기가 사라졌다. 손끝이 하린의 손목 위, 자국 바로 옆에 닿을 듯 말 듯 멈췄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린은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뺐다. "손목이 이런데 아무것도 아니야?" 서준혁이 몸을 낮췄다. 눈높이를 맞추고, 딸의 얼굴을 살폈다. 가늘게 좁아진 눈매 안쪽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하린은 대답을 못 했다. 입술만 달싹거리다 다물었다. 강도희가 대신 입을 열었다. "곽 선생이 우리 애한테 이상한 계약서를 들이밀었대요. 사영계약서라고, 안 하면 위약금 물린다고." 서준혁의 표정이 서서히 변했다. 능청스러운 여우 얼굴 아래, 처음 보는 종류의 냉기가 스쳤다. 입가의 웃음이 완전히 걷히자, 오히려 그 자리가 더 서늘하게 보였다. "위약금." 그가 낮게 되뇌었다. "그 인간이 입회 계약서에 그런 조항을 넣었다고?" 목소리에 웃음기라곤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버지도 눈치채고 있었다.〉 하린은 그제야 알았다. 반년 전 계약서를 서명할 때, 서준혁은 조항을 대충 읽지 않았다. 밤늦도록 등불 아래서 한 줄 한 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던 뒷모습을 하린은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홉 번째 조항의 진짜 함정, 삼속성 미만이면 사영계약서를 강요당한다는 그 연결고리는 서준혁도 놓쳤을 것이다. 계약서란 원래 그렇게 짜인다. 각 조항은 무해해 보여도, 서로 얽히면 올가미가 된다. 한 줄 한 줄 떼어놓고 보면 그저 형식적인 문구일 뿐인데, 이어붙이면 목을 조르는 밧줄이 된다. "입회 계약서 다시 가져와요." 서준혁이 유모를 향해 말했다.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서고에 있는 거, 지금 당장." 유모가 허둥지둥 몸을 돌려 뛰어갔다. 치맛자락이 펄럭이며 사랑채 뒤편으로 사라졌다. 하린은 부모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강도희의 굳은 턱, 서준혁의 서늘해진 눈매. 둘 다 화가 나 있었지만, 그 화의 방향이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믿어 주셨다.〉 안도감이 밀려오는 동시에, 다른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가슴 한켠이 뜨거워졌다가 금세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곽태산은 이걸로 끝낼 사람이 아니다.〉 서고 방향에서 유모의 발소리가 마당을 가로질러 돌아오는 게 들렸다. 가쁜 숨소리와 종종거리는 걸음. 서고에서 계약서를 가져오는 유모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유모가 종이 뭉치를 들고 뛰어왔다. 숨이 턱까지 차 있었다. "여, 여기 있습니다." 서준혁이 종이를 낚아채듯 받아 들었다. 손가락이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사락, 사락. 첫 장, 둘째 장, 셋째 장. 빠르게 넘어가던 손가락이 어느 순간 멈췄다. 서준혁이 종이를 펼치는 순간, 하린은 그의 손가락이 아홉 번째 조항에서 멈추는 걸 봤다. 손가락 끝이 종이 위 글자를 짚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강도희도, 유모도 숨을 죽인 채 서준혁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서준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여우 같은 웃음이 완전히 사라진 얼굴이었다. 관자놀이 근처 핏줄이 미세하게 도드라졌다. "이 새끼." 낮은 욕설이 흘러나왔다. 평소의 능청스러움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냉기만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하린은 그 순간, 아버지가 처음으로 자신 앞에서 이런 표정을 짓는 걸 봤다. 평생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웃음기 걷힌 그 얼굴이, 오히려 더 무섭게 느껴졌다. 바람이 다시 불었다. 처마 끝 풍경이 딸랑, 울렸다. 그 소리마저 이 순간에는 위태롭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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