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과장님, 여기도 야근이라뇨

1화

형광등 불빛이 사무실을 하얗게 채우고 있었다. 시계는 밤 열한 시를 넘기고 있었다.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더미가 그림자를 만들었다. 컴퓨터 본체가 돌아가는 소리만 낮게 이어졌다. 강도현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기획서 수정, 세 번째였다. 이거 이렇게 넘기면 클라이언트한테 또 까일 텐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손은 멈추지 않았다. 이서정이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탁. 강도현씨, 이걸 기획서라고 낸 거예요? 이서정의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강도현은 서류를 다시 훑었다. 빨간 펜으로 그어진 줄이 절반이 넘었다. 죄송합니다. 다시 수정하겠습니다. 강도현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다는 말만 벌써 몇 번째인지 알아요? 이서정의 목소리가 사무실 전체에 울렸다. 박준혁이 옆자리에서 슬쩍 눈치를 봤다. 타이핑 소리를 멈추고 숨죽인 채 이쪽을 살폈다. 강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표정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 정도로 흔들릴 얼굴 근육이면 벌써 사표를 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모니터를 봤다. 김나영은 이미 짐을 챙기고 있었다. 가방 지퍼를 올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지이익.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과장님. 김나영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래요, 내일 봅시다. 이서정이 손을 휘저었다. 강도현은 그 광경을 힐끔 보고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왜 아직도 여기 앉아 있나. 이 여자는 삼 년 만에 과장을 달았다. 나는 사 년째 사원이다. 그런 계산 따위,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강도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혼자 계산기 두드려봤자 결과는 똑같다. 승진은 남의 이야기고, 야근은 내 이야기다. 기획서를 다시 열었다.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커서만 화면 위에서 깜빡거렸다. 깜빡, 깜빡. 그래도 손은 움직였다. 문장을 지우고, 다시 썼다. 몇 줄 쓰고 지우고, 또 몇 줄 쓰고 지우고. 그 반복이 삼십 분쯤 이어졌다. 됐어요, 그 정도면. 이서정이 등 뒤에서 말했다. 버스 시간 늦으면 곤란하니까. 그녀가 시계를 확인했다. 시계는 열한 시 이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강도현은 파일을 저장하고 컴퓨터를 껐다. 모니터가 꺼지는 소리가 짧게 났다. 딱. 강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가 뻐근했다. 목을 좌우로 꺾자 뻐근한 소리가 났다. 우두둑. 워크숍은 내일 아침 일찍 시작한다고 했다. 버스로 이동해서 자면 된다고, 회사는 그렇게 말했다. 밤에 출발해서 새벽에 도착하는 일정. 누가 짰는지 몰라도 사람 갈아먹는 기획이다. 강도현은 캐리어 대신 작은 백팩 하나만 챙겼다. 어차피 하루 자고 돌아올 워크숍인데 짐 쌀 것도 없었다. 사무실 밖으로 나서자 찬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주차장 옆 대형버스 한 대가 서 있었다. 버스 옆면에 회사 이름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기사가 트렁크 문을 열고 짐을 받고 있었다. 기획팀, 그리고 다른 팀들까지 합쳐 서른 명 남짓. 다들 피곤한 얼굴로 하나둘 버스에 올랐다. 강도현은 창가 자리에 앉았다. 백팩을 무릎 위에 올리고 창밖을 봤다. 이서정은 맨 앞자리, 팀장 옆에 앉았다. 팀장이 뭔가 이야기를 건네자 그녀가 웃는 시늉을 했다. 이 와중에도 자리는 서열대로 앉는구나. 강도현은 창밖을 보며 픽 웃었다. 앞자리는 위, 뒷자리는 아래. 버스 안에서도 회사는 회사다. 박준혁이 뒷자리에서 코를 골기 시작했다. 벌써 잠들었나. 김나영이 그 옆에서 팔을 쿡쿡 찔렀다. 일어나요, 아직 출발도 안 했는데. 박준혁이 눈을 반쯤만 뜨고 뭐라 중얼거리다 다시 감았다. 김나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버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쉬이익. 기사가 시동을 걸었다. 엔진 소리가 낮게 깔렸다. 버스가 출발했다.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낮게 이어졌다. 부우웅. 가로등 불빛이 창문을 스치듯 지나갔다. 강도현은 그 불빛을 눈으로 좇다가 이내 시선을 거뒀다. 강도현은 눈을 감았다. 잠깐이라도 자둬야 했다. 내일 아침에 또 어떤 트집을 잡히려나. 기획서, 보고서, 회의 자료, 뭐가 됐든. 이 회사에서 사 년을 버텼는데 남은 게 뭔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 버스는 고속도로에 올라 속도를 냈다. 차창 밖으로 어둠만 계속 이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빠아앙! 강도현은 눈을 떴다. 전조등 불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이거 뭐야. 반사적으로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시야 한가운데로 거대한 헤드라이트가 밀려들었다.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짧게 터졌다. 콰과광!! 굉음과 함께 세상이 뒤집혔다. 버스 안이 통째로 회전하는 것 같았다. 몸이 좌석에서 떠올랐다가 다시 처박혔다. 사방에서 물건 떨어지는 소리, 사람들 신음 소리가 뒤섞였다. 의식이 흐려졌다. 마지막으로 본 건 이서정의 뒤통수였다. 그마저도 곧 하얗게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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