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레벨 0의 전생자

5화

천막 안 공기가 무거워졌다. 향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말린 풀 같기도 하고, 오래된 종이 같기도 한 냄새였다. 촛불 하나가 탁자 위에서 흔들렸다. 그 그림자가 로브 자락 위로 길게 늘어졌다. "대가요?" "응. 세상 모든 답은 값을 치러야 나와." 목소리에 억양이 없었다. 날씨를 말하듯, 시장 가격을 말하듯 담담했다. 로브 안에서 손이 움직였다. 손가락이 길었다. 마디마디에 얇은 흉터 같은 게 보였다. 카드 한 장이 탁자 위로 넘겨졌다. 그림 속에는 나무 하나가 뿌리부터 가지 끝까지 갈래갈래 뻗어 있었다. 각 가지마다 작은 원이 그려져 있었다. 원 안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문양 하나하나가 미묘하게 달랐다. "세프로트." 그 단어가 귀에 꽂혔다. 김민준의 기억 속에 있던, 그 게임의 성장 경로 이름이었다. 밤새 스킬 트리를 짜던 기억, 최적 경로를 찾겠다고 커뮤니티 게시판을 뒤지던 기억이 한꺼번에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그건 화면 속 이야기였다. 마우스로 클릭하던 이야기였다.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진짜 카드였다. 진짜 촛불 아래, 진짜 탁자 위에 놓인 카드였다. "이게... 뭔지 아세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로브 아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눈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데, 시선의 무게가 느껴졌다. "너, 평범한 아이가 아니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한 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른 척할 필요 없어. 이미 알고 왔으니까." 손끝이 차가워졌다. 정체가 들켰다. 첫 만남에서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이 사람은 뭔가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천막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런 느낌이 들었다. 마치 이미 정해진 대본을 읊는 사람처럼, 로브는 놀라지도 않았다. "놀라지 마. 나는 이런 걸 알아보는 게 일이야." "저를... 다른 사람에게 말할 건가요." "내 일은 점을 보는 거야, 소문을 내는 게 아니라." 조금 숨이 놓였다. 그런데 완전히는 아니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사람 마음이란 게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 아닌가. 박정수도 처음엔 친절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눈빛이 달라졌었다. "이 나무, 세프로트는 네 안에 있는 경로야. 지금은 절반도 열려 있지 않아." "절반도요?" "레벨 0인 상태에서, 너는 아직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씨앗이야. 그런데 씨앗에도 방향은 있어. 나무가 어디로 자랄지, 어떤 가지를 먼저 뻗을지." 박정수의 가게에서 보던 골동품 감정과 비슷했다. 값어치를 매기고, 방향을 재는 일. 박정수는 늘 물건을 손에 쥐고 눈을 감았었다. 그러고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이건 값이 나가겠어." 아니면, "이건 그냥 흙덩이야." 지금 이 로브도 똑같은 눈으로 나를 재고 있는 것 같았다. 흙덩이인지, 값이 나가는 물건인지. "저는 이 경로를 완전히 열고 싶어요." 말이 먼저 나갔다. 생각보다 절박했던 것 같았다. 로브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완전히?" "네. 지금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도성에 아는 사람도 없고, 글도 못 읽고, 돈도 얼마 안 남았어요." 박정수에게서 받은 은전은 벌써 여관비와 밥값으로 반 넘게 줄어 있었다. 최강일에게 빚진 이름값도 남아 있었다. 숫자를 세어봤다. 은전 열두 냥. 여관비로 나간 게 다섯 냥. 밥값으로 나간 게 두 냥 반. 남은 건 네 냥 반뿐이었다. 이 도성에서 네 냥 반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 "할 수 있어. 패스 결히." 로브가 손을 들었다. 손끝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나왔다. 그 빛은 하얗지도 노랗지도 않았다. 색이라고 이름 붙이기 어려운 색이었다. "이 스킬로 세프로트 경로를 완전히 열어줄 수 있어. 지금 반쯗 잠긴 문을 다 열어주는 거지." "대가는요." 로브 아래 침묵이 길었다. 촛불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가 다시 잦아들었다. 그 짧은 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모든 문은 열릴 때 소리를 낸다. 그 소리를 누군가는 들어. 대가는 그 소리를 낸 순간에 정해져." "그게 무슨 뜻인지 정확히 말해주세요." "지금은 말해줄 수 없어. 열어보기 전엔 나도 정확히 몰라."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대가를 모른 채 계약을 하라는 뜻이었다. 김민준으로 살던 시절, 이런 계약서는 절대 사인하지 않았다. 약관도 안 읽고 서명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속으로 혀를 찼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약관조차 없는 계약 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어 보였다. 최강일과의 거짓 빚. 박정수의 경고. 미행하던 남자의 시선. 텅 비어가는 자루. 모든 게 이 도성에서 살아남기 위한 무기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반만 열려 있는 상태로는 안 되나요." "반은 반이야. 절반의 힘으로는 절반의 위험만 피할 수 있어. 나머지 절반은 그대로 노출된 채 남아." 나는 손바닥에 땀이 나는 걸 느꼈다. 노출된 채로 남는다는 말이 목을 조여왔다. 노출.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됐다. 최강일의 눈빛, 미행하던 남자의 발소리, 박정수가 마지막에 하던 말. 전부 노출된 부분을 파고들던 것들이었다. "…해주세요." "확실해?" 로브 아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확실합니다." "후회할 수도 있어." "지금 이대로 있으면 더 큰 후회를 할 것 같아요." 로브가 잠시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귀에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좋아." 손끝의 빛이 조금 더 밝아졌다. "손을 내밀어." 나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끝이 그 빛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한 뼘. 반 뼘. 손가락 하나만큼. 거리가 좁아질수록 빛이 손끝에 닿을 듯 말 듯 흔들렸다. 무슨 대가를 치르게 될지, 나는 여전히 몰랐다. 그런데 손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지금까지 온 길이 전부 헛일이 될 것 같았다. 멈추면, 최강일도, 박정수도, 미행하던 남자도, 전부 다시 나를 덮칠 것 같았다. 빛이 내 손끝에 닿기 직전, 로브 아래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참고로 말해두는데." 나는 손을 멈췄다. 손가락 하나 차이였다. "지금까지 이 거래를 받아들인 사람 중에, 절반은 후회했어." 절반. 세프로트 나무의 절반과 같은 숫자였다. 그 우연이 우연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손끝이 빛에 닿았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