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발소리는 셋이었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는 동안에도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창을 그대로 둔 채 다시 뛰었다.
쥐고 있던 무기를 버리는 게 나았다.
무게가 줄어야 속도가 붙는다.
그런 계산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돌아갔다.
숲을 벗어나자 흙길이 나왔다.
달빛이 길을 비췄다.
발밑의 돌부리가 하얗게 빛났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나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숨소리가 등 뒤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착각인지 진짜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사흘을 걸었다.
낮에는 숲에 숨었다.
밤에만 움직였다.
먹은 것은 산딸기 몇 알과 개울물뿐이었다.
첫날 밤, 나는 나무 밑동에 몸을 붙이고 앉아 있었다.
등에 닿는 껍질이 차가웠다.
손끝도 차가웠다.
체온이 자꾸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둘째 날, 산딸기를 발견했다.
손톱 크기만 한 것들이 덤불 사이에 매달려 있었다.
나는 그것을 씹으며 생각했다.
이건 얼마짜리일까.
시장에서 팔면 몇 푼이나 받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이상했다.
배가 고픈데 머릿속은 계산을 하고 있었다.
셋째 날, 개울을 발견했다.
물을 손으로 떠서 마셨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감각이 낯설었다.
이도윤의 몸은 이런 갈증을 알고 있었다.
농사를 짓던 몸이니까.
김민준의 기억은 이런 갈증을 몰랐다.
사무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던 손이 이걸 기억할 리 없었다.
두 개의 기억이 한 몸 안에서 계속 부딪혔다.
[레벨 0]이라는 글자가 계속 떠올랐다.
잠들려고 눈을 감으면 그 숫자가 눈꺼풀 안쪽에 새겨진 것처럼 나타났다.
김민준의 기억이 말했다.
레벨 0은 시작점이다.
제한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투자로 치면 자본금이 0원인 상태.
그건 손실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잃을 게 없으니 두려울 것도 없다.
그 말에 나는 조금 웃었다.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인데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흘을 굶고 쫓기면서 웃는다는 게 말이 되나.
그런데 몸은 그렇게 반응했다.
나흘째 아침, 성벽이 보였다.
한빛 왕국의 도성.
돌로 쌓은 담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높이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성문 앞에는 줄이 길게 서 있었다.
마차와 짐꾼, 상인과 순례자들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광경을 바라봤다.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모여 있는 걸 본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이도윤의 기억 속에서도, 김민준의 기억 속에서도 이 정도 규모는 낯설었다.
나는 그 줄 끝에 섰다.
심장이 뛰었다.
앞사람의 등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줄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열 명, 여덟 명, 다섯 명.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순서가 됐다.
수비대 문장을 단 사내가 나를 내려다봤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다.
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그 손이 검자루에 습관처럼 올라가 있는 게 보였다.
"통행세 서 문. 문서 보여라."
문서.
나는 아무것도 없었다.
김민준의 기억에 문서 양식이 떠올랐지만 그건 이 세계의 문자가 아니었다.
계약서, 신분증, 도장.
전부 다른 세계의 것들이었다.
이도윤의 기억에는 글자를 배운 적이 없었다.
농사만 짓던 아이였다.
글을 배울 시간도, 돈도 없었다.
나는 이 세계의 글을 읽을 수 없었다.
그 사실이 지금 이 순간, 가장 치명적이었다.
투자 용어로 치면 이건 최악의 포지션이었다.
자본도 없고, 정보도 없고, 신용도 없는 상태.
시장에서 이런 조건으로 살아남는 종목은 없다.
"어서 문서를 내놓아라."
사내가 다시 말했다.
짜증이 섞여 있었다.
"저는... 없습니다."
"뭐?"
사내의 눈이 좁아졌다.
뒤에 줄 서 있던 사람들이 나를 쳐다봤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시선이 여러 개로 늘어날수록 숨이 조금씩 가빠졌다.
"통행세도 문서도 없이 도성엘 들어오려는 거냐."
사내의 목소리가 커졌다.
줄 서 있던 상인 하나가 혀를 찼다.
빨리 하라는 뜻이었다.
"돈은 있습니다."
나는 품속에서 낡은 가죽 지갑을 꺼냈다.
손이 떨렸다.
안에는 금화 한 닢이 들어 있었다.
숲을 도망칠 때 챙긴 유일한 재산이었다.
이 금화가 통하지 않으면 여기서 끝이다.
그런 생각이 스쳤다.
사흘을 걸어온 게 전부 헛수고가 된다.
사내가 지갑을 받아 열었다.
금화를 꺼내 이리저리 살폈다.
손가락으로 표면을 문지르기도 했다.
표면이 이상했다.
지금 통용되는 은전과는 모양이 달랐다.
낡고 오래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사내의 눈썹이 좁아졌다.
"이건 통용되는 화폐가 아니다."
숨이 막혔다.
머릿속으로 온갖 계산이 지나갔다.
도망칠까.
싸울까.
아니면 여기서 무릎을 꿇을까.
전부 답이 아니었다.
"이건... 어머니 유품입니다."
입에서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생각하고 뱉은 말이 아니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지갑입니다. 이 금화도 그 안에 있던 겁니다."
사내의 눈빛이 흔들렸다.
검자루에 올라가 있던 손이 슬며시 내려왔다.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셨느냐."
"두 해 전입니다."
거짓말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살아있다.
방금까지 나를 팔려던 그 사람이 어머니였다.
숲속에서 사냥꾼들에게 나를 넘기려 했던 그 손이 아직도 눈앞에 떠올랐다.
그런데 그 말이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다.
죄책감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느껴지지 않았다.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했다.
이도윤이라면 이런 거짓말을 못 했을 거다.
그 애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죽어가던 몸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입은 너무 쉽게 어머니를 죽였다.
"친척을 찾아 도성에 들어가려는 겁니다. 통행세를 낼 돈이 부족합니다."
사내가 한동안 나를 내려다봤다.
그 시선이 길게 느껴졌다.
1초, 2초, 3초.
숫자를 세는 동안 등줄기가 뻣뻣해졌다.
"이름이 뭐냐."
"이도윤입니다."
"나는 최강일이다. 이 문의 수비대장이다."
최강일은 지갑을 다시 내밀었다.
손끝이 지갑에 닿는 순간, 나는 그가 뭔가를 결정했다는 걸 알았다.
"이건 네가 가지고 있어라. 통행세는 내가 대신 내주겠다."
"네?"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차라리 쫓겨나는 게 예상 범위 안이었다.
이건 아니었다.
"단, 도성에서 친척을 찾으면 반드시 돈을 갚아라. 내 이름을 걸고 통과시켜주는 거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사흘 동안 제대로 말을 해본 적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알 수 없었다.
"이름 적어둔다. 이도윤. 잊지 마라."
최강일이 장부에 뭔가를 적었다.
나는 그 글자를 읽을 수 없었다.
무슨 내용인지도 몰랐다.
내 이름이 어떤 방식으로 이 세계의 기록에 남는지, 그것조차 알 수 없다는 게 불안했다.
글자를 모른다는 건 이런 순간마다 이렇게 무력하다는 뜻이었다.
성문이 열렸다.
거대한 나무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밀렸다.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도성의 소음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외침, 마차 바퀴 소리, 향신료 냄새.
좌판에서 파는 고기 굽는 냄새.
누군가의 웃음소리와 누군가의 다툼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이 모든 게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했다.
이도윤의 기억에는 도성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지만, 김민준의 기억은 서울 어느 시장 골목을 떠올리게 했다.
두 세계가 겹쳐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걸으며 뒤를 돌아봤다.
최강일이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줄 서 있던 다른 사람들을 처리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그 시선이 이상하게 오래 느껴졌다.
마치 내 거짓말의 무게를 재는 것처럼.
나는 앞으로 돌아섰다.
등 뒤에서 그 시선이 계속 따라오는 것 같았다.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다만 하나는 분명했다.
나는 방금 빚을 졌다.
돈으로 갚아야 하는 빚, 그리고 이름으로 갚아야 하는 빚.
둘 중 어느 게 더 무거운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도성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친척이라고 말했지만 나에게는 친척이 없었다.
찾아야 할 사람도, 찾아갈 곳도 없었다.
이 거짓말이 언제 들통날지, 그 순간이 오면 최강일은 나를 어떻게 할지.
그 답을 나는 아직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