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레벨 0의 전생자

4화

그 시선을 뒤로하고 나는 가게를 나왔다. 서른 냐가 든 자루를 꽉 쥐었다. 손바닥에 은전의 서늘한 감촉이 그대로 남았다. 골목을 몇 개 지나쳤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돌아보지 않았다. 시장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생선 장수의 외침, 마차 바퀴가 자갈을 긁는 소리,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부딪히는 소리. 그 모든 소리 사이로 내 심장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빵집에서 빵을 두 개 샀다. 하나에 두 냐였다. 남은 은전이 스물여섯 개. 계산이 자연스럽게 됐다. 김민준의 기억이 숫자에는 유용했다. 전생의 습관이란 게 이렇게 남았다. 증권 계좌의 잔고를 확인하듯, 나는 은전 하나하나를 세고 나눴다. 서른에서 넷을 빼면 스물여섯. 틀림없었다. 빵을 씹으며 걸었다. 입 안에서 온기가 퍼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포만감이었다. 빵집 주인이 웃으며 건넨 빵은 겉은 딱딱했지만 속은 부드러웠다. 씹을수록 단맛이 배어 나왔다. 이 세계에 떨어진 뒤로 처음 느낀 사치였다. 그런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박정수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떠돌았다. 좋은 물건을 판 뒤 자랑하다가 뒷골목에서 다치는 사람을 여럿 봤네. 그 목소리가 귓가에 다시 재생됐다. 낮고 무심한 어조였다. 그런데도 그 말 속에는 분명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나는 가게 안에서 딱히 자랑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 남자는 나를 쳐다봤다. 왜였을까. 혹시 금화를 꺼내는 순간을 봤을까. 고대 금화라는 말을 들었을까. 기억을 더듬었다. 가게 안은 어두웠고, 사람은 적었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늘 지켜보고 있을 수 있었다. 시장이란 곳이 그랬다. 눈이 많은 곳일수록 소문도 빨리 퍼졌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봤다. 인파 속에서 낯익은 옷깃이 보였다. 방금 그 가게에서 봤던 옷 색이었다. 짙은 갈색, 소매 끝에 해진 자국. 심장이 조여들었다. 숨을 짧게 삼켰다. 목이 순식간에 말랐다. 착각일 수도 있었다. 시장에는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 그런데도 그 순간 내 몸은 이미 답을 정해버린 것 같았다. 나는 다시 걸었다. 걸음을 조금 빠르게 했다. 골목을 세 번 돌았다. 일부러 방향을 자주 바꿨다. 첫 번째 골목은 좁고 냄새가 심했다. 두 번째 골목은 막다른 길처럼 보였지만 옆으로 빠지는 틈이 있었다. 세 번째 골목에서는 걸음을 아예 멈추고 벽에 등을 붙였다. 숨을 죽였다. 뒤를 다시 살폈다. 옷깃은 보이지 않았다. 안심했다. 그런데 완전히 안심되지 않았다. 몸의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손끝이 여전히 차가웠다. 아무도 없는 골목인데도, 등 뒤에 시선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만약 그 남자가 정말 나를 노리고 있었다면. 금화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나를 계속 뒤쫓는다면. 이도윤이라는 이름이, 전생자라는 사실이 어디선가 새어나가면. 머릿속으로 최악의 경우를 하나씩 그려봤다. 소문이 퍼지고, 사람들이 몰려들고, 누군가 나를 붙잡아 그 금화의 출처를 캐묻는 상황. 대답할 말이 없었다. 설명할 방법도 없었다. 나는 이 세계에서 아무도 아니었다. 부모조차 나를 은화 세 닢에 팔려던 세계였다. 여기서 정체가 밝혀지면 나를 지켜줄 사람은 없었다. 그 사실을 되새길수록 걸음이 무거워졌다. 전생에서도 나는 늘 혼자였다. 이번 생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위태로웠다. 나는 시장 안쪽 깊숙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좌판이 점점 줄어들었다. 대신 천막을 친 작은 가게들이 나타났다. 발밑의 흙이 점점 축축해졌다. 햇빛이 닿지 않는 구역이었다. 사람들의 발소리도 뜸해졌다. 그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 천으로 사방을 두른 좌판. 입구에는 작은 종이 매달려 바람에 흔들렸다. [운명을 읽어드립니다] 나는 그 글자를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좌판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발이 저절로 그쪽으로 움직였다. 마치 예전부터 알고 있던 장소에 다시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천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공간이었다. 촛불 몇 개가 켜져 있었다. 낮은 탁자 위에 카드 뭉치가 놓여 있었다. 공기 중에 이상한 향이 배어 있었다. 말린 풀 냄새 같기도, 태운 나무 냄새 같기도 했다. 촛불 그림자가 천막 안쪽 벽을 따라 흔들렸다. 검은 로브를 두르고 후드를 깊게 눌러쓴 사람이 앉아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목소리로 짐작할 수 있었다. 여자였다. "들어와서 앉아." 낮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나는 맞은편에 앉았다. 바닥은 차가웠다. 탁자 위 촛불이 흔들리며 내 손등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뭘 알고 싶어서 왔지." "저는... 저에게 위험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후드 아래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말을 하는 동안에도 뒷목이 서늘했다. 이 사람이 진짜로 뭔가를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그저 사기꾼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런데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위험은 항상 있어. 구체적으로 말해." 나는 잠시 망설였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전생자라는 말을 그대로 할 수는 없었다. 설명하려면 너무 많은 것을 밝혀야 했다. "제 정체가... 남에게 드러날 위험이요." 카드를 섞는 손이 멈췄다. "정체." 그 단어를 씹듯이 되뇌었다. "흥미로운 단어네." 로브 안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렀다. 사람을 놀리는 웃음인지, 흥미를 느낀 웃음인지 구별이 안 됐다. 카드 몇 장을 탁자에 펼쳤다. 카드에는 낯선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사람 형체 위에 또 다른 형체가 겹쳐진 그림. 색이 반쪽은 밝고 반쪽은 어두웠다. "이건 뒤바뀐 세상의 카드야.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겹쳐 있다는 뜻이지."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전생과 현생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흔한 점술 용어일 뿐일까. "더 정확히 알려주세요." "카드는 방향을 알려줄 뿐, 확답을 주지는 않아." 답답했다. 목이 탔다. 빵을 먹은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입 안이 마르는 느낌이었다. "제발요. 저는 지금 아무것도 모릅니다." 로브 안에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촛불 하나가 타들어가며 파직 소리를 냈다. "오늘은 여기까지." "네?" "돈을 내고 다시 와." 나는 자루에서 은전 몇 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지금 낼게요." 로브가 살짝 흔들렸다. 웃는 것 같았다. "열의는 좋은데, 답이 그렇게 쉽게 나오지 않아." "그럼 뭘 해야 답을 얻을 수 있죠." "내일 다시 와. 별이 다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별의 자리라니. 전생에서 배운 것 중에 그런 개념은 없었다. 그냥 이 세계 특유의 논리인 모양이었다. 따를 수밖에 없었다. 좌판을 나섰다. 등 뒤로 촛불 흔들리는 그림자가 천막에 어른거렸다. 밖으로 나오자 오전 7시를 알리는 파장 종이 울렸다. 상인들이 좌판을 접고 천막을 걷기 시작했다. 나는 시장을 빠져나와 그날 밤 여관방을 하나 잡았다. 좁고 허름했지만 지붕이 있었다. 방 안에는 침대 하나와 작은 탁자뿐이었다. 창문 틈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나는 자루를 품에 안고 잠을 청했다. 쉽게 잠들지 못했다. 다음 날 오전 5시 무렵, 나는 다시 그 천막을 찾았다. 새벽시장은 전날보다 더 붐볐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뒤를 살폈다. 그 갈색 옷깃은 보이지 않았다. 같은 자리, 같은 카드, 같은 목소리. "또 왔네." "답을 듣고 싶습니다."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이번에는 이유조차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저 손을 휘저어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사흘 연달아 매일 오전 5시부터 오전 7시 사이에 그 천막을 찾았다. 매번 다른 이유로 돌려보내졌다. 별의 자리가 안 맞다, 카드가 흐리다, 오늘은 손이 무겁다. 첫째 날은 별자리를 탓했다. 둘째 날은 카드가 흐리다고 했다. 셋째 날은 손이 무겁다고 했다. 이유가 매번 다르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나는 그것을 의심하면서도 다른 방법이 없어 계속 찾아갔다. 이 여자가 정말 뭔가를 아는 사람일지, 아니면 그저 시간을 끌며 돈을 받아내려는 사람일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발이 계속 그쪽으로 향했다. 불안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시장 안에서는 매일 다른 얼굴들을 마주쳤다. 그중 누구도 그 갈색 옷깃의 남자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매번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었다. 습관이 되어버렸다. 나흘째 되는 날 오전 5시 직후, 나는 다시 천막 앞에 섰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지친 기색이 섞여 있었다. "…또 너야." "제발요. 이번엔 진짜 답을 듣고 싶습니다." 나는 문턱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사흘 동안 쌓인 조바심이 목소리에 섞여 나왔다. 로브 아래로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매번 찾아오면 나도 곤란해. 세상에 확답이 있는 건 몇 안 돼. 그리고 그 몇 안 되는 것을 원하면, 대가가 필요해." 대가라는 말에 나는 숨을 삼켰다. 로브 안의 그림자가 나를 향해 조금 더 기울었다. 촛불이 흔들리며 그 손끝을 비췄다. 손가락은 가늘고 창백했다. "대가가... 뭡니까."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로브 안에서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저 카드 한 장이 탁자 위에 소리 없이 놓였다. 카드 뒷면에는 검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촛불 빛 아래에서 그 문양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흔들렸다. 여자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심장 소리를 들었다. 내 것인지, 아니면 이 좁은 천막 자체가 내는 소리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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