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다음 날 아침, 성의 식당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했다.
식당은 예상보다 넓었다. 돌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고, 천장에는 샹들리에 대신 마법석이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과 은은한 육수 냄새가 뒤섞여서,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제까지 목숨 걸고 마수랑 싸운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덜컹.
주방 문이 벌컥 열리고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들어왔다. 30대 후반쯤, 콧수염을 기른 모습이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손목에는 화상 자국이 몇 개 보였는데, 그게 오히려 실력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손님, 오늘 메뉴는 마수 스튜입니다."
"손님?"
【셰프 하도경입니다. 각하를 '손님' 혹은 '아저씨'라 부르는 계약 조건이 있습니다.】
"…내가 그런 계약을 왜 맺었지?"
【무례한 언행을 지적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고용하셨습니다. 뛰어난 실력 때문입니다.】
아니, 실력이 뛰어나면 존댓말 정도는 지켜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이건 완전히 갑을 관계가 뒤집힌 계약이었다.
하도경이 스튜를 탁 내려놓았다. 그릇에서 올라오는 김이 얼굴을 훅 덮쳤다. 향신료 냄새, 살짝 탄 마늘 냄새, 그리고 밑에서 은근하게 올라오는 고기 육수 냄새. 배가 저절로 꼬르륵거렸다.
"아저씨, 어제 A등급 마수 잡았다면서요? 그 고기 좀 나눠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건 뭉치가 다 먹었어요."
"아깐 인간이 다 안 먹었으면 아깝지."
"뭉치도 인간 아니에요. 아니, 인간이 아니라 그····· 아니 그냥 됐어요."
하도경은 뭐가 그렇게 아쉬운지 혀를 찼다. 손에 든 국자로 스튜 그릇을 툭툭 두드리기까지 했다. 아니 어제 목숨이 왔다 갔다 했는데 고기 걱정이라니. 이 사람은 셰프가 아니라 정육점 사장님이 되어야 했던 게 아닐까.
"다음엔 뒷다리 살이라도 남겨주세요. 마수 뒷다리는 육질이 아주 쫄깃하다는 소문이 있어서요."
"…소문 어디서 들었어요?"
"손님 소문이죠. 손님이 A등급 마수 잡았다는 소문."
말이 안 통했다. 나는 그냥 스튜를 한 입 떠먹었다. 뜨거운데 은근하게 매콤하고, 씹을수록 고기 육즙이 퍼지는 게 꽤 맛있었다. 실력은 진짜인 모양이다.
그때 식당 문이 다시 열리고 다른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큰 키에 갑옷을 걸친 남자, 나이가 30대 중반쯤 보이는데 눈빛에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갑옷 사이로 오래된 흉터가 언뜻 보였는데, 한두 번 죽을 뻔한 흔적처럼 보였다.
"백작님,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기사 강도현입니다. 각하의 개인 호위를 겸하고 있습니다.】
강도현은 자리에 앉으면서도 시선을 문 쪽에 고정했다. 언제든 튀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특유의 자세였다. 나는 그게 조금 부담스러웠다.
뒤이어 은발에 앳된 얼굴을 한 소녀가 들어왔다. 실루엣이 가늘고 눈매가 곱상해서 한눈에 미소년인지 미소녀인지 구별이 안 됐다. 걸음걸이는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는데, 그게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암살자 소하늬입니다. 남성이지만 여성으로 양육되어 현재 여성의 이름과 외양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사연은 좀 미리 말해줘."
소하늬가 나를 보고 살짝 고개만 까딱했다. 말수가 없어 보였다. 자리에 앉아서도 다른 사람들과 눈을 잘 안 마주치고, 스튜만 조용히 떠먹었다. 존재감이 희미한데 그게 오히려 더 프로처럼 느껴졌다.
그 뒤로 조그만 여자아이 하나가 뛰어들었다. 열 살쯤 되었을까, 눈이 유난히 크고 밝았다. 머리를 양갈래로 묶었는데 한쪽이 살짝 풀려 있었다.
"오빠!"
갑자기 안겨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굳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고, 팔이 어디에 둘지 몰라서 허공에서 잠깐 헤맸다.
【고아 소은비입니다. 오빠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어, 그래. 오빠 여기 있어."
어색하게 등을 두드려줬다. 소은비가 해맑게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순수해서, 어제 마수랑 피 튀기며 싸운 사람이 지금 이 애 앞에서 오빠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게 실감이 안 났다.
다들 아침 식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데, 나는 아직 누가 누군지 계속 커맨드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이거 진짜 신입사원 명찰 보면서 이름 외우는 기분이었다. 강도현, 소하늬, 소은비, 하도경. 이름만 들으면 헷갈리지 않을 것 같은데, 실제로 얼굴이랑 매칭하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강도현이 스튜를 뜨며 조심스레 말했다.
"백작님, 어제 조사관이 왔다 갔다고 들었습니다. 다시 오면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괜찮아요, 이미 해결됐어요."
"단독 행동은 위험합니다. 부디 저를 데리고 다니십시오."
목소리에 진심이 담겨 있어서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이 정도면 경호원이 아니라 스토커 아닌가 싶을 정도였는데, 표정을 보니 진짜로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또 저러시네요.]
윤슬아가 문가에 서서 작게 속삭였다. 강도현의 보호욕이 유난히 크다는 뉘앙스였다. 목소리에서 살짝 웃음기가 느껴지는 걸 보니, 이게 하루 이틀 있었던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강도현 님이 원래 저러세요?"
[백작님께서 위험에 노출되는 상황을 극도로 경계하십니다. 이전에도 몇 번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전이라니, 나 말고 다른 사람 얘기하는 거죠?"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뭔가 있는 눈치였는데, 캐물을 시간이 없었다.
그때 성문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말발굽 소리가 아니라 이번엔 마차 여러 대가 동시에 들어오는 소리였다. 바퀴가 자갈을 짓누르는 소리, 마부들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 외침. 뭔가 큰 게 오고 있다는 느낌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귀족원의 공식 문서가 도착했습니다.】
하필 밥 먹을 때.
황태호가 문서를 받아 와서 펼쳤다. 종이 뭉치가 두꺼워서 손에 들기도 무거워 보였는데,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스튜 맛이 갑자기 뚝 떨어졌다.
"백작님. 귀족원에서 정식으로 시험을 요청했습니다."
"무슨 시험?"
"토벌 실력을 공식적으로 검증하겠다는 것입니다. 어제 목격된 A등급 마수 처치가 진짜인지 확인하겠다는 명목입니다만···"
황태호가 잠시 말을 끊었다. 서류를 넘기는 손끝이 살짝 떨렸다.
"거절할 수 없는 성격의 요청입니다. 강제 소환입니다."
스튜가 넘어가다 목에 걸렸다. 켁, 하고 숨이 막히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거절하면?"
"백작위 박탈입니다."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백작위가 뭔지도 잘 모르는데, 그걸 뺏긴다는 말이 이렇게 무섭게 들릴 줄은 몰랐다.
【참고로 이는 국가가 각하의 능력을 직접 확인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어제의 목격 보고가 예상보다 빠르게 퍼진 결과입니다.】
안 그래도 숨기려던 힘이었는데, 벌써 국가 차원에서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숨기는 것도 아니고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이건 그냥 반쯤 들켜서 반쯤 애매하게 살고 있는 상태였다.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귀족의 삶은 조용하기 어렵습니다."
황태호가 담담하게 말했는데, 그 말이 왜 이렇게 뼈에 박히는지.
소은비가 내 팔을 붙잡고 물었다.
"오빠, 시험 보러 가?"
"그런 것 같아."
"저도 갈래요!"
"아니, 이건 위험한 거라서···"
"저 안 위험해요! 저 숨는 거 잘해요!"
숨는 거 잘한다는 게 왜 자랑처럼 들리는지 모르겠는데, 열 살짜리가 저렇게 자신 있게 말하니 말릴 타이밍을 놓쳤다.
[가시는 편이 좋습니다. 은비의 존재가 각하께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윤슬아가 은근한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는데, 왜 그런 건지는 그때는 몰랐다. 목소리에 뭔가 확신이 있는 걸 보니, 은비한테 숨겨진 뭔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도움이라니, 은비가 뭘 할 수 있는데요?"
[지금 말씀드리면 재미없습니다.]
이 인간, 아니 이 존재는 은근히 뜸을 들이는 취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황태호가 서류의 마지막 항목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시험 날짜는 사흘 후입니다. 장소는 왕도 근교의 시험장입니다."
사흘. 짜장면 세 끼 먹을 시간도 안 됐는데, 그새 국가 시험을 치러야 하다니. 시험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갑자기 학창시절 성적표가 떠오르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시험장 규모는 얼마나 돼요? 참관인은 몇 명이나 오죠?"
"귀족원 소속 심사관 세 명, 그리고 각 가문의 대표들이 참관할 예정입니다. 대략 백 명 이상 모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백 명. 그 앞에서 마수랑 싸워야 한다니, 이건 시험이 아니라 공연이었다.
"…코인은 몇 개 써도 돼요?"
【판단은 각하께 맡깁니다. 다만 남은 잔량은 열 개뿐임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열 개. 사흘 안에 시험까지 치러야 하는데 코인은 겨우 열 개. 뭔가 준비를 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숫자처럼 느껴졌다.
나는 스튜 그릇을 내려놓았다. 입맛이 완전히 사라졌다.
식당 안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강도현은 서류를 다시 훑어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고, 소하늬는 여전히 조용히 스튜만 먹고 있었다. 소은비는 벌써 시험장에 갈 생각에 신났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렸고, 하도경은 그새 또 뭉치 고기 얘기를 꺼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사흘 뒤에 백 명의 눈앞에서 실력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식탁 위 스튜에서 올라오던 김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