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냄새였다.
젖은 흙냄새, 그리고 피 냄새.
분명 방금까지 나는 서울 한복판, 그것도 회식 끝나고 택시를 잡으려던 골목에 있었는데.
【각성을 확인합니다.】
귓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사람 목소리는 아니었다. 라디오 안내 방송처럼 무미건조한 그것이 머릿속에 그대로 박혀 들어왔다.
[각하, 정신이 드셨습니까.]
···각하?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몸이 이상했다. 손이 낯설었다. 손가락이 길쭉하고 손톱 끝이 유난히 깔끔했다. 회사원 8년 차 김도윤의 손이 아니었다.
손등에 힘줄이 서 있는 모양도 달랐고, 손목을 접었을 때 걸리는 감촉조차 낯설었다. 나는 내 손을 눈앞에 바짝 갖다 대고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펴봤다. 남의 손을 빌려 낀 장갑 같았다.
"뭐야, 이거."
목소리도 달랐다. 낮고 부드러운, 방송국 성우 같은 음색이었다. 내가 낸 소리가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목을 한번 가다듬어봤는데도 그 낮은 울림은 그대로였다. 성대까지 통째로 바뀐 모양이었다.
【현재 각하께서는 '이헌 백작'의 신체를 사용 중입니다.】
"이헌 백작?"
【정확히는 '이헌 백작'입니다.】
"방금 나도 그렇게 말했잖아!"
혼자 소리 지르고 나니 등줄기가 서늘했다. 뭐야, 이거 대화가 안 되잖아. 앵무새랑 얘기하는 기분이었다.
주변을 둘러봤다. 숲이었다. 나무는 나무인데 잎이 청록색이 아니라 진한 남색이었다. 줄기는 사람 허벅지만큼이나 굵었고, 나무껍질에는 뭔가 문양 같은 게 은은하게 새겨져 있었다. 하늘은 두 개의 달이 걸려 있었다. 진짜였다. 조작도 CG도 아닌, 손을 뻗으면 잡힐 듯한 두 개의 달. 하나는 노란빛이었고 하나는 옅은 푸른빛이었다. 그 두 개가 겹쳐서 만드는 그림자가 두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망했다.
분명 나는 죽었어야 했다. 트럭이 인도로 튀어 들어오는 순간 몸을 던져 옆 사람을 밀어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뒤집혔던 것도. 그다음은 암전. 그리고 여기.
짜장면이 먹고 싶었다. 이 상황에 그딴 게 왜 떠오르는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짜장면이 먹고 싶었다. 곱빼기로, 단무지 두 접시쯤. 위장이 텅 빈 것처럼 쓰라렸다.
【각하, 지금은 식사 걱정을 하실 상황이 아닙니다.】
"내 생각을 어떻게 알아?"
【저는 각하의 사고 보조 인터페이스, '커맨드'입니다. 내면의 발화까지 일부 감지합니다.】
감청이잖아 이거. 인권침해 아니야? 아니, 여기 인권이라는 개념이 있긴 한 건가.
따지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콰앙!
숲 저편에서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발밑으로 진동이 두 번, 세 번 이어졌다. 뭔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3등급 마수 무리가 접근 중입니다. 거리 약 200미터.】
"3등급이 뭔데! 위험한 거야, 아닌 거야!"
【인간 기준으로는 성인 셋이 힘을 합쳐야 겨우 상대할 만한 수준입니다.】
"난 성인 한 명이잖아!"
대답은 없었다. 그 침묵이 제일 무서웠다. 이럴 때 침묵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인터페이스라는 게. 최소한 “도망치십시오” 정도는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숲 사이로 뭔가가 튀어나왔다. 회색 털에 덮인 멧돼지 같은 몸통, 그런데 머리가 두 개였다. 눈이 네 개나 나를 노려보는 걸 보고 있자니 위장이 먼저 반응했다. 신물이 올라오는 느낌. 입안에 침이 바짝 말랐다가 갑자기 고이는 게, 몸이 이 상황을 벌써 알아챈 모양이었다.
크아아아악!
그것이 포효했다. 고막이 찢어질 것 같았다. 나뭇잎이 통째로 진동했다.
"살려줘!"
나도 모르게 손을 앞으로 뻗었다. 뭐라도 잡히면 던질 생각이었는데, 손끝에서 빛이 터졌다. 손바닥이 뜨거워졌다가 순식간에 차가워지는, 이상한 감각이었다.
【코인 1매가 자동으로 소모됩니다. 소환 스킬 발동.】
"코인? 무슨 코인? 나 지갑도 안 챙겼는데!"
펑!
하얀 연기가 걷히자 그 자리에 산더미 같은 실루엣이 서 있었다. 나만큼이나 놀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팔이 네 개고 머리가 두 개인 거대한 원숭이였다. 몸에서 풍기는 열기가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였고, 털 사이로 뭔가 타는 듯한 냄새까지 났다.
"으아악, 또 두 개짜리!"
【해당 개체는 위협도 A등급, 대마원숭이입니다. 각하의 첫 계약 소환수입니다.】
"A등급이라고? 방금 그 멧돼지는 3등급이었잖아, 그럼 이건 더 센 거야?"
【정확합니다. 등급 체계는 F부터 시작해 E, D, C, B, A, S 순으로 올라갑니다. 3등급은 편의상 병사들이 쓰는 약식 표기이며, 정식 등급으로 환산하면 D에 해당합니다.】
"아니 그럼 처음부터 D라고 말하지, 왜 헷갈리게 3등급이라고 해!"
【병사들의 관습입니다.】
관습 탓을 하면 다야. 지금 나 죽다 살았다고.
그 순간 원숭이가 나를 보고 히죽 웃었다. 왼쪽 머리와 오른쪽 머리가 동시에 웃으니 훨씬 무서웠다. 이빨 크기가 내 팔뚝만 했다.
"우리 주인님이다!"
말을 한다.
말을 하는 원숭이가, 나를 위해 두 개짜리 멧돼지에게 달려들었다. 땅을 박차는 순간 흙덩이가 사방으로 튀었고, 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팔로 가렸다.
콰직!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원숭이가 멧돼지의 머리 하나를 그냥 뜯어냈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뜯겨나간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남은 머리가 지르는 비명, 그리고 사방으로 튀는 붉은 것들. 속이 울렁거렸지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뭉치라고 부를게."
왜 그 이름이 먼저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몸집이 뭉쳐 있어서 그런가 싶었다. 아니면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머리가 아무 이름이나 뱉어낸 건지도.
원숭이가 좋아서 팔짱을 꼈다. 팔이 네 개니까 두 번 낀 것 같았다. 위쪽 팔로 한 번, 아래쪽 팔로 한 번, 그것도 동시에.
"뭉치, 좋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근처 나무 몇 그루가 파르르 떨렸다.
마수 무리는 뭉치 혼자서 3분도 안 돼서 정리했다. 남은 놈들이 도망치려 하자 뭉치는 두 개의 몸통으로 좌우를 동시에 틀어막았고, 그다음부터는 그냥 도살장이었다. 나는 차마 그 광경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반쯤 눈을 감은 채 손가락 사이로만 확인했다.
남은 것은 흩어진 살점과 피 웅덩이, 그리고 멀리서 이 광경을 전부 지켜본 병사 몇 명의 창백한 얼굴이었다. 갑옷을 걸친 남자 셋이 나무 뒤에 반쯤 숨은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창끝이 덜덜 떨리는 게 여기서도 보였다.
【목격자 발생. 각하의 소환 능력이 노출되었습니다.】
"…아니, 그건 지금 말해주면 어쩌라고. 진작 말해줬어야지."
【알림 순서는 사건 발생 이후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럼 그 알림 순서 좀 바꿔! 나 지금 심장 떨어질 뻔했잖아!"
【건의사항으로 접수하겠습니다.】
건의사항으로 접수한다는 그 말투가 제일 얄미웠다. 무슨 민원센터 상담원 같은 어투로.
병사 중 하나가 창을 떨어뜨렸다. 다른 하나는 뒤로 넘어졌다. 세 번째는 아예 그 자리에 주저앉아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기도문 같은 거였다.
"이, 이헌 백작님이 A등급 마수를…"
"저, 저게 어떻게 사람이야, 저건 재앙이지…"
"백작가에 저런 힘이 있었다고? 왜 지금까지 아무도 몰랐지?"
수군거림이 점점 커졌다. 나는 뭐라고 해명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정작 내 입에서 나오는 건 낮고 낯선 남자 목소리뿐이었다. 백작이라는 이름값에 어울리는 그 목소리가, 지금 이 순간엔 오히려 더 무섭게 들릴 것 같았다.
소문이 빨리 도는 세상이라는 것을, 나는 아직 몰랐다.
병사 하나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다가 결국 몸을 돌려 숲 밖으로 뛰기 시작했다. 나머지 둘도 그 뒤를 따라 허둥지둥 사라졌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걸 들으며, 나는 그제야 온몸의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무릎이 후들거렸다. 이헌 백작의 몸이라는 게, 겉보기엔 멀쩡해도 속은 나만큼이나 놀란 모양이었다.
"…이제 나 어떻게 되는 거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는데, 대답이 돌아왔다.
【각하, 지금부터 상황을 브리핑해드리겠습니다.】
브리핑이라니. 그 사무적인 말투에 헛웃음이 나왔다. 방금 마수를 갈아엎은 원숭이가 내 옆에서 여전히 팔짱을 낀 채 히죽거리고 있는 이 상황에, 브리핑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안 어울릴 수가 있나.
그러나 뭉치의 웃음도, 커맨드의 무미건조한 목소리도, 방금 도망친 병사들의 새하얗게 질린 얼굴도, 어느 것 하나 나를 안심시켜주지 못했다.
이 세계에서 나는, 이제 막 첫걸음을 뗀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