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결계가 갈라진 건 순식간이었다.
쩌적.
유리처럼 갈라지는 소리가 밤공기를 찢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등줄기의 털이 곤두섰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감각이 먼저 왔다. 이론이나 정보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안쪽에서 그것이 걸어 나왔다.
형체는 인간과 비슷했지만, 크기가 달랐다. 우리 진영의 가장 큰 천막보다 컸다. 두 발로 서 있는 것도, 팔이 두 개인 것도 인간과 닮았다. 하지만 그 비슷함이 오히려 더 소름을 돋게 했다. 인간을 흉내 낸 무언가라는 인상이 강했다.
피부는 검은색과 붉은색이 뒤섞여 있었고, 표면이 계속 꿈틀거렸다. 마치 그 안에 수천 개의 무언가가 갇혀서 서로 자리를 다투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면 그 꿈틀거림 속에서 얼굴 같은 형상이 잠깐씩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었다.
"저게... 마왕인가."
박현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검을 쥔 손이 눈에 보일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나도 대답할 수 없었다. 마왕에 대한 정보는 있었다. 생김새, 대략적인 전투력, 알려진 스킬 목록까지. 하지만 저건 그 정보와 완전히 달랐다. 정보에 없는 존재라는 게, 지금 이 순간 가장 무서운 사실이었다.
[대상: 미지의 존재]
[측정 불가]
마법사가 든 계측기가 미친 듯이 진동하다 멈췄다. 고장 난 게 아니었다. 측정 자체가 불가능했다. 계측기를 쥔 마법사의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다시 해봐."
내가 말했다. 마법사가 계측기를 다시 흔들었다. 결과는 똑같았다.
[측정 불가]
두 번째도, 세 번째도 같은 문구였다. 그렇구나. 이건 기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이 천천히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이 없는데도 시선이 느껴졌다.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시선이라는 걸 이렇게 물리적으로 느껴본 적이 없었다.
"전군 대비!"
내 명령에 병사들이 진형을 갖췄다. 하지만 다들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방패를 든 병사들의 방패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딸그락, 딸그락. 손이 떨려서 나는 소리였다.
나도 떨리고 있었으니, 그들을 비난할 수 없었다.
그것이 한 걸음 내디뎠다.
쿠웅.
땅이 흔들렸다. 진짜로 흔들렸다. 발밑의 흙이 파도처럼 일어났다가 가라앉았다. 옆에 있던 병사 하나가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두 번째 걸음에서, 앞쪽에 서 있던 기사 부대 절반이 그냥 사라졌다.
비명도, 피도 없었다. 그냥 없어졌다.
방금까지 창을 들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그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흙에 발자국조차 지워지지 않았는데, 사람만 없었다.
"뭐야, 방금 뭐였어."
최은영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녀는 활을 든 채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도 몰랐다. 공격의 형태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스킬 발동을 알리는 그 흔한 알림창조차 뜨지 않았다. 무언가가 벌어졌는데, 그 무언가가 뭔지 아무도 설명할 수 없었다.
"활 쏴!"
최은영이 화살을 날렸다. 정확히 그것의 몸통에 맞았다.
퍽.
하지만 화살은 그대로 흡수됐다. 상처는 나지 않았다. 화살촉이 살에 닿는 순간, 마치 물에 떨어진 것처럼 그 표면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안 통해."
그녀의 목소리에 절망이 섞였다. 그녀는 그래도 두 번째 화살을 메겼다. 이번엔 머리 쪼갤 셈으로 그것의 얼굴로 보이는 부위를 향해 쐈다. 결과는 같았다.
마법사들이 일제히 공격 마법을 퍼부었다. 화염, 냉기, 뇌전.
화르륵. 콰지직. 파직.
모든 마법이 그것의 몸에 닿는 순간 흡수됐다.
[스킬 발동: 화염 폭격]
[대상에게 효과 없음]
[스킬 발동: 절대 영도]
[대상에게 효과 없음]
[스킬 발동: 뇌전 창]
[대상에게 효과 없음]
효과 없음. 그 짧은 문구가 모든 걸 말해줬다. 우리가 가진 모든 수단이 저것 앞에서 무의미하다는 것.
"도윤, 이거 어떻게 싸워."
박현우가 절박하게 물었다. 그의 눈이 흔들렸다. 늘 앞장서서 싸우던 그였는데, 지금은 그 자신조차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나도 모른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지휘관이 그 말을 하면 전군이 무너진다. 여기서 내가 무너지면 뒤에 있는 수백 명이 그대로 흩어질 것이다.
"물리 공격 위주로 간다. 마법은 아껴."
근거 없는 지시였다. 물리 공격이 통할지도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뭐라도 말해야 했다. 침묵보다는 틀린 명령이 나았다.
박현우가 앞으로 뛰어나갔다. 검을 크게 휘둘렀다.
서걱.
소리는 났지만, 그것의 몸에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검이 살에 닿았다가 그대로 미끄러진 느낌이었다. 마치 벤 게 아니라 그저 스쳐 지나간 것처럼.
"이게 무슨..."
박현우가 검을 다시 세우려는 순간, 그것이 손을 들었다. 손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형태는 아니었지만, 그게 가장 비슷한 표현이었다.
박현우가 그 손에 맞고 뒤로 날아갔다. 십여 미터를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퍽. 쿠당탕.
"현우!"
최은영이 달려갔다. 그는 숨을 쉬고 있었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갑옷의 가슴 부위가 움푹 들어가 있었다. 한 번 더 맞았다면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다시 걸음을 옮겼고, 다시 병사들이 사라졌다.
세 번째 걸음.
이번엔 근처에 있던 후방 부대 전체가 사라졌다.
숫자로 백 명 가까이 되는 인원이었다.
소리도, 흔적도 없이.
바로 몇 초 전까지 대열을 맞춰 서 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 자리에 빈 공간만 남기고 없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지만, 부를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함께 밥을 먹던 사람들이었는데.
나는 처음으로 이 전투가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걸 인정했다.
그렇구나.
이건 마왕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 밖의 존재였다.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라, 살아서 도망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이라는 걸 깨달았다. 인정하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린 것도 우스웠다. 세 번의 걸음, 그리고 수백 명의 실종. 그게 필요한 증거였나.
"전군 후퇴!"
내 명령이 늦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명령을 내리는 목소리조차 갈라져 나왔다. 병사들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지만, 대열은 이미 무너진 뒤였다. 각자 살겠다고 흩어지는 발걸음들.
그때, 그것의 시선이 정확히 한 곳으로 향했다.
윤서아.
그녀는 후방에서 지팡이를 쥐고 서 있었다. 얼굴에 핏기가 없었다. 다른 병사들처럼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있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것이 그녀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웅.
또 한 걸음. 땅이 다시 흔들렸다.
나는 그 순간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후퇴 명령도, 전황도, 살아남은 병사들의 숫자도 전부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오직 하나의 장면만 남았다. 저것이 그녀에게 닿기 전에 내가 먼저 도달해야 한다는 것.
"서아한테서 떨어져!"
검을 뽑아 들고 뛰었다.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다른 선택이 없었다.
발이 땅을 박차는 감각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것의 걸음은 나보다 훨씬 크고, 훨씬 빨랐다.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벌어지고 있었다.
서아, 조금만 버텨.
속으로 되뇌었지만, 그 말이 그녀에게 닿을 리 없었다. 그것의 손이, 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형체 없는 무언가가 그녀를 향해 뻗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