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샘가에 짓는 낙원

5화

쿵. 쿵. 쿵.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태오는 오두막 뒤에 몸을 낮추고 숨을 죽였다. 다행히 그 짐승은 다른 방향으로 걸어간 모양이었다. “가슴 철렁했네.” 태오는 벽에 기댔다. 등이 서늘했다. 전투 없는 클래스로 뽑혀놓고 이런 위기를 겪을 줄은 몰랐다. 심장이 아직도 두근거렸다. 방금 그 걸음 소리, 사람 발소리가 아니었다. 땅이 울릴 정도로 무거운 무언가가 근처를 지나갔다. [여신 소하의 메시지] [근처 동굴에 오래된 봉인이 감지됩니다] 태오는 미간을 좁혔다. “봉인이요? 아까 그 짐승 얘기하는 거예요?” 대답은 없었다. 소하는 늘 그렇듯 결정적인 순간엔 말이 짧아졌다. “말을 하다 말면 어떡해요.” 태오가 중얼거렸다. 역시 대답은 없었다. 호기심이 이성보다 먼저 발을 움직였다. 숲을 따라 조금 걸어가자 정말로 동굴 입구가 보였다. 입구 주변 돌들이 이상하게 반질반질했다. 오래전부터 사람이 아니라, 뭔가 다른 존재가 오간 흔적 같았다. 돌 틈 사이로 희미한 냉기가 새어나왔다. “들어가지 말라고 안 하는 거 보니, 들어가도 되는 건가.” 태오는 혼자 되물었다. 대답이 없다는 게 오히려 불길했다. [정원 스킬: 지형 감지] [동굴 내부에 강한 생명 반응 존재] 태오는 침을 삼켰다. 생명 반응이 강하다는 건, 뭔가 살아있다는 뜻이다. 들어가야 되나. 죽어서도 위험한 데는 못 피하는구나. 실없는 생각이 스쳤다. 들어가기 전에 잠깐 망설였다. 전투 클래스 하나 없이 이런 데를 들어가는 게 맞나 싶었다. 그러나 발은 이미 입구를 넘어섰다. 동굴 안은 어두웠다. [정원] 스킬로 만든 작은 빛의 씨앗을 손바닥에 띄우자 주변이 은은하게 밝아졌다. 벽면에는 오래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물결무늬였다. 소하의 힘과 관련된 것 같았다. 손으로 벽을 슬쩍 쓸어봤다. 차가웠다. 그냥 돌이 아니라, 뭔가 힘이 스며든 느낌이었다. 안쪽으로 갈수록 공기가 차가워졌다. 촤아아, 물이 흐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발소리가 동굴 벽에 부딪혀 이상하게 크게 울렸다. 그리고 그 안쪽, 커다란 철쇄에 감긴 무언가가 있었다. [미확인 개체 발견] [상태: 유체(遊體), 심각한 손상] 태오는 눈을 크게 떴다. 철쇄에 묶인 건, 이리처럼 생긴 거대한 짐승이었다. 몸의 절반이 반투명했다. 실체가 온전하지 않은, 안개 같은 형태였다. 크르릉. 짐승이 낮게 울었다. 눈빛에 적의는 없었다. 오히려 지쳐 있는 느낌이었다. “이게 그 봉인이라는 건가.” 태오는 조심스레 다가갔다. 발밑에서 자갈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짐승이 그 소리에 반응해 귀를 움찔거렸다. [분석 결과: 신수(神獸) 설랑] [등급: 재난급] [현재 상태: 힘의 대부분 상실, 봉인 철쇄로 인해 약화] 태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신수라니. 그것도 재난급. “이런 게 신을 죽일 수 있다고?”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지금 눈앞의 이건 그냥 반쯤 죽어가는 짐승이었다. 철쇄에 감긴 몸이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저게 재난급이라니, 등급 표기가 잘못된 거 아닌가 싶었다. [여신 소하의 메시지] [이 존재를 풀어주면, 세계의 균형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태오는 잠깐 멈춰섰다. 소하가 말했던 그 존재가 바로 이거였다. 확률이 높다더니, 딱 맞았다. “균형이 흔들린다는 게, 정확히 뭘 말하는 건데요.” 태오가 물었다. 역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필요할 때만 입을 여는 여신이었다. 풀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짐승은 그 자리에서 힘없이 눈을 감았다 떴다. 반투명한 몸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죽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가만히 지켜보던 태오의 눈이 짐승의 목덜미 쪽 철쇄에 멈췄다. 쇄가 파고든 자리마다 살이 벗겨진 듯 흐릿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저러다 진짜 죽는 거 아닌가. “일단 살리는 게 먼저지.” 태오는 결정을 내렸다. 죽게 내버려두는 것보다는, 살려놓고 나중에 생각하는 게 나았다. 재난급이든 뭐든, 지금은 그냥 다 죽어가는 짐승 한 마리였다. [스킬: 회복] [사용 가능] 크래프터 클래스에 회복 스킬이 있을 줄은 몰랐다. 정원 스킬의 파생인지, 별도 스킬인지 확인할 시간도 없었다. 태오는 손을 뻗어 짐승의 몸에 대었다. 손끝이 짐승의 몸에 닿는 순간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안개를 만지는 것 같으면서도, 분명한 무게감이 있었다. 번쩍. 빛이 손끝에서 흘러나갔다. 짐승의 반투명한 몸이 조금씩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회복 진행 중] [대상의 유체 상태가 안정화되고 있습니다] 짐승이 눈을 크게 떴다. 철쇄가 부드럽게 흔들리며 살짝 느슨해졌다. 크르릉. 짐승의 울음소리가 조금 전과 달랐다. 적의가 아니라, 경계심 같았다. 하지만 공격은 하지 않았다. 꼬리 끝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것도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회복 완료] [대상 개체명: 설랑] [상태: 유체 안정, 완전 회복까지 추가 시간 필요] 태오는 손을 뗐다. 짐승, 아니 설랑이라 불리는 신수가 태오를 가만히 바라봤다. 눈동자가 맑아져 있었다. 아까와는 확실히 다른 눈빛이었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뭐라고 해야 되나.” 태오는 어색하게 웃었다. 대답 대신 설랑이 낮게 그르렁거렸다. 적대감은 확실히 사라진 소리였다. “이름은 있고?” 태오가 물었다.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말하는 짐승은 아니었나 보다. [여신 소하의 메시지] [뜻밖의 존재를 얻었습니다. 정원 건설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태오는 씁쓸하게 웃었다. 도움이 될 거란 말이, 어쩐지 위험도 함께 온다는 뜻처럼 들렸다. 좋은 게 있으면 꼭 그만한 값을 치러야 했다. 이 세계는 늘 그런 식이었다. 동굴을 나서며, 태오는 오두막 자리로 돌아가 [정원] 스킬을 다시 켰다. 이번엔 본격적으로 낙원의 형태를 갖춰볼 참이었다. 설랑도 뒤를 슬쩍 따라왔다. 철쇄는 여전히 몸에 감긴 채였지만, 이제는 그저 늘어진 장식처럼 보였다. [정원 스킬 사용] [대상 지역 전체 재구성 시작] 번쩍, 번쩍, 번쩍. 빛이 사방에서 터졌다. 땅이 부풀고, 물길이 갈라지고, 나무들이 순서 없이 자라났다. 태오는 두 손을 모으고 기대에 찬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이번엔 뭔가 그럴듯한 게 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오두막 옆에 있어야 할 샘이, 갑자기 위치를 바꿔 절벽 위에 생겼다. 밭으로 심었던 작물들은 전부 한곳에 뭉쳐 자라며 서로 뒤엉켰다. 나무 한 그루는 뿌리가 하늘을 향한 채 거꾸로 박혀 있었다. [정원 결과: 무작위 배치 오류 발생] [일부 구역 재구성 실패] “이게 뭐야.” 태오는 눈을 크게 떴다. 낙원을 만드는 게 아니라, 완전히 뒤죽박죽 정원이 돼버렸다. 설랑이 그 광경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수마저 어이없어하는 표정이었다. 꼬리로 바닥을 툭툭 치는 게, 사람으로 치면 헛웃음이라도 짓는 듯한 몸짓이었다. 태오는 이마를 짚었다. 사기 스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랜덤성이 껴 있는 스킬이었다. 낙원을 만든다더니, 이건 그냥 낙원 파편들을 마구 뿌려놓은 꼴이었다. [여신 소하의 메시지] [정원 스킬은 사용자의 숙련도에 따라 배치가 안정화됩니다] [현재 숙련도: 매우 낮음] “그럼 지금 이 꼴은 계속 이런 식이라는 거예요?” 태오가 하늘을 향해 물었다. 대답은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사기 스킬 준다고 할 때는 언제고.” 태오가 다시 중얼거렸다. 설랑이 그 옆에서 낮게 울었다. 동조하는 건지 비웃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리였다. 대신, 새로운 알림이 떴다. [새로운 과제 발생] [샘 깊은 곳에서 이상 반응 감지: 원인 불명] [조사가 필요합니다] 태오는 눈썹을 찌푸렸다. 낙원 하나 만들다가 새로운 문제가 또 튀어나왔다. 설랑이 낮게 울며 그 샘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신수의 눈빛이, 조금 전과는 다르게 굳어 있었다. 절벽 위에 뒤틀려 생겨난 샘. 물빛이 이상하게 검푸른 색을 띠고 있었다. 태오는 그쪽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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