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쿠웅.
무언가에 등이 부딪혔다.
태오는 눈을 떴다.
하늘이 보였다.
푸른 하늘, 낯선 색의 구름.
구름이 이상하게 느렸다.
마치 정지 화면처럼 떠 있었다.
“여기가 그 세계인가.”
태오는 몸을 일으켰다.
풀밭이었다.
키가 허리까지 오는 이상한 식물들이 사방에 자라 있었다.
잎사귀 끝이 은색으로 빛났다.
짙은 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딘가 익숙한 냄새인데,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다.
태오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꿈은 아닌 것 같았다.
너무 생생했다.
아니, 애초에 죽었으니 꿈일 수가 없나.
그 소녀가 했던 말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낙원, 이세계, 두 번째 삶.
전부 헛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알림: 강태오, 이세계 도착]
[클래스 배정을 시작합니다]
태오는 침을 삼켰다.
클래스 배정이라니, 이거 완전 게임 튜토리얼이잖아.
좋은 거 나오려나.
검사, 마법사, 뭐 그런 거.
기대감이 슬쩍 올라갔다.
이왕 죽어서 온 거, 화려한 거 하나쯤 얹어주는 게 예의 아닌가.
태오는 피식 웃음이 났다.
검은 로브 걸치고 파이어볼 쏘는 상상까지 잠깐 했다.
[클래스 배정 결과: 크래프터]
태오의 표정이 굳었다.
크래프터?
“이거 뭐야.”
다시 확인해도 똑같았다.
눈을 비비고 세 번 더 읽었다.
글자가 바뀔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크래프터]
[제작 계열 클래스. 전투 능력 없음. 생산 특화]
“전투 능력 없음이라고 대놓고 써놨네.”
태오는 헛웃음을 흘렸다.
검사도 아니고, 마법사도 아니고.
하필 만드는 직업이냐.
남들은 검 들고 몬스터 썰고 다니겠는데, 나는 뭐, 대장간에서 못이나 두들기라는 건가.
죽어서도 노동자구나. 태오는 이마를 짚었다.
한숨이 나왔다.
전생에서도 야근하다 죽었는데, 여기서도 망치질이냐.
운명이 참 지독하게 일관적이다.
[스킬 확인 가능]
손을 뻗자 시야에 목록이 떠올랐다.
[제작], [수리], [채집], [정원]
제작, 수리, 채집.
셋 다 이름값 그대로였다.
설명도 안 봐도 뻔했다.
망치질, 고치기, 줍기.
완벽하게 노동자 세트였다.
정원.
태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소녀가 말한 낙원 건설과 맞아떨어지는 이름이었다.
[정원(★): 미확인 스킬. 사용 시 세부 정보 공개]
별표까지 붙어 있었다.
뭔가 특별한 건가.
다른 세 개는 별표가 없는데 이거 하나만 있는 게 걸렸다.
일단 눌러보자.
[정원 스킬을 활성화하시겠습니까?]
태오는 손끝으로 허공을 눌렀다.
번쩍.
주변 땅이 짧게 빛났다.
태오 발밑으로 작은 원이 그려졌다.
원 안에 흙이 살짝 부풀어 올랐다.
흙 색깔이 순식간에 짙어지더니 반질반질해졌다.
[정원: 지정 구역의 토양을 최적화합니다]
[적용된 땅: 생산력 300% 증가]
“이거 뭐야.”
태오는 눈을 크게 떴다.
300퍼센트라고?
제작이나 채집도 아니고 이건 땅 자체를 뒤바꾸는 거네.
농사꾼도 아닌데 왜 땅부터 만지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숫자가 마음에 들었다.
“전투 능력이 없다뿐이지, 이거 완전 다른 방향의 사기 아닌가.”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검이나 마법이 없어도 뭔가 굴러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스킬: 정원]
[효과: 대상 지역의 생태와 자원 순환을 재구성. 사용 범위와 효과는 스킬 레벨에 비례]
[현재 레벨: 1]
태오는 조금 더 자세히 살펴봤다.
레벨 1인데 벌써 300퍼센트라니.
이게 크면 어디까지 가는 거야.
레벨 10이면 뭐, 땅에서 금이라도 캐는 건가.
레벨 100이면 세계 하나를 만드나.
크래프터가 재수 없는 배정이라고 생각했던 게 방금 전 얘기였다.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전투는 못 해도, 살아남는 데는 이게 더 유용할 수도 있겠다.
당장 몬스터랑 싸울 일 없으면, 검보다 밭이 더 필요한 거 아닌가.
촤악.
갑자기 발밑이 축축해졌다.
태오가 서 있던 자리에서 물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발목 근처까지 서서히 차올랐다.
[정원 효과: 수원 형성]
[작은 샘이 생성되었습니다]
“물까지 만드네.”
태오는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 손을 담갔다.
차갑고 맑았다.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작은 물고기라도 있을 것 같은 투명함이었다.
먹을 물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생존 첫 관문을 이렇게 쉽게 넘는 건가.
게임이었다면 튜토리얼 보상치고 너무 과한데.
이거 나중에 대가로 뭔가 뜯길 것 같은 불길함도 살짝 들었다.
태오는 물 한 모금을 손으로 떠서 마셔봤다.
시원했다.
군더더기 없는 맛이었다.
그냥 물맛인데도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그때, 시야 한쪽에 새 알림이 떴다.
[여신 소하의 메시지]
[낙원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이제부터 이 세계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합니다]
태오는 그 문구를 다시 읽었다.
낙원의 씨앗이라니, 무슨 나비효과 같은 소리를 하네.
근데 방금 만든 물이 그 씨앗이라는 건가.
아니면 아까 흙을 뒤집은 게 씨앗인가.
정확히 뭐가 씨앗인지도 안 알려주고 씨앗이 뿌려졌다니.
설명도 참 야박하다.
일단 살아야 낙원도 만들지.
태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숲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나무들이 뒤엉켜 있어서 하늘조차 가려지는 구간도 보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감이 안 왔다.
[퀘스트 알림]
[생존 기반 마련: 거처 확보 / 식량 확보]
“이건 또 뭐야.”
태오는 헛웃음을 흘리며 목록을 확인했다.
튜토리얼 퀘스트인 모양이었다.
보상도 안 나와 있고, 실패하면 뭐가 어떻게 되는지도 안 알려줬다.
불친절한 게임이네, 진짜.
크래프터라서 다행인 건가, 불행인 건가.
아직 판단이 안 섰다.
하지만 손끝에서 느껴지는 이 이상한 자신감은, 확실히 나쁘지 않았다.
검 한 자루 없이도 뭔가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감각.
그게 생각보다 든든했다.
태오는 숲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풀숲을 헤치자 서늘한 그늘이 얼굴에 닿았다.
발밑에서 낙엽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바스락.
한 걸음, 또 한 걸음.
숲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신경이 곤두섰다.
뭔가 이상한 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는 것도 같았다.
으르렁, 아주 낮고 무거운 소리였다.
태오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감각이 흘렀다.
전투 능력 없음.
방금 확인한 그 문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필 이 타이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