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스승님, 정체가 뭐예요?

1화

청류진에 도착한 첫날, 나는 그곳이 국경 도시라는 말이 무색하게 조용하다고 생각했다. 성문 앞에서 마차가 멈춰 서는 순간까지도 그랬다. 국경이라면 으레 병사들의 발소리와 창검이 부딪히는 쇳소리, 상인들의 호객 소리가 뒤섞여 어지러울 거라 상상했는데, 실제로는 그저 평범한 소도시의 풍경이었다. 낮은 지붕들이 줄지어 있고, 늙은 개 한 마리가 골목 어귀에서 늘어져 자고 있었으며, 저 멀리 성벽 위로 병사 두어 명이 창을 짚고 서서 하늘을 구경하고 있는 게 다였다. 그 생각이 얼마나 짧았는지는 성문을 통과하고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지만, 적어도 그 순간까지는 나름 낭만적인 착각을 품고 있었다는 뜻이다. 서채린과 나는 각각 기사단과 대사원의 이름으로 파견된 몸이었다. 마차 문이 열리고 발을 내딛는 순간, 나는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격식 있는 마중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사람 하나쯤은 나와서 인사를 건네줄 거라고. 자작위를 받은 몸이자 기사단에서 나름 인정받는 검사였던 나로서는, 그것이 이상한 기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를 맞은 건 격식 있는 인사가 아니라, 성문지기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우리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던진 한마디였다. "한지운 사범님을 뵈러 왔다고? 헛걸음이오." 그 말투에는 묘한 동정이 섞여 있었는데, 마치 사흘 굶은 사람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되짚어봤다. 헛걸음이라니, 우리는 이제 막 도착한 참인데 어떻게 벌써 헛걸음이라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서채린이 먼저 정중하게 되물었다. "헛걸음이라니, 어떤 의미로 하시는 말씀인지요?" "그 사람한테 사사를 받겠다고 온 사람들, 여기서 한둘 봤는 줄 아나. 다들 사흘도 못 버티고 짐 싸서 돌아갔소. 그러니 미리 마음의 준비나 하고 가시오." 사내는 그 말을 하며 혀를 한 번 차더니, 우리가 짐을 옮기는 걸 도와줄 생각도 없다는 듯 등을 돌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 이유를 굳이 캐묻지 않은 건, 사내의 말투에서 이미 우리를 딱하게 여기는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이곳 사람들에게 한지운이라는 이름은 존경이 아니라 동정과 함께 붙는 이름인 모양이었고, 나는 그 사실이 못내 불편했다. 기사단 대장이신 이강철 님과 대사이신 선보라 님, 두 분이 직접 신임을 보내 우리를 이곳으로 보내셨는데, 그런 분들이 고른 사람이 겨우 사흘도 버티기 힘든 인물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싶었으니까. 두 분 다 허튼소리로 사람을 움직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특히 이강철 대장님은 검 하나만큼은 냉정하게 평가하는 분이었고, 실력 없는 자를 실력 있는 것처럼 포장하는 걸 누구보다 싫어하는 분이었다. 그런 분이 나를 이곳으로 보냈다는 건,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서채린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마차에서 짐을 내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상하네요. 스승님께서 실없이 사람을 붙이실 분은 아닌데." "그러니까 일단 직접 봐야 알겠지."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반쯤 미심쩍은 기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짐을 등에 지고 성문지기가 가리켜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을 때, 거리의 사람들이 우리를 힐끔거리는 시선도 느껴졌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를 보는 게 아니라, 우리가 향하는 방향—도장이 있는 골목 쪽을 보고는 저것들도 곧 알게 되겠지, 하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 시선들을 무시하려 애썼지만, 걸음을 옮길수록 불안이 조금씩 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도장은 생각보다 낡은 건물이었다. 기와가 몇 장 깨져 있었고, 마당에는 잡초가 무릎 높이까지 자라 있었으며, 훈련용 목인은 한쪽 팔이 부러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도장을 찾아가면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도장의 문지기 격인 소년은 우리를 보자마자 대뜬 이렇게 알려주었다. "사범님은 지금 도장에 안 계세요. 아마 저 아래 골목 술집에 계실걸요." "지금... 몇 시인지 아니?" 내가 되묻자 소년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오후 세 시쯤 됐을 텐데요. 사범님은 늘 이 시간에 거기 계세요." 늘, 이라는 말이 유독 걸렸다. 사냥을 나가지도, 검을 잡지도 않고, 대낮부터 술집에 있다는 게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라 일상이라는 뜻이었으니까. 내가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느낀 감정은 실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허탈함에 가까웠던 것 같다. 마치 오랜 시간 준비해온 시험장에 도착했더니, 시험관이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걸 발견한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스승이 될 사람이니 첫 인사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우리는 소년이 알려준 골목을 따라 걸었다. 골목은 좁고 어두웠으며, 낮인데도 해가 잘 들지 않아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몇 걸음을 옮기자 낡은 나무 간판이 삐걱거리는 술집이 눈에 들어왔다. 간판에는 글자가 반쯤 벗겨져 무슨 이름인지도 알아보기 힘들었는데, 그마저도 어딘가 이 도시의 분위기와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열자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확 밀려나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내 평생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한 사내가 테이블 위에 반쯤 엎어져 있었는데, 그 주위로 여자 셋이 둘러앉아 웃고 있었고, 그중 한 명이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뭐라고 속삭이자 사내가 나른하게 눈을 뜨고 웃음을 흘렸다. 서른 초반쯤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옷깃이 반쯤 풀어져 있었고, 뺨은 술기운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으며, 허리춤에 검이 걸려 있긴 했지만 그 검조차 언제 뽑아본 적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관리 상태가 초라했다. 칼집에는 먼지가 앉아 있었고, 손잡이를 감싼 가죽끈은 여기저기 닳아 있었다. 검사가 검을 저렇게 방치한다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저 사람이... 한지운 사범님이라고요?" 서채린이 옆에서 낮게 물었을 때, 나는 대답할 말을 고르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우리 쪽을 흘깃 보더니, 여자들에게 뭔가 농담을 던졌고, 그 말에 다시 웃음이 터졌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우리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를 향해서는 손짓 하나 없었다. 마치 낯선 손님이 잘못 들어온 것처럼, 그는 우리의 존재 자체를 시야에서 밀어내고 있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스쳤다. '이강철 대장님이 정말 이 사람을 신임하신다고?' 하는 의심이었는데, 그 의심은 곧바로 자존심과 뒤섞여 불쾌함으로 변했다. 나는 자작위를 받은 몸이었고, 기사단에서도 인정받는 검사였다. 그런 내가, 겨우 이런 술주정뱅이에게 검을 배우러 왔다는 사실이 순간적으로 참을 수 없이 굴욕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겪었던 온갖 고생들—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며칠을 보내고, 국경 근처의 험한 산길을 넘고, 낯선 도시의 눈초리를 받아가며 도착한 이 모든 과정이, 결국 이런 광경 앞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결국 나는 다가가서 예를 갖추어 인사를 건넸다. 옆에서 서채린도 조용히 뒤따라 섰다. "이하준입니다. 기사단에서 파견되어 사범님께 사사받기로 되어 있습니다." 한지운은 나를 힐끗 올려다보더니, 술잔을 든 채로 이렇게 말했다. "어. 그래." 그것뿐이었다. 나는 잠시 내 귀를 의심했다. 뭔가 더 붙을 줄 알았다. 이름이라도 물어보거나, 언제부터 도장에 나올 거냐고 묻거나, 최소한 앉으라는 말이라도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다시 여자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술잔을 비웠고, 우리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여자들 중 하나가 우리를 보며 뭔가 재밌다는 듯 킥킥거렸는데, 그게 나를 향한 조롱인지 그냥 술기운에 웃은 건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서채린이 내 옷깃을 슬쩍 잡아당기며 낮게 속삭였다. "일단... 나가죠." 나는 별다른 저항 없이 그녀를 따라 몸을 돌렸다. 더 서 있어봤자 우리 쪽만 초라해질 뿐이라는 걸,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었으니까. 술집을 나서며 나는 뒤통수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는데, 그건 술집 안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 아니라, 방금 목격한 광경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였다. 도대체 저런 사람에게 배울 게 뭐가 있다는 건지, 나는 골목을 나서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그 낡은 간판을 확인했다. 마치 다시 들여다보면 방금 본 것이 착각이었다는 걸 증명해줄 것처럼. 골목을 빠져나오는 동안 서채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에게 뭐라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정작 입을 열었을 때 나온 말은 이런 것뿐이었다. "...이걸, 스승님이 정말 알고 보내신 걸까요?" 서채린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로 짧게 답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뭔가 사연이 있을 거예요. 그렇게 믿고 싶네요." 그 말에는 확신이 없었다. 오히려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처럼 들렸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이 국경 도시에서의 첫날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렸다는 사실을 곱씹었다. 도장의 부러진 목인과, 잡초가 무성한 마당과, 술 취한 사범의 나른한 눈빛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되풀이됐다. 우리는 대체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어쩌면 저 낡은 간판 아래의 문을 다시 열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그날 밤 내내 나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