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정원은 연회장보다 훨씬 조용했다.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등 뒤로 왁자지껄한 소리가 뭉텅 잘려나가는 게 느껴졌다. 사람 많은 곳에서 벗어나니까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달빛이 나무 사이로 스며들었고, 잔디밭 위에는 얕은 안개 같은 게 깔려 있었다.
돌길을 따라 걸으니 구두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로판 소설에서나 보던 그런 정원이었다. 조경사가 몇 명이나 붙었을지 감히 짐작도 안 갔다.
돈 지랄 보소.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벤치 근처에 섰다.
"이런 자리 익숙하지 않으시죠."
이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아까 연회장에서 봤던 그 딱딱한 표정과는 다른, 어딘가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네. 태어나서 이런 화려한 곳은 처음입니다."
"그런데도 별로 위축되지 않으시네요."
위축이라니. 속으로는 계속 진땀을 빼고 있었는데.
"위축될 여유가 없었습니다. 아까 그분 눈빛이 워낙 살벌해서."
이서연이 소리 없이 웃었다.
웃을 때 눈매가 살짝 휘어지는 게, 은근히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인상이었다.
"하윤이는 원래 그래요. 재산이 워낙 많아서 그런지, 세상 모든 게 다 자기 손바닥 안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부잣집 딸이신가 봐요."
"선백작가 영애예요. 왕국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부호 집안이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돈 냄새가 짙게 나는 사람이었다는 게 이제야 이해가 갔다.
생각해보니 아까 그 눈빛도, 그냥 시비를 거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자기 아래로 깔고 보는 시선이었던 것 같다. 세상 모든 걸 자기 손바닥 안에 두고 사는 사람 특유의, 그런 여유가 오히려 위압적으로 느껴지는 거였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밤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만 사각사각 들려왔다.
이서연이 벤치에 앉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도 얼떨결에 그 옆에 조금 떨어져서 앉았다. 예의상 앉아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강도현 님은, 왕도에 얼마나 머무르실 건가요?"
"시험이 끝나면 바로 내려갈 겁니다. 합격하면 지방 발령을 받을 테고요."
"그렇군요."
짧은 대답 속에 뭔가 실망이 섞인 것 같았다.
왜 저렇게 아쉬운 반응이지?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혹시 내가 뭘 잘못 말했나, 하고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뒤졌지만 딱히 걸리는 게 없었다. 그냥 시험 끝나면 내려간다는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저는, 왕도를 좀 떠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많아요."
이서연이 무심코 흘리듯 말했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 담담하던 어조와는 미묘하게 결이 달랐다.
"이유가 있으신가요?"
그녀가 잠깐 나를 바라봤다.
말할지 안 할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달빛 아래서도 보였다. 뭔가 무거운 걸 담고 있는 눈빛이었다.
"아니에요. 그냥, 개인적인 사정이에요."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남의 사정을 파고드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차피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었다.
만난 지 하루도 안 된 사람한테 인생 상담을 해줄 처지도 아니었고. 나 하나 살아남는 것도 벅찬 판에.
침묵이 다시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침묵이었다. 뭔가 애매하게 걸린 채로 끝나버린, 뒷맛이 남는 정적.
그때, 정원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구두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곧 그 주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 여기 있었네."
선하윤이었다.
연회장에서 봤던 그 화려한 드레스 차림 그대로였다. 다만 표정은 아까보다 훨씬 여유로워 보였다. 마치 재밌는 걸 발견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나와 이서연을 번갈아 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둘이서 이런 곳에서 뭐 하고 있어?"
"바람 좀 쐬고 있었어."
이서연이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목소리에 미묘한 긴장이 섞여 있었다.
방금까지 나한테 개인적인 얘기를 흘리던 사람이랑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순식간에 태도가 바뀌어 있었다.
친구 사이인데도 뭔가 신경전 같은 게 있는 건가.
선하윤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구두 굽이 잔디를 밟는 소리가 이상하게 신경을 긁었다.
"강도현 님, 아까 대련은 왜 사양하셨어요?"
"시험을 앞두고 있어서요."
"검을 잘 쓰는 사람이 그런 이유로 대련을 피한다는 게, 좀 이상하지 않아요?"
말투가 점점 시비를 거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순간 당황해서 말을 흐렸다.
"그, 렇게 보이실 수도 있지만."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시험을 앞두고 있는 게 진짜 이유이긴 한데, 저 표정을 보니 그걸로는 안 통할 것 같았다.
"그럼 지금 여기서 잠깐 보여주세요. 딱 한 수만."
선하윤이 자신의 허리춤에서 짧은 검을 뽑아 들었다.
챙, 하는 금속음이 조용한 정원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연회복 안에 검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도, 지금 저걸 진심으로 쓸 생각이라는 것도, 둘 다 충격적이었다.
이게 부잣집 영애의 취미생활인가. 아니면 원래 이 왕국 상류층은 다 이런 식인가.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하얘졌다.
"여, 여기서요?"
"왜요, 무서워요?"
선하윤의 눈빛이 장난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진짜 확인하고 싶다는 의지가 섞여 있었다.
단순히 시비를 거는 게 아니라, 정말로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보고 싶어 하는 눈빛이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이서연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하윤아, 그만해."
"괜찮아, 딱 한 번만."
선하윤이 검을 든 손을 슬쩍 흔들며 다가왔다.
검날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번쩍였다.
나는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손끝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몸이 반사적으로 가속을 준비하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니, 이건 그냥 놀란 게 아니라, 몸 자체가 이미 전투 모드로 넘어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안 돼.
여기서 그 힘을 썼다간, 지금까지 숨기고 살았던 정체가 통째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머릿속으로 온갖 계산이 스쳐 지나갔다. 검을 피하는 방법, 검을 막는 방법, 아예 반응하지 않는 방법. 어느 쪽도 완벽한 정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검이 정말로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거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이서연의 목소리가 뒤에서 다급하게 뭐라 뭐라 외치는 게 들렸지만,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선택의 순간에 몰려 있다는 걸 직감했다.
피할 것인가, 받아낼 것인가.
둘 중 뭘 고르든, 오늘 밤 이후로 뭔가가 완전히 달라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