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설원에 새긴 견장

1화

이름이 불렸다. "이하준." 연무장 한가운데, 흰 석회로 그려진 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등 뒤로 백여 명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대부분은 호기심이었고, 몇은 비웃음이었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익숙했다. 가온 무관학교 마봉 각성 시험. 삼 년의 훈련 끝에 각자의 마봉을 개방하는 마지막 실기 시험이었다. 필기에서 이미 순위가 대강 갈렸고, 이 시험은 그 순위에 마지막 쐐기를 박는 자리였다. 나는 필기에서 이미 상위권이었다. 그 사실이 오히려 문제였다. 아침에 기숙사를 나설 때부터 알고 있었다. 오늘 하루는 순탄하지 않을 거라는 걸. 세면장 앞에서 마주친 생도 하나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자리를 옮겼다. 아침 배식 줄에서도 내 앞뒤로 한 사람 폭의 거리가 생겼다.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진 거리였다. 상처받을 것도 없었다. 밥은 잘 넘어갔다. 연무장은 학교 부지에서 가장 넓은 공간이었다. 사방이 돌벽으로 둘러싸이고, 중앙에는 시험용 원이 그려져 있었다. 관람석에는 교관들과 상급생들, 그리고 각 가문에서 보낸 참관인들이 앉아 있었다. 참관인이 앉는다는 것 자체가 이 시험의 무게를 말해줬다. 마봉의 위력과 형태는 곧 그 가문의 격을 증명하는 자료였다. 평민에게는 참관인이 올 리 없었다. 나는 텅 빈 관람석 한구석을 잠깐 눈으로 훑었다. 서지아가 거기 앉아 있었다. 문관 시험 준비생이 실기장에 볼 일이 없는데도. "평민이 필기 이 위라고?" 누군가 뒤에서 낮게 웃었다. 목소리를 낮췄지만 감추려는 의지는 없었다.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돌아보지 않았다. 대꾸할 가치도 없었다. 앞서 시연을 마친 것은 강태오였다. 천룡가 당주 강도윤의 장남. 그의 마봉은 붉은 불새 형상으로, 개방되는 순간 연무장 지붕까지 화염이 치솟았다. 열기가 여기까지 밀려왔다. 뺨이 뜨거웠다. 교관들이 감탄사를 뱉었다. 생도들이 박수를 쳤다. 그는 답례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우아했다. 우아하다는 말이 아깝지 않았다. 옆에 서 있던 생도 하나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저게 진짜 명가의 마봉이지." 딱히 나를 향한 말은 아니었지만, 굳이 이 타이밍에 할 필요도 없는 말이었다. 괜찮다. 저건 저거고, 이건 이거다. 내 이름이 불리기까지 세 명이 더 있었다. 화염을 다루는 생도, 얼음벽을 세우는 생도, 그리고 바람의 칼날을 흩뿌리는 생도. 각기 다른 색으로 연무장 바닥을 태우거나 얼리거나 갈랐다. 화려했다. 관람석에서 나오는 반응도 그만큼 컸다. 나는 그 반응들을 들으면서 손목의 봉인문을 만지작거렸다. 삼 년 전, 각성식 날 받은 그 문양은 여전히 낡은 것처럼 흐릿했다. 마봉의 이름은 벽라(碧羅).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제대로 위력을 보인 적이 없었다. 원래는 방어형으로 분류된 마봉이었다. 겉보기엔 그랬다. 이름이 불렸다. 이번엔 정말로 내 차례였다. 원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나는 관람석의 웅성거림이 잠시 잦아드는 걸 느꼈다. 다들 궁금해하는 얼굴이었다. 저 평민이 필기 이 위를 어떻게 받았는지, 실기에서는 뭘 보여줄지. 궁금함과 비웃음은 한 그릇에 담겨 있어도 맛이 섞이지 않는다. 나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받으면서 손목을 풀었다. 손끝에서 푸른 실이 풀려나왔다. 비단처럼 얇고, 그물처럼 얽혔다. 허공에서 넓게 펼쳐지더니 연무장 한복판에 커다란 그물망을 드리웠다. 화려하지 않았다. 소리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넓게, 펴졌다. 정적이 흘렀다. 몇몇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화염도, 얼음도, 바람의 칼날도 아닌 그저 푸른 실이라니. 뒤쪽 어디선가 헛웃음 비슷한 소리가 났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써봐야 실이 화염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교관 하나가 시험용 목표물―쇠사슬에 묶인 모래 인형―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인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팔다리를 뻗고, 쇠사슬을 당기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제법 힘이 실린 움직임이었다. 벽라가 반응했다. 그물이 순식간에 접히며 인형을 휘감았다. 쇠사슬이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우드득. 관람석이 조용해졌다. 방금 그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다들 아는 얼굴이었다. 시험용 쇠사슬은 삼중 강철로, 어지간한 화염이나 바람의 칼날로도 쉽게 끊어지지 않는 물건이었다. 방어형 마봉이 그걸 끊어냈다는 건, 최소한 그 분류가 틀렸다는 뜻이었다. "…강도가 상당한데." 교관 하나가 중얼거렸다. 박수는 없었다. 대신 웅성거림이 있었다. 방어형으로 알고 있던 마봉이 구속력을 이 정도로 낸다는 게 이례적이라는 반응이었다. 몇몇 교관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 눈짓 안에 뭐가 담겼는지는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돌아서는데, 박용재가 팔짱을 낀 채 앞을 막았다. 상공성 배치가 이미 확정된 얼굴이었다. 여유가 넘쳤다. 그의 옷깃에는 가문 문장이 새겨진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그 브로치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거 하나로 이미 절반은 이긴 게임이라는 것. "평민 주제에 재주는 있네."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근데 재주만 있으면 뭐 해. 자리가 없잖아." "자리는 시험으로 정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나는 짧게 답했다. "시험 성적이 다가 아니라는 거, 너도 알잖아." 그가 웃으며 몸을 기울였다. "핏줄이 먼저야. 넌 아무리 잘해도 삼 위 밑이지도 못하고, 삼 위 위로도 못 가." "삼 위면 충분합니다." 나는 그의 눈을 마주 봤다. "제가 있을 자리는 제가 만들면 되니까요." 그는 잠시 말을 잃었다. 예상한 대답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뒤에서 누군가 킥킥거렸다. 그의 뒤통수가 붉어졌다. 붉어지는 속도가 은근히 빨랐다. 저 얼굴색도 재주라면 재주다. "두고 봐, 이하준." 그는 그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뒷모습이 뚱뚱한 자존심처럼 보였다. 내 뒤로 몇몇 생도가 스쳐 지나가며 한마디씩 흘렸다. "저건 뭐 실인가." "방어형이 왜 인형을 부숴." 말들은 다 들렸지만 대꾸할 필요는 없었다. 이런 종류의 말은 대꾸를 시작하는 순간 끝이 없다는 걸 삼 년 동안 배웠다. 서지아가 다가온 건 그 직후였다. 문관 시험을 준비하느라 실기장에는 볼 일이 없는데도, 관람석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귀족 출신이면서 굳이 평민 친구의 시험을 보러 온 사람이었다. 손에는 필기시험 참고서가 들려 있었다. 시험을 보러 온 게 아니라 공부하다 잠깐 짬을 낸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굳이 이 자리까지 왔다는 게, 그 애 나름의 배려였다. "저 자식 말은 신경 쓰지 마." 그녀가 짧게 말했다. "근데 넌 좀 신경 써. 매번 저렇게 정면으로 받아치니까 적이 늘어나잖아." "적은 이미 있었어." 나는 손목의 봉인문을 다시 채웠다.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그래도." 그녀는 참고서를 덮으며 나를 봤다. "방금 그 그물, 좋았어. 화려하진 않아도, 진짜 필요할 때 쓸모 있는 건 저런 거야." "고맙다." 나는 짧게 답했다. 진심이었다. 이 학교에서 그 말을 진심으로 해주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저녁에 시간 있어?" 그녀가 물었다. "결과 나오기 전에 뭐라도 먹자. 너 어차피 시험 끝나면 굶잖아." "결과 보고." 나는 말했다. "지금은 입맛이 없어서." "그럴 줄 알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지만, 더 나무라지는 않았다. 나무라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아는 얼굴이었다. 시험은 그날로 끝났다. 남은 생도들의 시연도 이어졌지만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화려한 것과 화려하지 않은 것, 명가 출신과 그렇지 않은 출신. 그 구분선은 시험이 끝날 때까지 선명하게 유지됐다. 이제 남은 건 필기와 실기를 종합한 최종 순위 발표뿐이었다. 순위는 곧 배치를 결정하고, 배치는 곧 삼 년 뒤의 삶을 결정한다. 그 정도 무게가 있는 발표였다. 그날 밤, 기숙사 방에 돌아와서도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창밖으로 연무장의 불빛이 하나씩 꺼지는 걸 지켜봤다. 삼 년 전 이 학교에 처음 들어왔을 때가 생각났다. 평민 출신으로 입학한 게 나 혼자는 아니었지만, 삼 년 사이에 절반 넘게 자퇴했다. 남은 몇몇도 대부분 하위권에 머물렀다. 나만 유독 필기에서 순위를 유지한 게, 오히려 눈에 띄는 이유가 됐다. 눈에 띄지 않았으면 더 편했을까. 그런 생각은 별 의미가 없었다. 이미 눈에 띄었고, 이제 와서 되돌릴 수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 게시판 앞에 생도들이 몰려 있었다. 이른 시간인데도 벌써 오십 명 가까이 모여 있었다. 다들 어젯밤 잠을 설쳤을 얼굴이었다. 몇몇은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고, 몇몇은 애써 무심한 척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강태오는 저 뒤쪽에서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결과를 이미 다 아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의 시연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상위권일 거라고 확신했을 거다. 박용재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미리 소식을 들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나처럼 조금 늦게 올 생각이었을지도. 종이 한 장이 아직 붙기 전이었다. 부관이 게시판 뒤편에서 압정을 들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손에 쥔 종이가 접혀 있었다. 그 종이 안에 무슨 숫자가 쓰여 있는지, 나는 아직 몰랐다. 부관이 종이를 펼치려는 순간, 옆에서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숨을 짧게 참았다. 삼 년을 이 순간을 위해 버텼다. 필기 시험지를 몇 번이나 다시 풀었는지, 밤늦게까지 벽라를 개방했다가 다시 봉인하며 반응을 익혔는지. 그 시간들이 이 한 장의 종이 위에 숫자 몇 개로 정리될 참이었다. 부관이 압정을 종이 위에 꽂았다. 생도들이 앞으로 몰려들었다. 나도 그 사이에 섞였다. 앞줄에 있던 누군가의 어깨에 밀려 반걸음 물러섰다가 다시 앞으로 나갔다. 종이가 펼쳐지는 순간,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앞줄에서 누군가 낮게 탄성을 뱉었고, 뒤쪽에서는 낮은 소리로 이름을 되뇌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직 그 글자를 읽지 못했다. 괜찮다. 어차피 곧 알게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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