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무도회를 나흘 앞둔 저택 뒷문 앞에는 임시로 고용된 메이드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른 아침의 공기는 아직 차가웠고, 저마다 두른 낡은 겉옷 사이로 입김이 하얗게 피어올랐는데, 그 줄 끝자락에 하린이 서 있었다. 다른 이들보다 유난히 남루한 겉옷을 걸친 그녀는 줄의 맨 뒤에서 조용히 차례를 기다리며, 앞선 이들의 등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관리인은 명단을 손에 든 채 하나씩 이름을 부르며 훑어보았다. 그의 걸음은 느렸고, 명단을 확인하는 손끝은 마치 오래된 장부를 넘기듯 신중했는데, 그 시선이 하린에게 닿는 순간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서하린... 아, 그 소문의 아이인가." 관리인의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경계심이 배어 있었다. 이미 저택 안에서는 서관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사생아가 이름을 밝히고 임시직에 지원했다는 소식이 빠르게 퍼져 있었고,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관리인이 명단을 다시 확인하는 절차까지 거치는 중이었다. 그는 명단을 손끝으로 두어 번 두드리며 하린을 위아래로 훑었는데, 그 눈길에는 호기심과 불쾌함이 뒤섞여 있었다.
"들었어. 조사를 받고 있다지. 그런데 뻔뻔하게 여기까지 얼굴을 내밀다니." 그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하린은 턱을 조금 들어 올린 채 관리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조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러니 일을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 말에는 억눌린 자존심이 배어 있었는데,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관리인은 잠시 그녀를 훑어보다가, 뒤에 늘어선 줄을 돌아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일손이 부족하니까." 그는 결국 혀를 차며 명단에 표시를 남겼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쫓겨날 줄 알아.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하린이 짧게 답했다.
그렇게 하린은 저택 안으로 발을 들였다. 뒷문을 지나 들어선 복도는 화려한 응접실과는 정반대로 어둡고 좁았으며, 낡은 벽지 위로 희미한 곰팡이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벽을 따라 걸으며 하린은 낯선 흥분과 긴장이 뒤섞인 감각을 느꼈다. 발밑의 나무 바닥은 밟을 때마다 낮게 삐걱거렸는데, 그 소리가 마치 이 저택이 그녀를 경계하며 내는 신음처럼 들렸다.
이곳이 자신의 생부가 사는 곳이라는 사실이, 그리고 자신이 그 얼굴조차 모르는 남자의 딸이라는 사실이 발밑에서 자꾸만 무겁게 걸렸다. 복도 끝에 걸린 초상화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유화 속에서 근엄한 얼굴을 한 남자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하린은 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얼굴을 살폈다. 낯선 얼굴이었다. 저 사람이 아버지일까, 아니면 그저 이 저택을 거쳐 간 또 다른 조상일 뿐일까. 알 수 없었다.
*저 얼굴에서 나를 찾을 수 있을까.*
그 생각을 밀어내며 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른 메이드들의 시선은 하린에게 곱지 않았다. 몇몇은 노골적으로 수군거리며 지나갔고, 그중 나이 든 하녀 하나는 하린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며 낮게 내뱉었다. "저택에 불을 지를 여자가 뭘 하러 여기까지 온 거야." 그 말에 하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으나, 그녀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또 다른 젊은 메이드는 하린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옆 사람의 옷자락을 잡아끌었고, 둘은 소곤거리며 자리를 옮겼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하린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런 말에 흔들리면 안 돼.*
그 다짐과 함께 그녀는 지급받은 앞치마를 두르고 허리를 곧게 세웠다. 앞치마의 흰빛이 어스름한 복도 조명 아래에서 유난히 도드라졌는데, 그 순백의 천을 두른 순간 하린의 마음속에서 낯선 기억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오래전, 아주 먼 곳에서의 어느 저녁.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은쟁반을 든 채 손님 앞에 서 있던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그때 곁에 서 있던 선배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던 말도 함께 떠올랐다. *등을 곧게, 시선은 정면보다 살짝 아래로. 그게 손님을 편안하게 만드는 거야.* 그 목소리의 억양까지도 선명하게 되살아났는데, 낮고 부드러우면서도 확신에 찬 어조였다. 그 기억이 진짜였는지, 아니면 그저 오래 품어온 꿈이 만들어낸 환상인지 하린은 여전히 확신하지 못했지만, 지금 이 순간 그 기억이 그녀의 등을 곧게 펴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무도회 준비는 이틀 밤낮으로 이어졌다. 대연회장의 바닥을 닦고, 촛대를 손질하고, 손님을 위한 다과상을 차리는 일까지, 하린은 남들보다 배로 몸을 움직이며 자신의 존재를 지웠다. 무릎을 꿇고 바닥을 닦을 때마다 손끝이 갈라지고 물집이 잡혔지만, 그녀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다시 걸레를 쥐었다. 촛대를 닦는 일도 손에 익은 듯이 매끄러웠는데, 은으로 된 촛대의 표면에 낀 검은 얼룩을 닦아내는 손놀림이 마치 오래 해온 사람의 것처럼 능숙했다.
다른 메이드들의 냉대는 여전했다. 누군가는 일을 시키며 일부러 어려운 부분만 하린에게 몰아주었고, 또 누군가는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옷자락을 걷어치우며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피하듯 몸을 틀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손끝에서 나오는 정교함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릇을 정리하는 손놀림이나, 촛불을 다루는 태도가 마치 오래 훈련받은 사람의 것처럼 자연스러웠기에, 몇몇 하녀들의 시선에 담긴 경멸이 조금씩 놀라움으로 바뀌어갔다. 한 번은 다과상을 차리던 중 그릇이 넘어지려는 순간 하린이 재빨리 손을 뻗어 받아냈는데, 그 손놀림을 지켜보던 나이 든 하녀 하나가 낮게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제법이네." 그러나 곧 자신의 말을 후회하는 듯 입을 다물고는 자리를 떠났다.
무도회 전날 밤, 하린은 대연회장 한쪽 구석에서 은쟁반을 정리하던 중 낯선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연회장 안은 이미 대부분의 촛불이 꺼져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는데, 그 어둠을 가르며 걸어오는 발소리가 낮고 규칙적이었다. 그곳에는 강준서가 서 있었는데, 그는 순찰을 도는 척 저택 안을 돌던 중이었으나 그 걸음이 우연히 이 자리에 멈춘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뭘 하는 것이냐."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냉기가 서려 있었지만, 그 눈빛에는 지난번 심문실에서와는 조금 다른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하린은 은쟁반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숙였다. "임시 메이드로 고용되었습니다. 조사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은 알지만, 규정에 따라 정당하게 지원한 것입니다."
강준서는 그녀를 잠시 응시했다. 그 시선은 그녀의 손끝, 옷자락, 그리고 다시 얼굴로 옮겨갔는데, 그 눈빛 속에는 그가 스스로도 정확히 설명하기 힘든 갈등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오래전 잃어버린 한 여인의 얼굴과 지금 눈앞의 소녀 사이에서 겹쳐지는 어떤 감정이었다. 그는 잠시 입을 열려다가 다시 다물었고, 그 짧은 침묵이 연회장의 어둠을 더 무겁게 채웠다.
"이런 곳에서 일할 이유가 있나." 그가 낮게 물었다. 질문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처럼 들렸다.
"일할 이유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살아야 하니까요." 하린이 담담하게 답했다.
그 말에 강준서의 턱이 미세하게 조여졌다.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조심하도록." 그는 그 말만을 남기고 다시 걸음을 옮겼는데, 그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이 마치 물뱀이 수면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모습과 닮아 있었다.
하린은 그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다시 은쟁반을 손에 들었다. 손끝에 남은 그의 시선의 잔상이 이상하게도 오래 가시지 않았는데, 그것이 경계인지 다른 무엇인지 그녀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내일이면 무도회가 시작될 것이었고, 그 안에서 자신이 무엇을 마주하게 될지,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다만 저택의 어둠 속 어딘가에서, 자신을 향해 조여드는 또 다른 시선이 있다는 것만은 어렴풋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