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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오후 6시.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전언을 가져온 건 시녀였다. 얼굴이 하얗게 굳어 있었다. 그 표정만 보고도 알았다. 좋은 일이 아니었다. 본채로 가는 길, 나는 걸음을 늦추지 않으려 애썼다. 발이 자꾸 뒤로 가려 했다. 다섯 살짜리 몸이라 걸음이 짧았다. 그런데도 평소보다 더 짧게 느껴졌다. 본채의 응접실이었다. 평소라면 발도 들이지 못하는 곳이었다. 문 앞에 서 있던 하인이 나를 보고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유난히 무겁게 들렸다. 한서연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등을 곧게 펴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였다. 표정이 차가웠다.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차가웠다. 나는 그 얼굴을 어디서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전생에서, 계좌가 마이너스로 떨어졌을 때. 증권사 창구 직원이 나를 보던 그 얼굴. 동정도 아니고 분노도 아닌, 그저 처리해야 할 대상을 보는 얼굴. "오늘 훈련장에서 있었던 일, 들었다." 목소리가 낮았다. 낮은데도 방 안 공기가 얼어붙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골라야 했다. 잘못 고르면 어떻게 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한 거니." "…그냥, 해봤어요." "그냥?" 어머니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다섯 살짜리가 마나를 다루는 게, 그냥 되는 일이니."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전생의 기억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말한다고 믿어줄 사람도 없었다. 믿어준다면 오히려 더 위험했다. 침묵이 이어졌다. 5초. 10초. 어머니는 그 침묵을 깨지 않았다. 나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교관이 그러더구나. 책에 없는 방식으로 마나를 썼다고." 책. 그 단어에 몸이 굳었다. 전생의 나는 그 단어를 다르게 알았다. 책은 매매 기법서였고, 책대로 하면 늘 늦었다. 남들이 이미 읽고 다 써먹은 다음이었으니까. 이 세계의 책은 조금 다른 의미였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책대로 하면, 늦거나 다치거나 죽었다. "어디서 배운 거니." "…혼자 생각했어요." "혼자 생각했다고." 어머니는 나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이상한 것이 있었다. 걱정이 아니었다. 경계였다. 나는 그 시선을 견디며 서 있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다섯 살짜리 몸이 이럴 때마다 원망스러웠다. 어른의 정신으로 아이의 몸을 버텨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제경 가문의 마법은 정해진 방식이 있다. 대대로 내려온 방식이야. 그걸 어기는 건, 가문의 이름에 먹칠하는 일이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올바른 방법을 찾은 게 왜 먹칠이 되는 걸까. 교관이 가르쳐준 방식은 마나 순환 경로를 세 번 나누어 돌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 경로가 비효율적이라는 걸 첫날 알아챘다. 전생에서 차트를 보던 눈으로, 흐름을 보면 그냥 보였다. 어디서 저항이 걸리고 어디서 손실이 나는지. 그래서 경로를 하나로 합쳤을 뿐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게다가."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네 형이, 오늘 훈련장에서 체면을 잃었다고 들었다. 동생이 자신보다 나은 방식을 쓴다는 걸, 다른 이들 앞에서 보인 거야." 그 말에 나는 뭔가를 깨달았다. 이 집에서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었다. 체면이었다. 순서였다. 누가 위에 있고 누가 아래 있는지, 그 질서였다. 나는 그 질서를 어겼다. 의도치 않게. 전생에서도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었다. 수익률이 좋은 신입 트레이더를 팀장이 은근히 밀어내던 것. 실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누가 먼저 자리를 잡았는지가 문제였다. 그때는 그게 부조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엔 내가 그 부조리의 당사자였다. "당분간 훈련장 출입을 금한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단정적이었다. "교관에게도, 다시는 네게 마나 지도를 하지 말라고 일러두었다." 숨이 막혔다. 계좌가 동결되는 느낌이었다. 내가 뭘 어떻게 잘못 굴렸는지도 모르는데, 그냥 거래 정지 통보를 받는 느낌. "어머니." "더 할 말 있니."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왜 옳은 방식을 쓰는 게 죄가 되느냐고. 형의 체면이 내 재능보다 중요하냐고. 그런데 아무것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말해봤자 통하지 않을 걸 알았다. 이 방 안의 공기가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없어요." "나가봐." 나는 응접실을 나섰다. 문이 뒤에서 닫혔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복도를 걸었다. 다리가 무거웠다. 오후 6시 22분. 시계가 있었다면 그렇게 표시되었을 시간이었다. 22분 사이에 내 세계가 얼마나 좁아졌는지, 나는 그 숫자를 되새기며 걸었다. 박덕수가 복도 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등불 아래 서 있는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내 표정을 보고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옆에서 걸었다. 그의 걸음이 나보다 훨씬 느렸다. 나를 배려한 속도였다. 그 사실을 알아채는 데 몇 걸음이 걸렸다. "괜찮으십니까." 한참 뒤에야 그가 물었다. "괜찮아야 해?" "…아니요." 그의 대답이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정직한 대답이었다. 이 집에서 정직한 대답을 들은 게 얼마 만인지 셀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 창밖은 다시 눈이 내렸다. 눈송이가 유리창에 닿아 녹는 걸 오래 지켜보았다. 전생에서도 겨울이면 창밖을 보며 계좌를 확인하던 버릇이 있었다. 그때는 숫자가 오르내리는 걸 봤고, 지금은 그저 눈이 쌓이는 걸 봤다. 어느 쪽이든, 내가 손댈 수 없는 걸 지켜보는 건 똑같았다. 올바른 방법을 찾았다. 확인했다. 그런데 그 대가로 얻은 건, 더 깊은 고립이었다. 큰형은 이제 나를 피했다. 오늘 낮,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그는 눈을 피하고 방향을 틀었다. 누나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마치 처음 보는 벌레를 보는 것 같은 눈이었다. 어머니는 아예 나를 부르지 않았다. 불렀다가, 이제는 부르지 않았다. 그 차이가 더 아팠다.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박덕수였다.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배 안 고파." "그래도 드셔야 합니다." 그는 쟁반을 내려놓았다. 국물에서 김이 올라왔다. 그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된장 비슷한 냄새였다. 전생의 어느 겨울밤, 편의점 도시락에서 나던 냄새와 닮아 있었다. 그때도 나는 혼자였다. 계좌가 반토막 난 밤이었고,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았다. "도련님." "응." "오늘 하신 게, 틀린 게 아닙니다."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거짓으로 위로하는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틀린 건 이 집의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왜인지 눈물이 나야 하는데 나오지 않았다. 대신 가슴 어딘가가 뻐근했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아직도 목이 마른 느낌이었다. 물을 마셔도 가라앉지 않는 갈증이었다. "고마워." 짧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그 말이 유일한 온기였다. 박덕수는 쟁반을 다시 챙기지 않고 자리에 조금 더 머물렀다. 나는 국물을 한 숟갈 떠먹었다. 따뜻했다. 그 온도가 몸 안으로 퍼지는 걸 느끼며, 나는 다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집안의 방식이 틀렸다는 건 이제 확실했다. 경로를 세 개로 나누는 방식은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위험했다. 마나가 세 번 꺾이는 구간마다 부하가 걸렸다. 그 부하가 누적되면 몸에 무리가 갔다. 나는 그걸 며칠 안 되는 훈련으로 눈치챘다. 그런데 이 가문은 대대로 그 방식을 써왔다. 대대로, 몇 명이나 다쳤을까.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다시 그 이름을 떠올렸다. 선우결. 전생의 기억 어딘가에 걸려 있던 이름이었다. 정확히 어디서 봤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확신이 들었다. 그 사람이라면, 이 방식의 문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집에서는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선우결이라면, 다를 수 있었다. 책이 틀렸다는 걸, 알려야 했다. 다른 누군가가 그 틀린 방식으로 몸을 상하기 전에.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국물은 아직 반쯤 남아 있었다. 배는 여전히 고프지 않았다. 하지만 머릿속은 이제 다른 걸로 가득 차 있었다. 문제는, 다섯 살 아이가 어떻게 선우 공작가의 인물에게 연락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편지를 쓴다 해도, 그 편지가 본채의 검열을 통과할 리 없었다. 심부름꾼을 보낸다 해도, 다섯 살짜리에게 그럴 권한이 없었다. 직접 찾아간다는 건 더 말이 되지 않았다. 제경 가문의 아이가 선우 공작가의 영지를 혼자 넘어간다는 것 자체가, 상상만으로도 우스운 일이었다. 박덕수가 쟁반을 들고 일어섰다. "더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라면 어쩌면. 아니, 아직은 아니었다. 확신 없이 그를 끌어들이는 건 위험했다. 그가 다칠 수도 있었다. "없어." "그럼 쉬십시오." 문이 닫히고 다시 방 안엔 나 혼자였다. 창밖의 눈은 그새 더 굵어져 있었다. 쌓인 눈이 창틀에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그 답을, 아직 나는 몰랐다. 하지만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 답을 찾는 동안, 이 집은 나를 점점 더 좁은 방 안으로 밀어넣을 것이었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창밖의 눈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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