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다섯 마리였다.
다행이었다. 스무 마리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다섯 마리도 충분히 많았다.
오크 한 마리의 표준 위협도는 2급 기사 하나와 맞먹는다고 왕실 마물 도감에 적혀 있었다.
다섯 마리면 2급 기사 소대 하나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소대. 그러니까 최소 다섯 명이 팀을 짜서 진형을 갖추고, 후방에 치유 마법사 하나쯤 대기시켜놓고 덤벼야 한다는 소리였다.
지금 여기 그런 게 있나?
없었다. 있는 건 낡은 짐마차 한 대, 겁먹은 노새 두 마리, 그리고 나 하나뿐이었다.
[다윗과 골리앗, 사무엘상 17장]
다윗이 골리앗 하나 잡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는데, 나는 지금 골리앗 다섯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윗한테는 돌팔매랑 신앙심이 있었지만, 나한테는 뭐가 있나.
10년 묵은 결계 보수 노하우와, 그, 서류 정리 스킬 정도?
그걸로 오크를 잡을 순 없잖아.
검을 뽑았다.
손에 익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10년 동안 결계 보수와 서류 작업만 했지, 실제로 검을 휘두른 건 오랜만이었다.
아니, 오랜만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정확히 언제 마지막으로 검을 실전에서 뽑았는지 기억도 안 났다.
왕실 훈련장에서 신참 기사들 앞에서 시범 한 번 보여준 게 마지막이었나?
그것도 시범이었지 실전은 아니었다.
괜찮을까, 나?
오크 무리가 불빛을 발견하고 으르렁거리며 다가왔다.
녀석들 눈이 어둠 속에서 노랗게 빛났다. 저게 딱 배달 오토바이 라이트 색깔이었는데, 지금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선두에 있던 오크가 도끼를 치켜들며 달려들었다.
촤악!
검이 오크의 도끼를 튕겨냈다.
생각보다 가볍게 튕겨냈다.
어라, 왜 이렇게 쉽지?
도끼라는 게 원래 이렇게 가벼운 무기였나? 아니, 저거 분명 오크 몸통만한 무쇠덩이였는데.
두 번째 오크가 옆에서 달려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몸이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다. 마치 10년치 근질거림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느낌이었다.
서걱!
오크가 그대로 쓰러졌다.
한 방에.
뭐지?
왜 이렇게 잘 되지?
설마 내가 그동안 검을 안 써서 실력이 녹슨 게 아니라, 오히려 숙성된 건가? 김치처럼?
아니 그건 좀 이상한 비유잖아.
세 번째, 네 번째 오크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나는 몸을 낮추며 검을 크게 휘둘렀다.
허리를 축으로 회전하는 동작이 마치 오래 연습한 무용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몸이 알아서 각도를 계산하고, 알아서 힘의 분배를 조절하는 느낌이었다.
쐐애액!
두 마리가 동시에 쓰러졌다.
한 번의 휘두름으로 두 마리가 정리되는 광경을, 나조차도 조금 얼떨떨하게 바라봤다.
다섯 번째 오크는 상황을 눈치챘는지 도망치려 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앞서 넷이 순식간에 나가떨어지는 걸 봤으니, 이번엔 튀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한 거겠지.
하지만 나는 무의식적으로 발밑의 흙을 박차고 그 앞을 가로막았다.
발끝에 걸리는 지면의 감촉조차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발이 땅에 닿는 시간이 평소보다 짧은 것 같았달까.
서걱!
다섯 마리, 전부 정리됐다.
걸린 시간은 채 십 초도 안 됐다.
십 초. 배달앱으로 치면 주문 확인 알림 뜨는 시간보다도 짧았다.
[욥기 41:34, 그것이 모든 높은 것을 낮추어 보며 모든 것 위에 왕이 되느니라]
왕이 되느니라는데, 지금 이거 그냥 오크 다섯 마리 잡은 건데요.
욥기 저자님, 스케일 좀 낮춰주시면 안 될까요.
숨을 몰아쉬며 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생각보다 체력이 많이 안 소진됐다.
오히려 10년 만에 몸을 제대로 쓴 게 상쾌한 느낌마저 들었다.
헬스장 안 가고 산 지 10년인데 갑자기 풀코스 웨이트를 뛴 느낌인데, 이상하게 근육통은커녕 몸이 개운했다.
짐칸 문이 살짝 열리며 김덕수 할아버지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 얼굴이 창백했다. 마치 방금 귀신을 본 사람 같은 표정이었는데, 뭐 실제로 귀신 비슷한 걸 보긴 했으니 이해는 갔다.
"...끝났는가?"
"네, 끝났습니다."
할아버지가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와 쓰러진 오크들을 둘러봤다.
발걸음이 눈에 띄게 느렸다. 마치 오크 시체가 갑자기 되살아날까 봐 경계하는 사람처럼,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주변을 살폈다.
그 얼굴이 점점 이상하게 변해갔다.
*
김덕수는 자신이 지금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오크 다섯 마리는, 그냥 오크가 아니었다.
등에 새겨진 문양을 보니, 이건 왕실 마물 도감에서 '준(準) 위험' 등급으로 분류된 개체들이었다.
작년에 개척촌 하나를 통째로 쓸어버렸던 무리와 같은 계열이었다.
그때 그 개척촌 소식을 들었을 때, 김덕수는 사흘 밤을 못 잤었다. 살아남은 생존자가 겨우 셋이었다고 했다.
그런 다섯 마리를, 눈앞의 젊은이는 십 초도 안 되는 시간에 검 한 자루로 전부 정리해버렸다.
체력 소진 하나 없이, 마치 밭에서 잡초를 뽑듯이.
아니, 잡초라는 비유도 과하다. 잡초는 뽑을 때 뿌리가 저항이라도 하지, 저 오크들은 거의 저항도 못 해보고 쓰러졌다.
김덕수는 30년 동안 이 길을 오가며 수많은 기사와 용병을 봤다.
2급 기사가 오크 한 마리를 상대하는 데도 십 분은 족히 걸렸다.
5급 이상 정예 기사단이라야 이 정도 무리를 이 정도 속도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정정하자. 김덕수가 알기로는 왕도 전체를 통틀어도 이런 속도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스스로 '기사였는데 해고당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것도 '보고서를 잘 못 써서'라는 이유로.
김덕수의 등줄기에 서늘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왕도의 어느 기사단이, 이런 실력을 가진 인재를 그런 이유로 내보냈단 말인가.
서류 하나 잘못 써서 이런 인재를 내쳤다는 게 말이 되나? 그럼 그 기사단 인사부서는 대체 뭘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건지.
아니면, 저 젊은이는 이런 실력이 있다는 것조차 스스로 모르고 있는 건가?
그게 더 무서운 가능성이었다. 자기가 뭘 가졌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휘두르고 있다는 것.
김덕수는 그동안 왕도에서 들었던 소문 하나를 떠올렸다.
근위기사단에 부단장 하나가, 국방부서와 서무부서와 재정부서와 결계관리부서를 혼자 도맡아 처리한다는 소문.
다들 그게 그저 허풍이라고 생각했다.
한 사람이 어떻게 부서 네 개를 처리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술자리에서 누가 그 얘기를 꺼내면, 다들 웃으면서 "그런 사람이 있으면 왕이 직접 상 내려야지"라고 농담을 주고받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이 젊은이가 오크 다섯 마리를 십 초 만에 정리하는 걸 본 지금, 그 소문이 갑자기 다르게 다가왔다.
허풍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왕도는, 지금 뭘 밖으로 내보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김덕수는 마차 손잡이를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
"할아버지, 왜 그렇게 보세요?"
나는 김덕수 할아버지의 이상한 표정을 눈치채고 물었다.
표정이 진짜 심각했다. 무슨 세금고지서 받은 얼굴이었다.
"어, 아니... 자네, 그... 방금 그게 뭔가?"
"오크 잡은 겁니다."
뭘 저렇게 놀라시는지 모르겠다.
원래 이 정도는 처리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결계 부서에서 야근할 때도 이 정도 집중력은 냈던 것 같은데.
[사무엘상 17:37, 여호와께서 너를 도우시기를 원하노라]
도움이랄 것도 없었다, 사실.
그냥 몸이 알아서 움직였을 뿐이다.
누가 나를 대신해 움직인 것도 아니고, 그냥 순수하게 근육 기억이 발동한 정도였다.
"자네, 원래 뭘 하던 사람이라고?"
"근위기사단 부단장이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부단장... 그냥 부단장?"
"네, 그냥 부단장입니다."
할아버지는 뭔가 더 물어보려다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다물었다.
입을 열었다 닫았다, 몇 번을 반복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다시 삼켜지는 게 눈에 보였다.
표정에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기색이 남아 있었다.
"허허... 그놈들, 자네를 왜 해고했나 몰라."
"제가 보고서를..."
"보고서는 됐고. 그냥, 왕도 놈들이 눈이 삐었구먼."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텐트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걸음걸이가 아까와는 조금 다르게, 조심스러워 보였다.
마치 내가 갑자기 폭발할지도 모르는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슬쩍 거리를 두는 느낌이랄까.
나는 쓰러진 오크들을 마차 근처에서 치우며 별생각 없이 밤하늘을 다시 올려다봤다.
별이 여전히 잘 보였다.
도시에서는 절대 이런 별을 못 봤는데, 그건 참 아쉬운 일이었다. 매일 야근하느라 하늘 볼 시간도 없었으니까.
조금 이상하긴 했다.
뭔가 몸이 예전보다 훨씬 가볍게 움직인다는 느낌.
검을 휘두를 때 힘이 거의 안 든다는 느낌.
마치 그동안 몸에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차고 다니다가, 지금 딱 벗어던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냥 10년 만에 제대로 몸을 쓴 상쾌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이 원래 오래 안 하던 걸 다시 하면 오히려 더 잘 되는 그런 경험 다들 있잖아. 나도 그런 거겠지.
[전도서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지금은 형통한 날이니까,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전도서 저자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오늘은 그냥 기뻐하자.
다음 날 아침, 마차는 다시 출발했다.
아침 공기가 유독 차가웠다. 입김이 하얗게 나오는 걸 보며, 오늘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을 했다.
김덕수 할아버지는 어제보다 훨씬 말이 없었다.
대신 가끔씩 나를 힐끔거리는 시선이 늘었다.
그 시선이 뭔가 계산하는 듯한, 재는 듯한 눈빛이었다. 마치 부동산 시세 확인하는 사람처럼.
"할아버지, 어디 아프세요?"
"아니, 아냐. 그냥... 생각이 많아서 그래."
마차는 계속 흙길을 달렸고, 앞으로 마의 숲까지는 이틀이 더 남아 있었다.
이틀이라니. 그 이틀 동안 또 뭐가 튀어나올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왕도에서는 지금쯤 결계가 얼마나 흔들리고 있을지, 나는 여전히 전혀 모른 채, 창밖의 풍경을 편안하게 감상하고 있었다.
논밭이 지나가고, 작은 개울이 지나가고, 저 멀리 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 언덕이 지나갔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너무 평화로워서 오히려 불안했다면 그건 너무 앞서가는 걸까.
그런데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뭔가 검은 그림자 같은 게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그림자의 크기가, 오크 무리보다 훨씬 큰 것 같았는데.
다시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기분 탓이었을 것이다.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