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레벨99, 해고당했습니다

2화

웃음이 나왔다. 진짜로. 해고 통지서를 손에 쥔 채, 나는 사무실 한가운데서 실실 웃고 있었다. 지나가던 신입 기사가 그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라 도망갔다. 뭐, 이해한다. 방금 해고당한 사람이 낄낄대고 있으면 무섭겠지. 나 같아도 도망갔을 거다.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은 해야 되는데 왜 자꾸 웃음이 나오죠. 목사님, 이거 저 불경한 겁니까. 생각해보면 이상할 게 없었다. 10년 동안 나는 하루 평균 4시간을 잤다. 식사는 서류를 보면서 대충 씹어 삼켰다. 어느 날은 결계 보수 도면을 보면서 김밥을 먹다가 김밥이 아니라 도면을 씹어 넘긴 것 같은 기분이 든 적도 있었다. 연애? 그런 걸 할 시간이 있었으면 진작 결계 보수를 다른 사람한테 맡겼을 것이다. 친구도 몇 없었다. 다들 내가 야근하는 사이 결혼하고 애 낳고 살고 있었다. 작년에 청첩장 받은 게 세 통이었는데, 세 곳 다 축의금만 보내고 못 갔다. 결계 균열 보수랑 결혼식 시간이 겹쳤다는 게 말이 되나. 근데 됐다. 근위기사단에서는 그게 말이 됐다. 그런데 지금, 이 종이 한 장으로 그 모든 게 끝났다. 끝났다고? 진짜로? 나는 손에 든 종이를 다시 확인했다. [해고 통지서] 글자는 여전히 선명했다. 환각이 아니었다. 심지어 단장 직인까지 또렷하게 찍혀 있었다. 설현우, 이 양반 도장 찍을 때는 손이 안 떨렸나 보다. "저... 부단장님?" 뒤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신입 기사 박서준이었다. 입단한 지 두 달째, 아직 결계 보수도 서투른 애송이. 저번 주에는 결계 매듭을 반대로 묶어서 마물 세 마리를 왕도 코앞까지 들여보낼 뻔했다. 그날 내가 밤새 재보수를 했다. 그런 기억이 다 무슨 소용인가, 지금. "부단장님 아니고 이제 그냥 진하람입니다." "네? 그게 무슨..." 나는 해고 통지서를 흔들어 보였다. 박서준의 눈이 통지서를 읽더니 접시만큼 커졌다. 저러다 눈알 빠지겠다. "이, 이거 진짜입니까? 단장님이 부단장님을 해고했다고요?" "그러네요." "아니 그럼 결계는요? 재정은? 순찰 배치는?" 성실한 질문 세 개가 연달아 날아왔다. 안타깝지만 나는 이제 그 셋 중 어느 것에도 답할 의무가 없는 사람이었다. [요한복음 14:27, 내가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평안이라는 게 이런 느낌인가. 남 일처럼 걱정하는 박서준을 보면서,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이제 단장님이 알아서 하시겠죠." "부단장님...!" 박서준의 목소리에 절박함이 섞였다. 눈에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니 얘야, 네가 울면 내가 더 이상해진다. 하지만 나는 이미 마음이 저 멀리 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마의 숲 근처 어느 이름 없는 언덕까지. 숙소로 돌아가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해봤자 별거 없었다. 검 한 자루, 갑옷 한 벌, 몇 벌 안 되는 사복, 그리고 최영도 전 단장님이 은퇴하실 때 선물로 주신 낡은 반지 하나. 서랍을 열자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10년째 한 방에 살면서 서랍 청소 한 번 안 했다는 게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사니까 해고를 당하지, 하는 생각이 스쳤다가 곧 지워졌다. 아니, 해고당한 이유는 딴 데 있었다. 있을 텐데. 정확히는 나도 잘 모른다.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봤다. 딱 맞았다. [최영도 님이 진하람에게: 힘들 때 이걸 보고 힘내라]고 카드에 적혀 있었는데, 사실 이 반지는 그냥 마력 저장 아이템이었다. 힘내라는 말 대신 아이템을 주다니, 그것도 참 최영도 단장님답다. 그 양반은 은퇴식장에서도 눈물 한 방울 없이 마력측정기로 후배들 자세 교정을 해줬던 사람이었다. 낭만이라는 개념 자체가 탑재 안 된 인간. 그런데 왜 지금 이 반지를 보니까 코끝이 좀 찡한 건지. 농담이다. 방금 먼지 냄새를 좀 세게 맡아서 그렇다. 짐을 다 싸고 나니 배낭 하나 분량이었다. 10년치 인생이 배낭 하나라니, 좀 서글프기도 했다. 하지만 그 서글픔보다 더 큰 감정이 마음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자유. 그래, 이게 자유였다.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좋은 말씀이다. 근데 방금까지 내가 메고 있던 게 딱 그 멍에 아니었나. 심지어 그 멍에에는 초과근무수당도 안 붙었다. 차라리 노동청에 신고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지금 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왕도 밖으로 향하는 길에, 마의 숲 쪽 변경 지역을 떠올렸다. 왜 거기가 갑자기 떠올랐는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어릴 때부터 지도에서 그 지역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었다. 인적이 드물고, 마물이 좀 있지만, 관리할 사람도 없고, 서류도 없고, 결계 보수 요청도 안 올 것 같은 곳. 지도상으로 보면 딱 시골 매물 사진 같은 느낌이었다. "한적한 전망, 자연친화적 환경, 즉시 입주 가능." 물론 매물 설명에 "야간에 마물 출현 잦음" 같은 문구는 안 붙어 있었지만, 그런 디테일까지 신경 쓸 여유는 지금 없었다. 딱이었다. 숙소를 나서는데 복도에서 다른 기사들과 마주쳤다. 다들 표정이 심각했다. 장례식장 조문객들 같은 표정이었다. 내가 죽은 것도 아닌데. "부단장님, 정말 가시는 겁니까?" "이제 부단장 아니라니까요." "그럼 결계는 누가..." "그거 제 담당이 아닙니다." 나는 최대한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다들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왜 저러지, 걱정할 필요 없는데. 결계 보수는 원래 여러 명이 팀으로 하는 일이다. 내가 없어도 어떻게든 되겠지. 설마 10년 동안 나 혼자 다 했다는 게 말이 되겠나. ... 말이 됐다. 정확히는 나 혼자 반, 나머지 인원 전체가 나머지 반을 나눠서 했다. 그래서 다들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였다. 아, 이제 알겠네. 그래도 뭐, 이미 늦었다. 직인 찍힌 종이는 이미 내 손에 있으니까. [시편 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자지도 아니하시리로다] 난 이제 졸기도 하고 자기도 할 거다. 마음껏. 필요하면 낮잠도 두 번씩 잘 거다. 아무도 나한테 결계 상태 보고서를 요구하지 않을 테니까. 왕도 정문을 나서면서 뒤를 돌아봤다. 첨탑 위로 보이는 근위기사단 건물이 아침 햇살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10년을 보낸 곳인데, 이상하게 아무 감정도 안 들었다. 정문 경비병이 나를 알아보고 살짝 목례를 했다. 나도 답례로 고개를 숙였다. 그게 끝이었다. 드라마틱한 이별 장면 같은 건 없었다. 그냥 문을 하나 지나쳤을 뿐인데, 10년이 그렇게 뒤에 남았다. [전도서 1:11,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리니] 좀 냉정한 말씀이긴 한데, 지금 심정이랑 딱 맞아서 인용해봤다. 마부에게 마차 요금을 물어보고, 변경 쪽으로 가는 노선을 확인했다. 왕도에서 마의 숲까지는 나흘 걸린다고 했다. "손님, 그쪽으로 가는 마차가 오늘 오후에 하나 있는데, 자리 있으신가요?" "네, 있으면 주세요." 간단했다. 인생 최대의 전환점이 이렇게 간단하게 성사된다는 게 신기했다. 결계 보수 하나 승인받으려면 서류 세 장에 도장 다섯 개가 필요했는데, 인생을 갈아엎는 데는 동전 몇 개면 충분했다. 이게 맞나? 마차를 기다리는 동안 근처 노점에서 빵을 하나 사 먹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서두르지 않고 먹는 식사였다. 빵집 주인이 "천천히 드세요"라고 말했는데, 그 말이 왜 그렇게 낯설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천천히 먹으라는 말을 들은 게 언제였더라. 기억이 안 났다. 눈가가 촉촉해졌다. 농담이다. 빵이 너무 뜨거워서 그랬다. 오후가 되자 마차가 도착했다. 낡은 짐마차였다. 바퀴 하나가 살짝 삐뚤어져서 덜컹거릴 때마다 특이한 소리를 냈다. 끼익, 끼이익. 꼭 누가 옆에서 계속 문 여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마부가 짐칸 문을 열어줬고, 안에는 이미 한 사람이 타 있었다. "어이구, 젊은 양반, 여기 타시게." 허리가 살짝 굽은 노인이 손을 흔들며 나를 반겼다. 짐칸에는 이런저런 상자와 자루가 가득했다. 상인인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인사를 하며 마차에 올라탔다. "어디까지 가시는가?" "마의 숲 변경 쪽으로 갑니다." 노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거긴 뭐 하러? 위험한 곳인디." "쉬려고요." 노인은 잠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뭔가 이상하게 여기는 눈치였지만, 곧 껄껄 웃었다. "허허, 재밌는 양반이구먼. 나는 김덕수라고 하네. 상인이여." "진하람입니다." "근위기사단 갑옷 같은디, 그건 왜 들고 있는 거여? 은퇴한 겨?" "비슷합니다." "허허, 그 나이에 은퇴라니 대단하구먼." 굳이 해고당했다고 정정하지는 않았다. 은퇴나 해고나 결과는 같으니까. 월급이 안 나온다는 점에서. 마차가 덜컹거리며 출발했다. 왕도가 서서히 뒤로 멀어졌다. [출애굽기 14:13,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두려울 게 없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참 마차가 흔들리는 동안, 김덕수 할아버지가 나에게 육포를 하나 건넸다. "먹어, 왕도 밖은 배 곪으면 답 없어." "감사합니다." 육포는 좀 짰지만 씹을수록 고소했다. 할아버지는 자기가 파는 물건들을 하나씩 자랑하기 시작했다. 마의 숲 근방 마을에 가져다 팔 소금, 향신료, 그리고 이상하게 생긴 부적 몇 장. "이건 뭡니까?" "아, 그거? 마물 퇴치용 부적이여. 근디 효과는 잘 모르겠어. 팔릴 때마다 웃음만 나." 효과가 의심스러운 부적을 팔면서도 저렇게 태연할 수 있다니, 이 사람도 어떤 의미에선 나만큼 뻔뻔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동질감이 좀 느껴졌다. 육포를 씹으며,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푸른 들판이 펼쳐지고 있었다. 왕도의 서류 더미도, 설현우 단장의 짜증도, 이제 다 저 뒤편에 남아 있었다. 멀어질수록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렇게 쉬운 거였나. 10년 동안 왜 이 쉬운 걸 못 했을까. 근데 왕도 쪽에서 뭔가... 이상한 진동이 느껴진 것 같기도 했다. 기분 탓이겠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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