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날 밤, 나는 리나를 여관 뒷마당 구석으로 데려가 조용히 앉혔다.
여관비를 아끼려 방을 못 잡은 처지라 뒷마당 나무 밑에서 지내는 게 그날의 숙소였다. 낡은 벤치 하나, 삐걱거리는 우물 하나, 그리고 하늘 가득 박힌 별들. 로맨틱한 배경이라고 우겨볼 수도 있었지만, 실상은 그냥 돈이 없어서 노숙하는 거였다.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밤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왔다. 낮의 열기가 가시고 서늘한 공기가 목덜미를 스치자, 나는 무심코 팔을 문질렀다. 리나는 여전히 벤치 끝에 붙어 앉아 나와의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사슬은 풀어줬지만, 마음의 사슬은 아직 그대로인 듯했다.
"할 말이 있어."
리나는 여전히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방금 밥값이라며 사들인 노예 주인이 뭔가 심각한 얘기를 하려 하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저 눈빛, 딱 '이제 또 뭘 시키려고'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걸 말해야 하나. 이세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원래 세계에서는 학사모를 던지다가 유성에 맞아 죽었다는 걸, 이 말을 들으면 리나가 나를 완전히 미친놈으로 보지 않을까.
머릿속으로 온갖 시뮬레이션이 돌아갔다. 첫 번째 시나리오, 리나가 벌떡 일어나 도망친다. 두 번째 시나리오, 리나가 나를 정신병자로 취급하며 거리를 둔다. 세 번째 시나리오, 리나가 그냥 아무 반응도 없이 밥이나 더 달라고 한다.
셋 다 별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냥 말하고 싶어졌다. 이 낯선 세계에서 처음으로 뭔가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생겼다는 사실이, 나를 이상하게 솔직하게 만들었다. 혼자 짊어지던 비밀을, 누군가에게 나눠 지우고 싶은 그 마음.
"나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니야."
리나의 귀가 쫑긋 섰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지만, 눈동자만은 확실히 흔들렸다.
"다른 세계에서 살다가, 죽어서 여기로 온 것 같아. 정확한 원리는 모르겠는데, 원래 세계에서 나는 그냥 평범한, 아니 평범보다도 좀 더 불운한 사람이었어. 뭐만 하면 항상 재수가 없었지. 시험 보는 날 배탈 나고, 소개팅 나가는 날 비 맞고, 취업 면접 날 지하철 고장 나고. 그런 놈이었어."
말을 뱉으면서 나도 새삼 놀랐다. 그 짧은 문장들 안에 압축된 불행의 역사가 얼마나 긴지. 백과사전 한 권으로도 다 못 담을 분량이었다.
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표정에는 여전히 의심이 반, 흥미가 반쯤 섞여 있었다.
"그런데 여기 와서 이 스킬을 받았는데, 다들 저주라고 해. 밥이나 만드는 쓸모없는 능력이라고. 근데 아까 너한테 먹였을 때 뭔가 다른 일이 벌어졌잖아. 그게 우연이 아닌 것 같아."
리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 스킬…… 저한테 먹였을 때 힘이 폭발적으로 올랐어요. 검술 기프트가 원래 있었는데, 배가 고파서 제대로 못 썼거든요. 근데 그 국을 먹으니까 몸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리나는 그 순간을 떠올리는 듯 자기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그 폭발적인 힘의 여운이 손끝에 남아있는 것처럼.
"뻐근하던 근육이 갑자기 가벼워졌어요. 늘 배 속에서 뭔가가 갉아먹는 느낌이었는데, 그게 사라지니까 몸이 제 몸 같지가 않더라고요."
"그러니까 내 생각은 이거야. 대식 디버프를 가진 사람들한테는, 이 미소국이 그냥 밥이 아니라 뭔가 특별한 촉매 같은 게 되는 거 같아. 남들 눈에는 짐덩이인 그 디버프가, 사실은 폭발적인 힘의 원천이었던 거지. 그걸 풀어주는 열쇠가 이 국이고."
리나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처음의 경계심 위로 뭔가 다른 감정이 겹쳤다. 기대, 혹은 그 비슷한 것.
"확실해요? 그냥 한 번의 우연일 수도 있잖아요."
정말 우연일까?
나도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봤다. 확률적으로 따지면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 안에서 뭔가가 확신하고 있었다. 이건 우연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원래 세계에서 배운 게 있다면, 패턴이 두 번 이상 반복되면 그건 우연이 아니라 규칙이라는 것.
"확실하지는 않지. 근데 확인해볼 방법은 있어."
"어떻게요?"
"너 말고 또 다른 대식 디버프 가진 애를 찾아서 먹여보는 거야. 만약 그 애도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면, 그건 우연이 아니라 확실한 법칙이 되는 거지."
"그러면…… 저처럼 대식 디버프 가진 애들이 노예시장에 더 있을까요?"
좋은 질문이었다. 사실 나도 그걸 생각하고 있었다.
노예시장의 그 우울한 풍경이 다시 떠올랐다. 팔리지 않는 대식 디버프 노예들. 마른 몸에 퀭한 눈. 배는 계속 고픈데 그 누구도 사려 하지 않는 그 애들. 헐값으로도 안 팔려서 결국 시장 구석에 방치되는 존재들.
"많을 거야. 대식 디버프는 다들 쓸모없다고 여기니까 헐값에 팔리겠지. 그런 애들을 모아서 이 국을 먹이면……"
"군대가 되겠네요."
리나의 말이 정확했다. 나는 그 순간 이상한 흥분을 느꼈다. 심장이 두근거렸고, 손끝이 저릿했다.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훑고 지나갔다.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확실한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시스템의 유일한 열쇠였다.
머릿속으로 그림이 그려졌다. 헐값에 팔린 대식 디버프 노예들이 한 명씩, 한 명씩 내 국그릇 앞에 앉는다. 국을 한 술 뜨고, 폭발적으로 각성한다. 그 폭발이 열 명, 스무 명이 되면. 그건 더 이상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조직의 힘이 된다.
"돈이 문제네요." 리나가 현실적인 부분을 짚었다. "저 사는 데도 전 재산 썼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지금 내 수중에 남은 돈은 동화 몇 십 냐 수준이었다. 노예를 더 사려면 자금이 필요했다.
나는 주머니를 뒤졌다. 짤랑거리는 동화 몇 개가 손끝에 걸렸다. 이걸로 뭘 할 수 있을까. 술 한 병도 겨우 살 돈이었다.
"이걸로는 어림도 없겠네."
"당연하죠."
"그러면 일단 너부터 훈련시켜서 의뢰를 받자. 몬스터 토벌 의뢰. 슬라임보다 좀 더 어려운 걸로. 상금 받아서 자금 모으고, 그 돈으로 다른 애들을 사는 거야."
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주 살짝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는 건지 아닌지 헷갈리는 미묘한 표정이었지만, 나는 그게 리나의 첫 신뢰 표현이라는 걸 느낌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미묘한 표정 하나에,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지금까지 이 세계에서 만난 사람들 중 누구도 나를 이렇게 바라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은 무시하거나, 조롱하거나, 혹은 이용하려 들었지. 그런데 리나는 지금, 아주 조금이지만 나를 동료로 인정하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름을 정해야겠어요."
"뭐를?"
"우리 같은 사람들 모아서 뭔가 하려면, 이름이 있어야죠. 그냥 이도현 님이랑 저, 이렇게 다니면 아무도 안 믿어줄 거예요."
리나의 말이 맞았다. 조직이라는 게 이름도 없이 굴러가면,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냥 부랑자 무리로 보일 뿐이다. 이름이 있어야 신뢰가 생기고, 신뢰가 있어야 의뢰도 받을 수 있고, 의뢰를 받아야 돈도 벌 수 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뭔가 그럴싸한 이름이 필요했다.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화려한 이름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불꽃의 기사단, 은빛 검객단, 여명의 별동대. 하나같이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내 입에서 나온 건 훨씬 소박한 단어였다.
"주둔기사단."
"주둔기사단?"
"그래. 한곳에 자리 잡고, 서로를 지키면서 커지는 거야. 화려하지 않아도 돼. 그냥 단단하게."
리나는 잠시 그 이름을 곱씹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요. 화려한 이름보다, 오래 갈 수 있는 이름이 나은 것 같아요."
"그렇지."
우리는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다. 밤바람이 다시 불어왔고, 저 멀리서 여관 안쪽에서 술 취한 손님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이 순간만큼은, 그 모든 소음도 멀게 느껴졌다.
그날 밤 우리는 그렇게 이름 없던 두 사람에서, 이름을 가진 조직의 시작으로 바뀌었다. 초라한 뒷마당, 부족한 자금, 그리고 단 두 명뿐인 인원. 누가 봐도 초라한 시작이었지만, 나는 그 순간 확실히 느꼈다. 이건 시작일 뿐이고, 이 시작이 어디까지 커질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그런데 나는 아직 몰랐다. 이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내 몸이 이 능력의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