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왕도 전체가 어둠에 잠긴 밤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는 불빛 한 점 없이 죽은 듯 고요했고,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무섭게 느껴졌다. 정전이 아니라 마력이 끊긴 거니까. 촛불이라도 켜야 하는데, 그마저도 학원 안 인화성 마도구들 때문에 조심스러웠다.
학원 회의실에 모인 사람은 나, 소율, 오정한, 그리고 화상 치료를 마치고 붕대를 감은 강태오였다. 넷이 앉기엔 넓은 회의실이 유독 텅 비어 보였다. 조필상은 급한 왕궁 회의에 불려 갔다는데, 아마 이 사태 책임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지 궁리하고 있을 게 뻔했다. 그 인간이라면 지금 이 시간에도 자기 이름이 사고 기록에서 빠지는 방법을 찾고 있을 거다.
"한 교수, 가슴에 있는 그 표식이 뭔지 알아냈나?"
오정한이 다급하게 물었다. 나는 셔츠 앞섶을 슬쩍 열어 표식을 확인했다. 룬 문자 세 개가 옅게 빛나며 살갗에 새겨져 있었다. 낮보다 밤에 더 선명하게 빛나는 걸 보니, 이 표식도 뭔가 주변 마력 농도에 반응하는 모양이었다.
"이건 영맥 관리 권한 문자입니다. 삼십 년 전 설계자들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만든 것 같습니다. 시스템이 완전히 멈추면, 누군가에게 강제로 관리 권한을 넘기는 구조인 거죠."
"그래서 그게 자네에게 붙은 거군."
"제가 이 학과에서 가장 오래, 그리고 유일하게 원리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시스템 입장에서는 그게 조건이었을 테고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거 완전 뽑기잖아. 하필 왜 나야. 시스템도 사람 가려서 뽑나.
"그럼 자네가 영맥을 되돌릴 수 있다는 거지?"
"권한은 있습니다. 하지만 힘이 부족합니다."
왕국 전역의 마력 관로를 다시 활성화하려면 그만큼의 마력을 룬석판에 흘려 넣어야 했다. 나 혼자 가진 마력으로는 학원 정문 인식석 하나 켜는 것도 벅찼다. 권한만 있고 실력이 없는 관리자라니, 이건 무슨 사장 자리 앉혀놓고 통장은 비게 만드는 짓이었다.
"그럼 누가 도와야 하나. 궁정 마술사들을 부르면···."
강태오가 헛기침을 하며 손을 들었다. 붕대 감은 손이라 그 동작이 유난히 부자연스러웠다.
"저···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습니다."
"왜지?"
"솔직히 말하면, 궁정 마술사 대부분이 영맥 없이는 지팡이도 못 씁니다. 저부터가 그랬으니까요."
부끄러운 고백이었지만 정직했다. 최소한 이 사람은 사고 이후로 어느 정도 겸손해진 모양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기가 왕국 최고 마술사라고 떠들던 걸 생각하면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럼 방법이 없다는 겁니까?"
오정한이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나만 초조한 게 아니었다.
소율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저는요?"
모두의 시선이 소율에게 쏠렸다. 강태오는 반사적으로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고, 오정한은 뭔가 기대하는 눈치였다.
"소율아, 넌 영맥 적성이···."
"영맥 적성이 없다는 거지, 마력이 없는 건 아니잖아요. 교수님이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는데요."
생각해보니 그랬다. 소율은 룬을 직접 그려서 의도를 새겨 넣는 방식으로 마법을 부려왔다. 영맥의 도움 없이. 그 말은 지금 이 상황에서 오히려 그녀가 자동마법 엘리트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뜻이었다. 아이러니했다. 늘 열등생 취급받던 게 오늘은 유일한 무기가 됐다.
"교수님, 저 룬석판에 마력을 흘려 넣는 거면··· 제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위험해. 아직 훈련이 부족해."
"그럼 지금 다른 대안이 있으세요?"
없었다. 말이 안 나왔다. 강태오도 붕대 감은 손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이 방 안에서 유일하게 대안이 될 만한 인간이 그 대안을 물어보고 있었으니 대답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오정한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시간이 없네. 왕궁에서도 곧 특별 대책반이 소집될 거야. 그때까지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이 학과가 아니라 이 나라 전체가 무너질 판이야."
특별 대책반이라는 말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 대책반이 오면 제일 먼저 조사받을 사람이 나라는 건 뻔했다. 표식이 새겨진 몸으로 도망갈 곳도 없었다.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율아, 잘 들어. 룬석판에 마력을 넣을 때는 절대 서두르지 마. 네 안의 확신을 그대로 흘려보내는 거야. 두려움이나 욕심이 섞이면 마력이 폭주할 수 있어."
"네."
"강 마술사장님이 아까 겪었던 것처럼 될 수도 있다는 거야. 각오해."
강태오가 그 말에 자기 붕대를 슬쩍 내려다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본인이 산 증인이니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소율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 나를 똑바로 봤다. 그 눈에는 두려움보다 오히려 묘한 결기 같은 게 서려 있었다.
"교수님이 옆에 계시잖아요."
그 말에 뭔가 대답하려 했는데, 이상하게 말이 잘 안 나왔다. 목 안쪽이 뻑뻑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는 지하 관리소로 내려갔다. 계단을 밟을 때마다 발밑에서 먼지가 부스스 일었다. 이곳이 바로 결의안 제7조에 언급된, 유물을 이송하려던 그 장소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그 유물이 왕국을 구할 유일한 방법이 됐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폐기 대상으로 회의록에 오르던 물건이 오늘은 왕국의 명줄이라니, 이런 게 관료제의 묘미인가 싶었다.
관리소 중앙에 낡은 룬석판이 놓여 있었다. 삼십 년 전 설계자들이 남긴 원본 각인이었다. 표면은 세월에 닳아 거의 매끈해졌지만, 그 사이사이 새겨진 문자들은 여전히 흐릿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소율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얹었다. 그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겁이 안 나면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넌 이 학원 정예 학생이 아니라, 영맥 재건의 핵심 인력이야. 실수하면 나라 전체가 흔들려. 부담스러워도 참아."
"교수님도 참 위로를 못 하시네요."
"위로가 아니라 사실을 말한 거야."
소율이 피식 웃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손끝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촛불 정도의 여린 빛이었다. 관리소 안 공기가 조금씩 데워지는 게 느껴졌다. 오정한과 강태오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숨을 죽인 채 지켜봤다.
아직은 괜찮았다.
그런데 그 빛이 서서히 커지면서, 예상보다 훨씬 강한 진동이 관리소 전체를 울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놓인 낡은 도구들이 저절로 흔들리며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벽에 붙은 조명 마도구 몇 개가 켜지지도 않은 채 깨졌다.
"교수님, 뭔가 이상해요. 제 안에서 뭔가 자꾸···."
소율의 목소리가 떨렸다. 손끝의 빛이 통제를 벗어나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건 훈련 부족으로 생기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뭔가 다른 힘이 그녀의 마력을 잡아먹듯 끌어당기고 있었다.
"소율아, 침착해! 확신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흘려보내!"
"안 돼요, 이거··· 제가 아니라···."
소율의 눈동자가 순간 새하얗게 변했다. 동공도 홍채도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눈 전체가 텅 빈 백지처럼 변해버렸다.
관리소 전체가 눈부신 빛에 휩싸였고, 나는 그 빛 속에서 소율의 몸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오르는 걸 봤다. 무게가 사라진 것처럼, 그녀의 몸이 마치 실에 매달린 인형처럼 허공에서 흔들렸다.
이건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다.
내가 뛰어가 손을 뻗었지만, 빛의 막이 손끝을 튕겨냈다. 뭔가 보이지 않는 벽이 나와 소율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다. 오정한이 뒤에서 뭐라 외쳤지만 진동 소리에 섞여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룬석판에 남아 있던 마지막 각인 하나가 완전히 사라지면서, 관리소 바닥 전체가 갈라지듯 새로운 빛의 문양을 그려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