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계곡 낚시터에서 미끄러진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발밑이 훅 꺾이던 감각, 차가운 물살이 목까지 차오르던 순간. 숨이 턱 막히고, 시야가 흐려지고, 그다음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게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눈을 뜨니 나는 이도현이었다.
열일곱 살. 은늑대족과 고양이인족과 엘프의 피가 뒤섞인 소년. 귀는 뾰족했고 눈동자는 금빛으로 빛났다. 손끝으로 얼굴을 더듬으며 처음엔 이게 꿈이라고 생각했다. 꿈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며칠이 걸렸고, 이 삶에 완전히 익숙해지기까지는 삼 년이 걸렸다. 이제는 안다. 이게 내 현실이라는 걸. 낚시터의 기억도, 전생의 이름도 이제는 흐릿한 사진첩 속 한 장면처럼 멀게 느껴진다.
"도현. 오늘은 늦지 마."
어머니 김미란이 부엌에서 나를 불렀다. 고양이인족 특유의 아름다운 눈매가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국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된장 비슷한 냄새인데, 이 세계 특산 향초가 들어가서 조금 더 쌉싸름했다.
"네, 어머니."
대답은 순했다. 속으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질풍창의 첫 실전 임무 날이었다. 삼 년 동안 약초나 캐고 잡일이나 하다가, 드디어 파티 이름에 걸맞은 일을 하게 되는 날.
식탁에 앉자 마력이 낮다는 게 이 세계에서 얼마나 치명적인 약점인지 다시금 체감했다. 생활마법조차 겨우 쓰는 수준. 형 이태민은 그것마저 안 되니까 나를 볼 때마다 이를 갈았다. 마력 8인 태민의 눈빛이 아침부터 따가웠다.
"넌 좋겠다. 마법도 되고."
태민이 툭 던졌다. 숟가락을 국그릇에 부딪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형, 그런 뜻 아니잖아."
"알아. 알아서 더 짜증나."
식탁 위 분위기가 잠깐 얼어붙었다. 아버지 이근수는 못 본 척 에일 잔을 들었다. 아침부터 에일이라니, 이 집 가장은 참 마이페이스다. 큰형 이준서는 웃음으로 넘겼다. 저 형은 뭐든 웃음으로 넘긴다. 심각한 건 자기 담당이 아니라는 듯이. 누나 이하은만이 나를 흘깃 보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넘어가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 신호를 받아들여 국을 한 숟갈 떴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딱 먹기 좋은 온도였다.
집을 나서며 생각했다. 이 세계엔 마법이 있고, 스킬이 있고, 시스템이 있다. 그리고 나만 아는 비밀이 있다. [연습 차원의 스킬 습득] — 처음 발견했을 때는 놀랐다. 실전에서 쓰지 않은 동작이나 마법을, 머릿속 가상의 공간에서 반복하면 진짜처럼 익숙해지는 능력. 처음엔 사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금 써보니 알았다. 이건 사기가 아니라 그냥 시간을 버는 능력이었다. 남들이 몸으로 부딪히며 익히는 걸, 나는 머릿속에서 미리 겪는 것뿐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할 이유가 없었다. 말하는 순간 뭔가 귀찮은 일이 생길 게 뻔했으니까.
질풍창의 아지트는 마을 외곽 창고를 개조한 곳이었다. 나무 문에 붙은 낡은 팻말이 바람에 삐걱거렸다. 문을 열자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어이, 약초맨."
최민재가 검을 손질하며 웃었다. 기름 먹인 헝겊이 검날을 따라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도 약초 캐러 가는 거 아니지?"
배진우가 활시위를 확인하며 물었다. 시위를 당겨보고 놓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오늘은 진짜 임무예요."
내가 대답하자 오형준이 콧방귀를 뀌었다.
"화력이 부족한 놈이 낄 자리는 여전히 뒤쪽 아니냐?"
오형준은 마력 47의 화염마법사였다. 파티 이름 '질풍창'도 자기가 지었다고 매번 자랑했다. 저 자랑 벌써 열 번은 넘게 들은 것 같은데.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할 가치가 없었다. 대신 창고 구석에 세워진 낡은 목검 하나를 눈으로 훑었다. 저건 내가 쓸 물건이 아니다. 오늘은 진짜 무기를 쥐어야 하는 날이니까.
리더 강태오가 단창을 어깨에 걸치며 들어왔다. 그의 눈빛은 평소보다 무거웠다. 걸음걸이도 조금 달랐다. 평소엔 어깨에 힘을 빼고 걷는 사람인데, 오늘은 등이 곧게 서 있었다.
"오늘은 특별한 임무다."
그가 지도를 펼쳤다. 숲 깊은 지역, 평소 순찰 구역보다 훨씬 안쪽이었다. 지도 위에 그려진 붉은 선이 낯선 경계를 표시하고 있었다.
"의뢰 내용은 이상 현상 조사. 나무꾼들이 사라졌다는 신고가 들어왔어."
윤성민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단순 실종이면 우리 등급으론 과한 임무 아닙니까."
"그래서 신중하게 가는 거다."
강태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 눈빛, 뭔가 결정을 내린 사람의 눈빛이다.
"도현, 오늘 네가 최전선을 맡아라."
창고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검을 손질하던 손도, 활시위를 만지던 손도 멈췄다. 오형준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쟤가요? 약초 캐던 애가?"
목소리에 노골적인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익숙한 반응이다. 익숙해서 더 짜증나는 반응이기도 했다.
"뭔가 근거가 있으신 겁니까."
조현수가 차분하게 물었다. 정찰수답게 감정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저 사람은 늘 저런 식이다. 화도 안 내고 비웃지도 않고, 그냥 사실만 확인한다.
강태오는 서두르지 않고 대답했다.
"도현이 지난달 훈련에서 위험 감지 반응이 제일 빨랐다. 그게 이유다."
속이 뒤틀렸다.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훈련에서 반응이 빨랐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감각을 강화하는 능력을 몰래 써서였다. 후각과 청각을 조금씩 예민하게 만드는 그 능력을 들키지 않게 조절하는 게 얼마나 신경 쓰이는 일인지 아무도 몰랐다. 매번 반응 속도를 절반쯤 죽여서 표현해야 했다. 너무 빠르면 의심받고, 너무 느리면 쓸모가 없어 보이니까.
"제가 최전선을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목이 조여든 느낌이었다.
"부담스러우면 지금 말해."
강태오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 말투에는 시험하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 저건 그냥 배려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시험 항목에 들어가 있는 게 분명했다.
윤성민이 내 옆으로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내가 보호자로 붙을 거야. 걱정 마."
윤성민의 단창 실력은 파티에서도 인정받는 편이었다. 그 말에 조금 안심이 됐다. 조금.
"알겠습니다."
대답은 짧았다. 속으로는 수십 가지 생각이 스쳤다. 이건 그냥 시험일까, 아니면 다른 뭔가일까. 강태오의 눈빛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저 사람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삼 년을 지켜본 감으로 알 수 있었다.
출발 준비를 하며 창밖을 봤다. 하늘은 맑았다. 너무 맑아서 오히려 이상했다. 이런 날 사고가 난다. 전생에서도 그랬다. 낚시터에 가던 날도 하늘이 딱 이렇게 맑았었다.
숲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낯선 냄새가 섞여 있었다. 풀냄새도 아니고 짐승 냄새도 아니었다. 뭔가 썩어가는, 그러면서도 차가운 냄새. 상한 고기 냄새와 얼음창고의 냄새를 섞으면 이런 냄새가 날까. 표현할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코를 킁킁거리다 멈췄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이 감각을 들키면 곤란해진다. 지금까지 잘 숨겨온 걸 오늘 망칠 이유는 없었다.
"뭐 해, 안 가?"
최민재가 나를 불렀다. 벌써 창고 밖으로 나가 있었다.
"가요."
대답하며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오형준이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괜히 사고나 치지 마라."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못 들은 척 걸음을 옮겼지만, 그 말이 뒷목에 박힌 가시처럼 남았다.
숲으로 향하는 길, 나는 그 이상한 냄새를 다시 떠올렸다. 훈련장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종류였다. 짐승도 몬스터도 아닌, 뭔가 다른 것. 뭔가 잘못됐다는 직감이 목덜미를 스쳤다.
발밑의 흙길이 점점 습해지고, 나무들 사이의 그늘이 점점 짙어졌다. 새소리도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았다. 평소 순찰길이었다면 최소한 새 울음소리 하나쯤은 있어야 정상인데.
윤성민이 옆에서 걸으며 낮게 물었다.
"긴장했냐?"
"조금요."
"그럴 만해. 나도 첫 최전선 때 오줌 지릴 뻔했으니까."
농담이었지만 웃을 여유가 없었다. 그 순간 다시 그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까보다 진했다. 확실히 우리가 그 근원지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오늘의 임무는 단순한 실종 조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걸음을 옮길수록 점점 짙어졌다. 그리고 나는, 그 짙어지는 확신 속에서 강태오가 왜 하필 오늘 나를 최전선에 세웠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알고 싶지 않다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