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예정된 파멸, 마검 소환

3화

그날 이후로 아버지는 며칠간 유독 조용했다. 평소라면 저녁마다 마물 이야기를 늘어놓느라 시끄러웠을 사람이 밥상 앞에서도 말없이 나만 힐끔거렸는데, 나는 그 시선이 뭘 의미하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는 그날 정원에서 있었던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숟가락질을 하다가도 문득 멈춰서 나를 쳐다보고,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국그릇으로 시선을 돌리는 그 패턴이 며칠째 반복되고 있었으니, 눈치가 없어도 알아챌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세 살짜리 아이가 순간적으로 검을 소환해서 날아오는 도끼를 튕겨냈다는 건, 그게 어떤 형태로든 마력을 다룬다는 증거였으니까. 보통 이 세계에서 마력 각성은 최소 다섯 살, 대개는 일곱 살 이후에나 확인되는 게 정상이었다. 나는 그 세 배는 빠른 나이에, 그것도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스킬을 썼다는 뜻이었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이걸 어디에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아니 보고를 해야 하는 게 맞는지조차 판단이 안 섰을 거라고 생각한다. 영지의 가주로서 마력 관련 이변을 상부에 알리는 게 원칙이겠지만, 그 대상이 자기 자식이라면 이야기가 또 달라지니까. 나는 그 갈등을 밥상머리의 침묵으로 매번 확인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다섯 살이 되었다. 몸이 조금 자라니까 말도 유창해졌고, 어른들 앞에서 표정을 관리하는 법도 조금씩 익혔는데, 그 능력이 가장 요긴하게 쓰인 순간은 아버지가 나를 처음으로 마물 사냥에 데려간 날이었다. 사실 그 전까지 나는 몇 번이나 조르고 또 졌던 적이 있었다. "저도 데려가 주세요" 라는 말을 다섯 살 아이의 발음으로 최대한 또박또박, 그리고 최대한 안전하게 들리도록 연습해서 던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어머니는 매번 안 된다고 했고, 아버지는 매번 고민하는 얼굴로 대답을 미뤘는데, 결국 그 고민이 승낙 쪽으로 기울게 된 건 아마 내가 이미 한 번 스킬을 발동시켰다는 사실을 아버지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어차피 위험할 아이라면, 눈앞에서 지켜보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을지도. "그냥 구경만 하는 거다." 아버지는 몇 번이나 그렇게 다짐을 받았지만, 정작 그의 눈은 신이 나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마치 자기가 어릴 때 처음 사냥에 나섰던 기억을 되새기는 사람처럼, 갑옷을 챙기고 창을 점검하는 손길이 평소보다 유독 꼼꼼했다.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배웅했지만, 나 역시 솔직히 기대감을 감출 수 없었다. 게임에서 텍스트로만 읊던 마물을 실제로 본다는 건, 게이머로서 참기 힘든 유혹이었으니까. 몬스터 도감을 몇 백 시간이나 파고들었던 전생의 습관이 아직 남아 있어서, 나는 마차에 오르기 전부터 머릿속으로 낮은 숲에 나올 법한 마물들의 스탯을 하나씩 복기하고 있었다. 영지 외곽의 낮은 숲, 그곳에는 등급이 낮은 마물들이 주로 서식한다고 했다. 아버지와 부하 기사 두 명, 그리고 나. 숲의 입구부터 공기가 달랐다. 흙냄새와 풀냄새가 섞인 냄새, 그리고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벌레 울음소리까지, 게임 화면 속 배경음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밀도의 감각이었다. 우리는 얕은 개울을 따라 걷다가, 이내 낮은 으르렁거림을 들었다. "뿔멧돼지다." 부하 기사 하나가 낮게 속삭였다. 몸통이 성인 남자 두 명만한 크기의, 이마에 뒤틀린 뿔이 하나 솟아 있는 멧돼지였는데, 게임에서는 초반 튜토리얼 지역에 등장하는 최약체 마물이었다. 나는 그 정보를 떠올리며 살짝 안심했지만, 정작 아버지는 그 정도 상대로도 신중하게 자세를 잡았다. 창끝을 낮추고 발소리를 죽이는 움직임이, 게임 속 NPC와는 전혀 다른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이 세계에서는 최약체 마물이라도 실제로 부딪히면 사람 한 명쯤은 가볍게 죽일 수 있다는 걸, 나는 그 순간 처음으로 실감했던 것 같다. 문제는, 뿔멧돼지가 우리를 발견하기도 전에 다른 방향에서 튀어나온 무언가였다. "저건...!" 부하 기사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덤불을 헤치고 나온 건 뿔멧돼지가 아니라, 검붉은 갑각을 두른 늑대형 마물이었다. 게임 지식으로 따지면 그건 '핏빛 광랑', 초반 지역에는 절대 나올 리 없는 중급 마물이었다. 아마 서식지를 잃고 이 낮은 숲까지 흘러들어온 개체인 듯했다. 등급으로만 보면 초심자용 필드에 보스급 몬스터가 난입한 격이었으니, 아버지와 부하 기사들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시는 게 눈에 보였다. "물러나!" 아버지가 소리쳤지만, 핏빛 광랑의 시선은 이미 가장 작고 가장 느린 대상, 즉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사냥감을 고르는 그 짐승의 눈빛에는 망설임이 조금도 없었는데, 그게 오히려 우스울 정도로 정확한 판단이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얄궂다. 크르르릉... 놈이 바닥을 박차며 튀어나오는 순간,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저 속도, 저 거리, 다섯 살 아이의 다리로는 절대 피할 수 없는 거리였다는 걸. 아버지가 달려오고 있었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부하 기사 하나가 검을 뽑아 던지듯 뛰어들었지만 그마저도 늦었다는 걸, 나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마치 게임 화면 속에서 슬로우 모션이 걸린 것처럼, 모든 움직임이 느리게 재생되는 느낌이었다. '또냐.' 나는 그 상황에서도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두 살 때 도끼, 다섯 살 때 마물.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위기의 순간마다 저 스킬이 발동해야만 살 수 있는 구조로 짜여 있는 건지. 이제 뭐 확률 계산도 필요 없을 지경이었다. 위기 상황 → 스킬 발동, 이게 거의 공식처럼 굳어지고 있었으니까. [생명의 위협을 감지했습니다.] [특수 스킬 '마검 소환'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나는 그 문구를 보는 순간, 몸이 알아서 반응하도록 내버려두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선택지가 하나 더 떠 있었다. [강제 발동을 취소하시겠습니까? Y/N] '취소가 되네?' 나는 그 순간 신기해서 잠깐 정신을 놓을 뻔했지만, 이 급박한 와중에 그런 실험을 할 여유는 없었다. 취소를 눌러봤다가 정말로 취소가 되어버리면 그대로 광랑의 이빨에 목이 뜯길 판이었으니까. 나는 즉시 발동을 허락했다. 그 짧은 순간에도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나중에 시간 여유 있을 때 저 선택지 눌러봐야겠다'는 생각까지 스쳐 지나갔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다섯 살짜리치고는 참 태평한 사고방식이었던 것 같다. 번쩍! 손에 새하얀 마검이 잡혔고, 나는 그 무게조차 익숙하지 않은 상태로 반사적으로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잡이를 쥔 손가락 마디마디로 낯선 서늘함이 퍼지는 감각, 그것도 익숙해지려면 한참 걸릴 것 같았다. 파그작!! 검날이 핏빛 광랑의 앞다리를 그대로 절단했다. 그 순간의 감각은 아직도 선명하다.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반발력이, 다섯 살짜리 팔뚝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으니까. 뼈와 갑각이 갈리는 소리가 손끝을 통해 그대로 전해져 왔는데, 그 이질감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대로 뒤로 튕겨나가 바닥을 굴렀지만, 광랑은 앞다리를 잃고 비틀거리다가 곧 아버지의 창에 목이 꿰뚫렸다. 퍼억! 짧고 둔한 소리와 함께 광랑의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그 큰 몸뚱이가 바닥에 널브러지는 소리가 숲 전체를 울리는 것 같았고, 나는 흙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채로 그 광경을 멀거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도훈아." 아버지가 창을 뽑아내며 나를 돌아봤는데, 그 표정은 두 해 전 정원에서 봤던 그 표정과 완전히 똑같았다. 놀람도 걱정도 아닌,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눈빛. 나는 그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저건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눈이 아니라, 미지의 무언가를 관찰하는 사람의 눈이었으니까. "괜찮아요, 아버지."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지만, 정작 손에 쥐어져 있던 검은 이미 빛의 입자로 흩어진 뒤였다. 손바닥에는 아직 검을 쥐었던 감촉이 얼얼하게 남아 있었는데, 나는 그 감각을 감추려고 슬며시 손을 등 뒤로 숨겼다. 부하 기사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결국 입을 뗐다. "가주님... 방금 그건, 도련님이 하신 겁니까?" 그 물음에 아버지도, 나도 한동안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숲 속의 정적이 유난히 길게 이어졌고,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이제 더 이상 이 일을 숨기고 넘어갈 수 없겠다는 걸, 어렴풋이 직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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