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이시은의 손을 잡은 순간 눈앞에 펼쳐진 격자는, 지금까지 봤던 어떤 코드와도 달랐다.
마법 도구나 계약서 위에 덧씌워진 코드는 대체로 정적이었다. 조건문이 있고, 반복문이 있고,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 마치 누군가 종이에 써놓은 문장 같았다. 읽으면 읽히고, 지우면 지워졌다. 그런데 이시은의 몸 안에 흐르는 코드는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변수들이 계속 값을 바꾸고, 어떤 함수는 초당 몇 번씩 호출되고 있었다. 마치 심장 박동을 코드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심장은 일정한 박자로 뛰는데 이건 박자가 자꾸 어긋난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 함수 호출 빈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숫자로 세자면 대략 초당 십수 번. 정상적인 흐름이라면 그 정도로 자주 호출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손을 잡은 채로 눈만 움직여 격자를 훑었다. 변수 하나가 값을 올렸다가, 다시 올렸다가, 또 올렸다. 내려가는 구간이 거의 없었다.
"이거..." 나는 말을 멈췄다.
"뭔데." 이시은이 물었다. 목소리에 긴장이 섞여 있었다.
나는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코드 용어를 그대로 쓰면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이시은은 신전 술사도, 마법 도구 기술자도 아니었다. 그냥 나보다 마력에 대해 조금 더 아는 사람일 뿐이었다.
"마력이 몸 안에서 계속 순환하는 구조인데, 순환 속도를 조절하는 부분이 고장 나 있어요. 정상이라면 마력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자동으로 배출되거나 저장되는 로직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어요. 그냥 계속 쌓이기만 해요."
"그럼 어떻게 되는데."
"쌓인 마력이 배출될 곳을 못 찾으면... 결국 터져요."
이시은의 표정이 굳었다. 나는 그 표정에서, 이미 그녀가 이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는 걸 느꼈다.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예상했던 답을 확인받은 얼굴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어요?" 나는 물었다.
"어렴풋이. 신전 술사들도 몇 번 봤는데, 다들 애매하게만 말하고 넘어갔어. 나이가 들면 나아질 거라거나, 감정 조절을 잘하라거나, 그런 식으로." 그녀는 손목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한번은 명상을 하라고 하더라. 매일 아침 한 시간씩. 두 달 했는데 아무 변화 없었어."
말도 안 되는 처방이었다. 이건 마음가짐 문제가 아니었다. 명백한 구조적 결함이었다. 코드로 치면 함수 하나가 통째로 빠진 상태에서 사용자에게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고 조언하는 꼴이었다. 그런 조언으로 프로그램이 고쳐질 리 없었다.
"그런 말은 아무 의미 없어요." 나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이건 배출 경로가 물리적으로 없는 거예요. 조언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그럼 넌 해결할 수 있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해결할 수 있냐는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만졌던 건 죽은 물건들이었다. 마법 도구, 계약서, 저주가 걸린 장신구. 전부 사람이 아니었다. 마력이 담긴 사람의 몸에 직접 코드를 수정한다는 건, 물건에 적용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위험이 있을 거였다. 잘못 건드리면 도구는 부서지고 끝이지만, 사람은 부서지면 끝이 아니었다.
"모르겠어요. 시도는 해볼 수 있는데, 확실하진 않아요."
"해봐." 이시은이 말했다. 망설임 없는 목소리였다.
"위험할 수도 있어요."
"지금도 위험해. 언제 터질지 모르는데." 그녀가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안 하는 것보다 나아."
나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봤다. 겁이 없는 게 아니라, 겁을 억누르는 데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마 이런 대화를 나눈 게 처음이 아니었을 거다. 신전 술사들 앞에서도 저런 얼굴로 앉아 있었겠지. 그리고 매번, 아무 대답도 못 얻고 돌아갔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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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손을 잡았다. 그녀의 코드 격자를 천천히 살폈다. 배출 경로가 없다면,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새로운 함수를 통째로 만드는 건 지금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나는 존재하는 코드를 읽고 지울 수는 있었지만, 없는 걸 새로 짜본 적은 없었다. 빈 종이에 글을 쓰는 것과, 이미 쓰인 글에서 오탈자를 고치는 것의 차이였다. 나는 후자만 할 줄 알았다.
대신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 완전한 해결이 아니라, 임시방편. 순환 속도 자체를 낮추는 조건문을 하나 추가하는 거였다. 정확히는 '추가'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유사한 함수—마력 순환을 억제하는 방어 마법에 흔히 쓰이는 구조—를 여기에 억지로 끼워 넣는 방식.
말은 쉬웠지만 실제로는 훨씬 복잡했다. 나는 그녀의 몸 안 코드에서, 방어 마법 흔적이 남은 부분—아마 예전에 신전에서 걸어준 억제 마법의 잔재—을 찾았다. 격자 사이를 눈으로 훑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변수는 계속 흔들리고, 함수는 계속 호출됐다. 가만히 있지를 않으니 원하는 부분을 짚어내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마치 흐르는 물속에서 특정 돌 하나를 골라내는 느낌이었다.
다행히 완전히 삭제되지 않고 비활성화된 채로 남아 있었다. 누군가 지우려다 만 흔적처럼, 코드의 한 귀퉁이에 조용히 접혀 있었다.
나는 그 비활성화된 코드 조각을 다시 활성화하는 시도를 했다.
실제로 손가락을 움직인 건 아니었다. 그저 그 부분을 뚜렷하게 '보고', 활성화된 상태를 떠올렸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이 정도 시도는 열 번 중 한 번쯤 성공했다. 그마저도 반영되는 데 며칠씩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이번에도 당장 뭔가 바뀌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냥 씨앗을 심어놓는 기분으로,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는 각오로 시도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손끝이 갑자기 따끔했다. 마치 정전기가 오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시은의 손목에서 옅은 빛이 스쳐 지나갔다. 순간적이었다. 눈을 깜빡였으면 놓쳤을 정도로 짧은 빛이었다. 그리고 그 빛과 동시에, 코드 격자 속에서 비활성화됐던 함수가 실제로 켜지는 게 보였다. 문자 그대로, 회색으로 죽어 있던 코드 블록에 색이 돌아왔다.
성공이었다. 그것도 즉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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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방금 뭔가 이상했어." 이시은이 자기 손목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뭔가 조여지는 느낌이... 팔찌 낀 것 같은 느낌인데, 팔찌는 안 꼈거든."
"억제 마법을 다시 걸었어요. 완전한 해결은 아니지만, 순환 속도가 조금 느려질 거예요."
나는 말하면서도 속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확률적으로 낮은 성공률로만 작동하던 능력이, 방금은 즉시 반영됐다. 왜지. 마력이 있는 사람의 몸에서는 다르게 작동하는 건가. 아니면 그녀의 코드가 유독 불안정해서 조금만 건드려도 반영이 빨랐던 건가. 아니면 그냥 운이 좋았던 건가. 세 가지 가능성 중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실험을 반복해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실험 대상이 사람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어느 쪽이든, 하나는 분명했다. 이시은이라는 존재를 통해서라면, 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능력을 쓸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게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는,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다.
"확실히 좀 편해졌어." 이시은이 손목을 흔들며 말했다. 팔을 크게 휘저어 보고,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펴 보기도 했다. 뭔가 시험해보는 몸짓이었다. "이거 얼마나 지속돼?"
"모르겠어요. 임시방편이라 오래 못 갈 수도 있어요. 배출 경로가 없는 근본 문제는 그대로니까, 억제를 걸었다고 해서 완전히 안전해진 건 아니에요."
"그럼 또 봐줘야겠네." 그녀가 가볍게 말했다. 마치 정기 검진 예약을 잡는 것 같은 말투였다. 대수롭지 않게, 다음 주 화요일 오후처럼 말했다.
"...제가 왜요."
"네가 아니면 누가 하는데."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 되물었다. "신전 술사들도 못 하는 걸 네가 방금 했잖아. 그것도 한 번에."
반박할 말이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신전에서 몇 년을 봐준 술사들이 못 한 걸, 나는 손 한 번 잡고 해냈다. 뭔가 근사한 일을 한 것 같지만, 동시에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도 잘 알았다. 처음 성공했다고 해서 다음에도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일 가능성이 더 컸다.
"대신, 이건 우리 둘만 아는 거예요." 나는 조건을 걸었다. "제 능력에 대해서도,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기로 해요."
"당연하지." 이시은이 손을 내밀었다. "약속."
나는 그 손을 다시 잡았다. 이번엔 코드를 보려는 게 아니라, 그냥 약속의 의미로. 손바닥이 따뜻했다. 아까 코드를 볼 때는 그런 걸 느낄 여유가 없었는데, 지금은 그냥 사람 손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때, 저택 밖에서 마차 소리가 들렸다.
말발굽 소리가 먼저 들렸고, 이어서 바퀴가 자갈길을 밟는 소리가 났다. 저택 앞마당에서 나는 소리치고는 꽤 컸다. 서재 창문이 닫혀 있는데도 또렷하게 들릴 정도였다.
"아버지 마차인가 보네." 이시은이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다시 풀렸다. "나 가야 해. 며칠 안에 또 올게."
"예고 없이요?"
"예고하면 재미없잖아." 그녀가 웃으며 서재 문을 향해 걸어갔다. 걸음이 빨랐다. 아버지가 서재까지 들어오기 전에 나가려는 눈치였다. 그러다 문 앞에서 멈춰 서서 나를 돌아봤다.
"근데 하나 더. 억제가 오래 못 가면, 그 전에 뭔가 더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뜻이지?"
나는 그 질문에 바로 답하지 못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억제는 임시방편이었다. 근본적으로 배출 경로가 없다는 사실은 그대로였다. 언제 다시 순환 속도가 올라갈지, 언제 억제가 풀릴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냥 지금 이 순간 조여놓은 것뿐이었다.
"...조심하세요." 나는 겨우 그렇게 대답했다.
이시은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서재를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방금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일을 시작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마차 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엔 멀어지는 소리였다. 나는 창가로 다가가 커튼 사이로 밖을 내다봤다. 검은 마차가 저택 정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마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끝이 아직도 조금 따끔거렸다. 아까 코드를 건드릴 때 느낀 감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손을 펴서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손이었다. 하지만 방금 그 손으로 사람의 몸 안에 있는 코드를 건드렸다. 그것도 신전 술사들이 몇 년째 손대지 못한 부분을.
이시은은 며칠 안에 다시 올 거라고 했다. 그 말이 약속이라기보단 통보처럼 들렸다. 나는 그녀를 다시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운 동시에, 궁금하기도 했다. 다음에 손을 잡으면 또 뭐가 보일까. 이번처럼 즉시 반영될까, 아니면 원래대로 열 번 중 한 번의 확률로 돌아갈까.
그리고 만약 억제가 다시 풀린다면, 나는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시은이 스스로 찾아와서 말해줄까, 아니면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진 뒤에야 알게 될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나는 지금 신전 술사들도 감당 못 하는 문제를, 확률도 모르는 능력으로 겨우 틀어막은 셈이었다. 이게 정말 잘한 일인지, 아니면 더 큰 문제를 뒤로 미룬 것뿐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서재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조금 전까지 있던 사람의 온기만 방 안에 남아 있었다. 나는 창가에서 물러나 의자에 앉았다. 오늘 있었던 일을 정리해야 했다. 코드 격자, 비활성화된 방어 마법, 즉시 반영된 활성화. 전부 처음 겪는 일이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시은이 다시 오는 날, 나는 또 그 손을 잡아야 할 거다. 그리고 그때는, 오늘처럼 운이 좋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