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스무 해 전의 검

5화

방 안에는 촛불 몇 개만이 밝혀져 있었다. 높은 천장 아래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고, 국왕이 앉은 자리 뒤로는 낡은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오래된 문양이었다. 용과 검이 얽혀 있는 문양. 시종들은 모두 물러나 있었다. 방 안에는 국왕과 나, 그리고 흔들리는 촛불의 그림자뿐이었다. 국왕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앉으라." 나는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딱딱했고, 등받이가 차가웠다. 그 냉기가 등을 타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짐이 그대를 부른 이유가 궁금하겠지." "…네." 국왕의 눈빛이 촛불 아래에서 흔들렸다. 나이가 든 얼굴이었지만, 눈빛만은 젊은 사람처럼 또렷했다. 그 눈이 나를 오래 응시했다. "20년 전, 이 나라에 소환되었던 용사들이 있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설마.) 머릿속으로 온갖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 그중 어느 것도 좋은 방향은 아니었다. "그들이 마왕 파순을 물리쳤지. 하지만 그중 살아 돌아간 자는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표정을 굳혔다. 턱에 힘이 들어갔다. 숨을 천천히 내쉬며 표정을 다스렸다. "그런데 최근 오래된 문헌에서, 생존자가 하나 있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국왕의 시선이 나를 정면으로 향했다. 그 시선에는 압박도, 위협도 없었다. 그저 확인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짐은 그대를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느꼈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그것을 숨기려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손끝의 떨림이 옷자락을 타고 전해질까, 나는 손가락을 접었다. "그 나이에, 그 태도.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아니지." 정적이 흘렀다. 촛불 하나가 스윽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들켰나. 아니, 확신은 아니다. 아직 부인할 수 있다.) "착각이십니다, 폐하." 국왕은 짧게 웃었다. 웃음에는 냉소도, 확신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지친 듯한 기색이었다. 그 웃음이 오래 묵은 피로처럼 느껴졌다. "부인해도 좋다. 짐은 그대의 정체를 캐물을 생각이 없다." "…그럼 무슨 용건이십니까." 국왕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의자가 삐걱 소리를 냈다. "이번 용사들, 이도현과 이서아는 아직 어리다. 미숙하고 불안정해." "그건 저와 상관없는 일입니다." 내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 두 사람의 이름을 듣는 순간 어제 숲에서 봤던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서투른 검술, 흔들리는 발놀림. "그대가 어제 보여준 그 실력, 짐이 못 봤을 거라 생각하나?" 나는 침묵했다. "보고가 올라왔다. 마부와 병사들의 증언으로." (그렇군. 이미 알고 있었어.) 역시 그랬다. 그 짧은 순간에도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왕국이라는 곳은 어디에나 눈이 있었다. 국왕은 낮고 단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대에게 부탁이 있다. 짐꾼으로 위장해, 저 아이들 뒤에서 보좌해 달라." 손끝이 차가워졌다. (다시… 이용당하는 건가.) 이십 년 전, 나는 강제로 끌려가 싸웠다. 그 결과 동료 셋을 잃었다. 그들의 얼굴이 순간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웃던 얼굴, 마지막으로 봤던 창백한 얼굴. 그 기억이 가슴 깊은 곳에서 다시 요동쳤다. 숨이 잠시 막혔다. 나는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전면에 나서고 싶지 않으시다는 걸 안다. 그러니 뒤에서, 조용히." 국왕의 목소리에는 강압이 없었다. 오히려 낮게 부탁하는 어조였다. 그 태도가 오히려 더 무겁게 느껴졌다. "보상은 충분히 하겠다. 그리고 그대의 정체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겠다." 나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촛불이 조용히 흔들렸다. 그 흔들림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거절할 수 있을까. 아니, 거절해도 나는 결국 이 세계에 얽매여 있어.) 이 세계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돌아갈 곳도, 숨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결국 나는 이 흐름 안에서 어떻게든 움직여야 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다. 최근 국경 지역에서 이상한 존재들이 목격되고 있다는 보고가 늘고 있다." 나는 그 말에 시선을 들었다. 방금까지의 침묵이 순식간에 걷혔다. "이상한 존재들이라니요?" 국왕의 표정이 처음으로 흐려졌다. 눈가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검붉은 형체를 한, 인간도 몬스터도 아닌 것들. 최근 며칠 사이 세 곳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 그림자. 어제 숲에서 본 그거랑 같은 건가.) 어제의 광경이 눈앞에 다시 떠올랐다. 숲 속에서 스쳐 지나갔던 그 형체. 검붉은 윤곽, 사람의 것이 아닌 움직임. 그때는 착각이라 여기고 넘겼지만, 지금 이 순간 그 확신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왕 파순은 20년 전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알고 있었다." 국왕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최근 정황을 보면, 뭔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다른 방식이라니요?" "예전에는 마왕이 직접 전면에 나섰다지. 하지만 이번엔… 부하들을 앞세우는 것 같다." "부하들이라면." "사천왕. 옛 기록에 남아 있는 이름이다."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촛불 하나가 스윽 흔들리다가 꺼졌다. 그 자리에 얇은 연기가 잠시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사천왕. 20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이름이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20년 전의 전투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그렇다면 그사이 무언가가 새롭게 만들어졌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처음부터 숨겨져 있던 존재였거나. 국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가 원한다면, 이 정보는 짐과 그대만 아는 것으로 남기겠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에서 몸을 떼는 순간,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것을 느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물론이다. 하지만 오래 걸리지 않기를 바란다." 방을 나서며 나는 좁은 통로의 어둠을 지났다. 걸음이 무거웠다. 발밑에서 나는 낮은 발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다시 이 싸움에 끌려가는 건가.) 통로 끝에 놓인 작은 창으로 옅은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빛을 따라 걸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말 거절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 걸까. 밖으로 나오자 아침 햇살이 눈을 찔렀다. 잠시 눈이 부셔 손으로 이마를 가렸다. 정원에는 도현과 서아가 서 있었다. 도현은 나를 발견하고 대뜻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 아침부터 어디 갔다 온 거예요?" "…볼일이 있었습니다." 도현의 눈빛에는 경계와 불만이 섞여 있었다. 그 나이대 특유의 직설적인 눈빛이었다. 서아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이미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말없이 응시하는 그 시선이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도현이 다시 입을 열려 했지만, 서아가 살짝 팔을 잡아 말렸다. 도현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 짧은 몸짓 사이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렴풋이 드러났다. 나는 별다른 말 없이 그 자리를 지나쳤다. 등 뒤로 두 사람의 시선이 오래 머무는 것이 느껴졌다. 그날 오후, 나는 왕궁 뒤뜰을 홀로 걸었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평온했을 그 소리가, 오늘은 어딘가 삐걱거리는 듯 어긋나 있었다. 발밑의 자갈을 밟는 소리마저 낯설게 들렸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천왕이라니. 이번 싸움은 예전과는 다르게 흘러가겠군.) 20년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이름이었다. 그 존재들이 실재한다면, 이번 싸움의 판도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었다. 동료를 잃었던 그날의 기억이 다시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했다. 멀리 성벽 너머로, 검붉은 하늘 한 조각이 유난히 짙게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치 무언가가 그 아래에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것처럼. 그 짙은 색을 바라보며, 나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이 다시 나뭇잎을 흔들었다. 그 소리는 여전히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