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석조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자 사방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들렸다.
차가운 돌바닥의 냉기가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이 서로 눈짓을 교환하고 있었다.
한 명이 급히 다가와 나를 살폈다.
"이, 이번 소환자는… 나이가 너무 많은데요."
또 다른 목소리가 뒤이었다.
"소환진에 오류가 있었던 건가."
세 번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기록을 다시 확인해야겠어.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을 바라봤다.
(그렇지, 이번에는 용사도 아니고 그냥 나만 소환된 건가.)
주변을 둘러보니 익숙한 문양이 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붉은빛을 띤 마법진, 그 중심에 내가 서 있었다.
(20년 전에도 이런 문양이었지. 조금도 변하지 않았군.)
하지만 그 생각도 오래가지 않았다.
내 옆으로 눈부신 빛이 두 번 더 터지며, 두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빛은 순차적으로 터졌다.
퍽.
첫 번째 빛이 사라진 자리에 소년의 형체가 드러났다.
퍽.
두 번째 빛이 사라진 자리에 소녀의 형체가 드러났다.
하나는 앳된 소년, 하나는 소녀였다.
둘 다 교복을 입고 있었다.
교복의 재질이나 디자인을 보아 같은 학교에 다니는 듯했다.
"뭐, 뭐야 여기…"
소년이 겁먹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빠, 나 무서워…"
소녀가 소년의 팔을 붙잡았다.
두 사람의 얼굴 생김새가 묘하게 닮아 있었다.
(쌍둥이인가. 이번에도 용사와 성녀 세트로 소환했군.)
마법사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용사님과 성녀님이시다!"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한 노년의 마법사가 무릎을 꿇으며 두 손을 모았다.
"오오, 신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나는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봤다.
소년과 소녀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낯선 옷을 입은 사람들, 낯선 건축물, 낯선 언어.
그들의 눈에 담긴 혼란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저 표정, 나도 지었던 표정이겠지.)
마법사 하나가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옆 사람에게 낮게 속삭였다.
"저 남자는… 그냥 부수적으로 끌려온 것 같은데요."
"그렇겠지. 나이도 있고, 딱히 특징도 없어 보이니."
"소환 마력을 낭비한 셈이군."
세 번째 마법사가 혀를 차며 덧붙였다.
정적이 흘렀다.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20년 전에도 이런 취급이었던가.)
그때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젊은 나이에 처음 이 세계로 끌려왔던 날, 나 역시 누군가의 부속품처럼 취급받았다.
용사라는 화려한 칭호를 받은 이는 따로 있었고, 나는 그저 그의 곁을 지키던 이름 없는 조력자에 불과했다.
그 기억이 씁쓸하게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이번엔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목받지 않는다는 것, 그게 지금 나에게는 안전이었다.
(이번엔 조용히 살아남는 게 목표다.)
곧 병사들이 몰려와 우리를 궁 밖으로 안내했다.
돌로 쌓인 복도를 지나는 동안,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들이 스쳐 지나갔다.
낡은 그림들 속에는 용사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저 그림 속 용사도, 아마 나처럼 끌려온 누군가였겠지.)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고, 마부석에는 수염이 거뭇하게 자란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타시게."
낮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마차에 올랐다.
소년과 소녀도 뒤따라 탔다.
마차 안은 좁았지만, 방석이 깔려 있어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낯익은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푸른 초원, 그 위로 드리운 구름의 그림자.
이십 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세계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들, 저 멀리 보이는 산맥의 능선.
모든 것이 그때 그대로였다.
(변한 건 나뿐이군.)
소년이 나를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강태준입니다."
나는 짧게 답했다.
"용사님이신가요?"
소년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같이 끌려온 사람입니다."
"그럼… 왜 같이 온 거예요?"
소년이 재차 물었다.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나는 어깨를 살짝 들어 보였다.
소녀가 나를 유심히 바라봤다.
그 시선이 묘하게 오래 머물렀다.
(뭐지, 이 아이는.)
소녀의 눈빛에는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무언가가 담겨 있는 듯했다.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눈빛이었다.
나는 애써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소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이도현이고, 이쪽은 제 동생 이서아예요."
"쌍둥이인가 보군요."
"네, 어릴 때부터 늘 같이 다녔어요."
서아라는 이름의 소녀가 짧게 웃었다.
"오빠는 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해요."
"야, 그건 아니지."
도현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마차 안에 웃음기가 돌았다.
그 평화로운 분위기가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때였다.
마차가 갑자기 크게 흔들렸다.
쿵.
"으악!"
소년이 소리를 질렀다.
마부가 다급하게 외쳤다.
"짐승입니다! 길을 막고 있어요!"
창밖을 내다보니, 숲 그늘 사이로 검붉은 형체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형체는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팔다리의 관절이 뒤틀린 각도로 꺾여 있었다.
낮은 신음 같은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저건… 몬스터인가. 그런데 저 움직임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숲의 나무들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형체가 하나둘 늘어나고 있었다.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며 마차를 돌리려 했지만, 이미 세 마리가 길을 막고 있었다.
말들이 놀라 앞발을 들어 올리며 울부짖었다.
소녀가 겁에 질려 소년의 손을 꽉 잡았다.
"오빠, 저게 뭐야…"
소년의 얼굴도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모, 모르겠어. 아저씨, 저게 뭐예요?"
나는 대답 대신 창밖의 형체들을 살폈다.
세 마리 모두 인간형에 가까운 몸을 지녔지만, 정상적인 관절 구조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팔이 꺾여야 할 방향과 반대로 접혀 있었고, 걸음걸이도 부자연스러웠다.
(저건 언데드 계열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가.)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이번에도 이렇게 시작하는군.)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찬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숲의 나뭇잎이 스산하게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평온했을 그 소리가, 지금은 미묘하게 어긋난 파문처럼 느껴졌다.
바람에 실려 오는 냄새도 이상했다.
썩은 흙냄새와 비슷하지만, 그 아래 깔린 비릿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검붉은 형체 하나가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놈의 눈동자는 초점이 없었다.
마치 텅 빈 유리구슬 같았다.
그 순간, 놈이 낮게 울부짖으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허리춤에 있던 마부의 짐칸에서 낡은 검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챙.
검이 뽑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무기가 있어서 다행이군.)
검의 무게가 손목에 익숙하게 실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이었지만, 몸은 그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놈의 발끝이 흙을 박차는 소리가 들렸다.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놈의 움직임이 예상보다 빨랐다.
나는 검을 고쳐 쥐며 자세를 낮췄다.
무릎을 살짝 굽히고 체중을 앞발에 실었다.
뒤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 위험해요!"
소년도 다급하게 외쳤다.
"아저씨! 도망쳐요!"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몸을 돌려 도망친다면, 놈의 발톱이 등을 스칠 것이 뻔했다.
(이럴 때는 정면으로 받아치는 게 낫다.)
하지만 이미 놈의 발톱이 내 얼굴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검붉은 손톱이 허공을 가르며 다가오는 궤적이, 마치 슬로모션처럼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바람이 그 손톱 끝에서 갈라지는 소리마저 들리는 듯했다.
숲의 나뭇잎들이 다시 한번 스산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 흔들림 사이로, 낯선 파문이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