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동굴 밖으로 나온 건 해가 완전히 뜬 뒤였다.
안개는 이미 걷혀 있었다. 절벽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이 낯설게 느껴졌다. 어제까지는 당연하게 보던 풍경인데, 오늘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나무 색깔도, 바람 냄새도, 다 그대로인데 나만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가슴에 손을 얹었다. 텅 빈 자리에서 여전히 낯선 박동이 뛰고 있었다. 내 심장 소리는 아니다. 그건 알고 있다.
두근. 두근.
일정한 간격으로 뛰는 그 소리가, 내 몸 안에서 남의 시계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처음엔 소름이 돋았다. 지금은 그냥 익숙해지려고 애쓰는 중이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용주를 잃은 몸은 물에 젖은 종이 같았다. 예전 같으면 절벽 하나쯤 뛰어넘는 게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자갈길 하나 걷는 것도 벅찼다. 발밑의 돌부리 하나에 걸려 넘어질 뻔한 게 벌써 세 번째였다. 그래도 걸었다. 멈추면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으니까.
바스락.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청력이 예민해진 건지, 아니면 다른 감각이 다 죽어서 그 소리만 남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청룡동 입구에 다다랐을 때, 노용 사부가 서 있었다.
새벽부터 나와 있었던 사람답게 옷매무새가 흐트러짐 없었다. 새로 다린 듯한 도복, 흐트러짐 없이 정리된 머리. 반면 나는 며칠은 안 씻은 몰골이었다. 서 있는 자세만 봐도 누가 스승이고 누가 폐인인지 구분이 됐다. 나를 보는 눈빛에도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살아있었구나."
짧았다. 감탄도 아니고 안도도 아니었다. 그냥 확인이었다. 마치 배송된 물건이 파손 없이 도착했는지 체크하는 어조였다.
"예." 나는 대답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사부는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짧은 시선만으로 내 몸 상태를 다 읽어낸 것 같았다. 눈동자, 손끝의 떨림, 걸음걸이까지. 사십 년 넘게 청룡동에서 사람 몸 상태만 봐온 사람이니, 그 정도는 눈 감고도 알아낼 수 있을 거다.
"용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사부의 눈이 이미 답을 알고 있었으니까.
정적이 흘렀다. 바람이 나무 사이를 지나가는 소리만 들렸다.
"경고했다." 사부가 말했다. 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사실을 되짚는 어조였다.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최악의 경우엔 영구히 회복 못 할 수도 있다고."
"예." 나는 다시 대답했다.
할 말이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경고를 무시한 건 나였고, 그 결과를 감당하는 것도 나였다. 사부 탓을 할 여지가 조금도 없었다.
사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등을 돌려 걸어갔다. 그 뒷모습이, 포기라는 걸 알았다. 더 이상 만류할 가치도 없는 놈이 됐다는 뜻이다. 씁쓸했지만, 지금은 그걸 곱씹을 여유가 없었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저 사람은 나를 걱정해서 저러는 걸까, 아니면 청룡동의 '실패한 재목' 하나로 분류하고 정리해버린 걸까. 둘 다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동굴로 돌아왔다. 청룡동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게 우선이었다. 지금 이 몰골로 마을 안쪽까지 걸어 들어가면, 소문은 하루 안에 다 퍼질 게 뻔했다. '용하진, 용주를 잃고 폐인이 됐다더라.' 사실이니까 딱히 반박할 말도 없다. 그게 더 서글펐다.
청룡동은 좁은 곳이다. 우물가에서 시작된 말이 저녁 무렵이면 마을 반대편 대장간까지 가 있는 곳. 내가 어떤 몰골로 어디를 지나갔는지, 그것만으로도 며칠 치 술안주가 나올 거다. 지금은 그런 관심조차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동굴 안 바닥에 주저앉았다. 등을 벽에 기댔다. 차가운 돌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졌다. 등뼈 하나하나가 돌 표면에 눌리는 게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그 차가움이 조금은 반가웠다. 아직 내 몸에 감각이라는 게 남아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숨을 골랐다. 가슴 안쪽 박동이 다시 신경 쓰였다. 낯설지만, 완전히 이질적이지는 않았다. 마치 내 몸에 원래 있던 것처럼,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는 느낌이었다.
눈을 감았다. 별생각 없이 그 박동에 정신을 집중해봤다. 그러자,
지식이 흘러들어왔다.
부적을 그리는 순서. 배열법의 기초. 연금술 재료의 배합 비율. 전투 무공의 초식 하나하나. 정보량이 너무 많아서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마치 수십 권의 책을 한꺼번에 눈앞에 펼쳐놓고 읽으라고 하는 느낌이었다. 눈으로 읽는 게 아니라 통째로 머릿속에 쏟아붓는 방식이라 두통이 따라왔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렸지만, 신기하게도 정보 자체는 흐트러지지 않고 차곡차곡 쌓였다.
그리고 그 정보들이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어색함 없이 머릿속에 자리를 잡았다.
부적의 획순이 손끝에서 그려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실제로 손을 움직인 것도 아닌데, 마치 예전에 수백 번 그려본 것처럼 순서가 명확하게 떠올랐다. 연금술 재료의 비율도 그랬다. 몇 대 몇으로 섞어야 하는지, 왜 그 비율이어야 하는지까지 함께 들어왔다.
놀라움도 잠시였다. 곧바로 흐름이 끊겼다. 마치 수도꼭지를 틀다가 갑자기 잠긴 느낌이었다.
콰직.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기는 소리가 났다. 실제로 소리가 난 건 아니었을 텐데, 감각적으로는 그렇게 느껴졌다.
다시 집중해봤다.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조금 전의 그 순간은 마치 없었던 일처럼 조용했다.
뭐지.
혹시 한 번뿐인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이 정도로 끝나면 곤란하다. 지금 내게 남은 거라곤 이 심장 하나뿐인데, 그게 일회용이라면 정말로 답이 없어진다.
다시 시도했다. 이번엔 눈을 감고 숨을 아주 얕게, 아주 느리게 쉬면서 가슴 안쪽에만 온 신경을 모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다리가 저릴 정도로 오래 앉아 있었을 때, 다시 그 흐름이 시작됐다.
이번엔 조금 더 명확했다. 특정한 조건이 있는 것 같았다. 완전히 몰입한 상태, 잡생각이 하나도 없는 상태. 그럴 때만 구룡제의 기억이 흘러나왔다.
호흡이 일정해지고, 잡생각이 사라지고, 오로지 그 박동 소리에만 집중할 때. 마치 얕은 물속에 완전히 몸을 담그듯 정신이 가라앉을 때에만 문이 열렸다.
반대로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이 끼어들면 그대로 끊겼다. 금서아를 떠올리는 순간이 그랬다. 배신의 기억이 치밀어 오르자, 흐름이 즉시 멈췄다.
이름 하나 떠올렸을 뿐인데, 마치 스위치를 내린 것처럼 뚝 끊겼다. 억울했다. 하필 이럴 때도 그 이름이 걸림돌이 되나 싶어서.
마치 마음이 흔들리면 문이 닫히는 자물쇠 같았다. 통제하기 까다로운 조건이다.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
다시 집중했다. 숨을 다스렸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방법을 익혀갔다. 완전한 무공을 익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물줄기를 받아 마시는 정도였다. 그래도 목마른 사람에겐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한 번 흐름이 열리면, 대략 숨을 열 번 쉴 정도의 시간 동안 정보가 흘러들었다. 그 이상은 붙잡으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마치 정해진 배급량이 있는 것 같았다. 억지로 더 받으려 하면 오히려 두통이 심해졌다. 적당히 받아먹고, 소화할 시간을 두고, 다시 시도하는 게 나았다.
몇 시간이나 그렇게 앉아 있었다. 팔다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배는 고팠지만 먹을 것도 없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허벅지에 감각이 없어질 정도로 오래 앉아 있었다. 엉덩이 밑의 돌바닥은 이미 체온으로 데워져 있었다. 그 온기마저 아깝게 느껴졌다. 지금 일어나면 다시 처음부터 몰입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 그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버텼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구룡제, 당신은 왜 나한테 이걸 남긴 겁니까.
대답은 없었다. 그 형체는 이미 소멸했으니까. 남은 건 흔적뿐이다. 흔적이 이렇게 방대할 줄은 몰랐지만.
동굴 안 어딘가에 그 존재가 아직 남아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 지웠다. 그런 낭만적인 상상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지금 내게 남은 건 그저 심장 하나, 그리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정보의 파편들뿐이다.
밖은 이미 저녁이었다. 동굴 입구로 붉은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배가 등가죽에 붙을 정도로 고팠다. 마을로 내려가야 했다.
꾸르륵.
배 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이 상황에서도 배는 고프구나. 몸이 망가진 것도 서러운데, 위장까지 정직하게 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지금 내가 청룡동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는가. 용주를 잃은 놈. 폐인이 다 된 첫 번째 천재. 소문은 벌써 퍼졌을 게 분명했다.
청룡동에서 첫 번째 천재라는 말을 듣던 시절이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때는 다들 나를 보면 알은척을 하고, 인사를 하고, 부모님 안부를 물었다. 이제는 그 시선이 어떻게 바뀔지 눈에 훤히 보였다. 동정과 조롱이 반씩 섞인 눈빛. 그런 걸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만약 내 안에 뭔가 다른 힘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건 더 위험했다. 아버지도 없는 지금, 청룡동에서 나를 지켜줄 사람은 없다. 노용 사부는 이미 손을 놓았다. 만약 누군가 이 힘을 노리고 접근한다면, 지금 내 몸으로는 막을 방법이 없다.
용주를 잃은 몸으로는 부적 한 장 제대로 그리기도 힘들다. 만약 이 심장 안에 든 게 대단한 물건이라는 게 알려진다면, 그걸 노리는 사람이 나타날 거다. 청룡동 안에도, 밖에도. 지금 내 몸으로 그런 자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감춰야 한다.
폐인처럼 보이는 게, 지금은 가장 안전한 위장이다.
역설적이었다. 며칠 전까지는 재능을 감추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이제는 무능함을 최대한 잘 연기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세상일이란 참.
일단 배부터 채워야 했다.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벽을 짚고 일어서는데도 균형이 잘 잡히지 않았다. 진짜 폐인 흉내를 낼 필요도 없었다. 지금 몸 상태가 이미 그 정도였으니까.
절뚝거리며 동굴 입구를 나섰다. 저녁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차가웠다. 그 차가움이 오히려 정신을 붙잡아주는 느낌이었다.
청룡동 초입에 다다랐을 때,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렸다.
"저기 온다, 저기."
용다인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뒤로, 낮게 웅얼거리는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발걸음을 멈추고 그쪽을 봤다. 여러 개의 그림자가 초입 쪽에 모여 서 있었다. 하나같이 팔짱을 끼고 있거나,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모습이었다. 딱 봐도 좋은 의도로 기다린 사람들은 아니었다.
반가운 재회는 아닐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