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한지운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 안에 남은 맛을 다시 음미하는 듯했다.
눈을 감고, 혀로 무언가를 확인하듯 입천장을 훑었다.
"이건…"
말을 잇지 못했다.
접시 위에는 마카롱 조각이 반쪼가리로 남아 있었다.
한지운의 손끝이 그 조각을 다시 집었다가, 놓았다가, 다시 집었다.
"맛없어요?"
"아닙니다."
"그럼요?"
"제가 먹어본 어떤 디저트보다도 맛있습니다."
한지운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진심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가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평소라면 한 박자 걸러서, 예의를 차린 말투로 돌아왔을 텐데.
지금은 그런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겉은 얇고 바삭했다.
안은 촉촉하고 쫀득했다.
필링은 넣지 못했지만 코크만으로도 이 정도였다.
필링을 넣으면 어떻게 될지 상상만 해도 손끝이 뜨거워졌다.
라즈베리 잼.
초콜릿 가나슈.
버터크림.
머릿속으로 하나씩 그려보았다.
전생에서 먹었던 마카롱의 맛들이 순서대로 떠올랐다.
이 세계에는 아직 그런 게 없었다.
없다면, 만들면 되는 거였다.
"왕도 상가에서 이런 걸 파는 곳은 없습니다."
한지운이 말했다.
"그럼 팔 수 있는 거예요?"
"…시도해 볼 가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말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반대에서 인정 쪽으로 조금씩 기울어지는 게 보였다.
"상가에 아는 상인이 있습니다."
한지운이 덧붙였다.
"디저트 쪽으로는 안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먼저 보여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일이요?"
"내일 오전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오후에는 사람이 많아서 진지하게 봐줄 여유가 없을 겁니다."
계획이 순식간에 구체적으로 잡혔다.
그 속도가 마음에 들었다.
밤 열 시.
남은 마카롱 여덟 개를 조심스럽게 상자에 담았다.
하나씩 옮길 때마다 코크가 부서질까봐 손끝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상자 안에 얇은 천을 깔고, 그 위에 마카롱을 눕혔다.
내일 왕도 상가에 나가 시식을 시켜볼 계획이었다.
계획을 세우는 동안 나는 이상하게 들뜬 기분이었다.
전생의 기억 속에서 첫 투자를 받았던 날이 떠올랐다.
사무실 형광등 아래에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던 손.
그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고, 손끝이 간지러운 느낌.
"내일 몇 시에 나갈까요?"
"오전 아홉 시가 좋을 것 같습니다."
"좋아요. 아홉 시."
숫자를 정하고 나니 더 실감이 났다.
아홉 시.
그 숫자를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런데 몸이 이상했다.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삐이, 하는 얇은 소음.
처음엔 그냥 지나치려 했다.
하루 종일 서 있었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커졌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한지운이 물었다.
"괜찮아요. 조금 피곤해서요."
거짓말이었다.
피곤한 게 아니었다.
몸속에서 뭔가가 텅 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배가 고픈 것과도 달랐다.
목이 마른 것과도 달랐다.
설명할 수 없는 결핍이었다.
한지운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움직였다가, 다시 다물었다.
"쉬십시오. 내일을 위해서."
"네."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한 칸, 두 칸, 세 칸.
숫자를 세면서 올라갔다.
평소라면 열 칸도 안 되는 계단이었는데, 오늘은 그 배는 되는 것 같았다.
네 칸, 다섯 칸.
다리가 무거웠다.
여섯 칸, 일곱 칸.
숫자를 세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방문을 닫고 침대에 앉았다.
손을 들어 눈앞에서 폈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제까지는 이 정도로 떨리지 않았다.
오늘 하루 종일 마법을 썼다.
스무 번도 넘게 실패하고, 마지막에 성공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스물, 스물하나, 스물둘.
숫자를 다시 세어보았다.
정확히 몇 번이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많았다.
생산 마법이 마력을 소모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히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소모하는지는 몰랐다.
그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부분이었다.
전생의 투자에서도 그랬다.
수익률만 보고 리스크를 계산하지 않으면, 언젠가 계좌가 텅 빈다.
그 사실을 몸으로 배운 게 몇 번이었는지.
창밖을 보았다.
달이 높이 떠 있었다.
몽실이 방문 틈으로 들어와 침대 위로 올라왔다.
푹신한 몸이 다리에 닿았다.
따뜻했다.
그런데 그 온기가 평소보다 멀게 느껴졌다.
마치 얇은 막을 하나 사이에 두고 느끼는 것처럼.
손으로 몽실의 등을 쓰다듬었다.
털의 감촉은 그대로인데, 그걸 느끼는 내 손끝이 이상했다.
감각이 반쯤 죽어 있는 것 같았다.
눈을 감았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한밤중, 나는 눈을 떴다.
목이 너무 말랐다.
물이 필요했다.
일어나려 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상했다.
방금까지 자고 있었을 뿐인데, 왜 몸이 이렇게 무거운가.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몸이 먼저 반응했다.
"어…"
소리를 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시야가 흔들렸다.
방 안의 사물들이 두 개로 보였다가 하나로 돌아왔다가 했다.
창문, 옷장, 책상.
전부 흐릿하게 겹쳐 보였다.
숨을 쉬는 게 힘들었다.
가슴이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공기를 들이마셔도 그게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지 않았다.
이게 뭘까.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몸이 침대 밖으로 미끄러졌다.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소리를 낼 힘조차 없었다.
차가운 바닥의 감촉이 뺨에 닿았다.
그 감촉만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몸이 무너지는 순간에 가장 확실한 감각이었다.
몽실이 놀라서 침대 위에서 뛰어내렸다.
작은 발소리가 문 쪽으로 향했다.
문 밑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긁고, 또 긁고, 또 긁었다.
그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의식이 흐릿해졌다.
마지막으로 든 생각은 이상하게도 두려움이 아니었다.
실망이었다.
이제 막 시작인데, 여기서 멈추면 안 되는데.
내일 아홉 시에 상가로 나가야 하는데.
한지운이 소개해준다던 상인을 만나야 하는데.
그 생각을 끝으로 눈앞이 완전히 캄캄해졌다.
얼마나 지났는지 몰랐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가씨!"
한지운의 목소리였다.
다급한 발소리, 그리고 나를 안아 드는 팔.
그 팔이 떨리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눈을 뜨려 했지만 눈꺼풀이 무거웠다.
간신히 눈을 살짝 열었다.
한지운의 얼굴이 보였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항상 차분하던 그가, 완전히 무너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이마에 땀이 배어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정신이 드십니까."
대답할 힘이 없었다.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한지운이 나를 침대에 눕혔다.
손목을 짚어보았다.
맥을 확인하는 손길이 떨리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가 맥을 짚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느려졌다가 다시 빨라졌다.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
"…괜찮아요."
겨우 목소리가 나왔다.
"괜찮지 않습니다. 마력 고갈 증상입니다."
마력 고갈.
그 단어가 머릿속에 박혔다.
전생에서 계좌가 마이너스로 떨어졌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숫자가 0을 지나 음수로 넘어가는 순간.
지금 내 몸이 그런 상태라는 뜻이었다.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한지운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분노인지, 두려움인지 구분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오늘 하루에만 몇 번이나 마법을 쓰신 겁니까."
"…스물세 번쯤."
"여덟 살 아이가 그렇게 많이…"
한지운이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뭔가 더 말하려다, 참는 게 보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몸은 무거웠지만 정신은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가슴을 조여오던 압박감도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저 괜찮을 거예요."
"괜찮지 않으실 겁니다."
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날카로운 것이 섞여 있었다.
평소의 존댓말 아래 숨겨져 있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았다.
"내일 상가에 나가는 건…"
"오늘은 안 됩니다."
"그럼…"
"오늘은, 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날에 가능할 겁니다."
그 말에 안심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워졌다.
계획이 틀어졌다는 사실이 실감으로 다가왔다.
한지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가지러 나갔다.
방 안에 혼자 남았다.
몽실이 다시 다가와 내 옆에 몸을 붙였다.
따뜻함이 조금씩 돌아왔다.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엔 그 온기가 제대로 느껴졌다.
하지만 방금 겪은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생산 마법은 공짜가 아니었다.
대가가 있었다.
전생에서 배웠던 것과 똑같았다.
공짜 점심은 없다.
레버리지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그리고 그 대가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한지운이 물을 들고 돌아왔다.
컵을 입가에 대주었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그 감각이 유난히 선명했다.
"천천히 드십시오."
"…네."
한 모금, 두 모금.
물이 몸속으로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물로는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텅 빈 자리, 마력이 있어야 할 자리.
그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창밖으로 새벽빛이 조금씩 번지고 있었다.
오늘, 상가에 마카롱을 들고 나가기로 한 날이었다.
그런데 몸을 일으킬 힘조차 없었다.
한지운이 조용히 방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이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 눈빛 속에 뭔가 결심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아가씨."
"…네."
"앞으로는 제가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마법을 쓰기 전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을 보니,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뭔가가 바뀌려 하고 있었다.
새벽빛이 방 안으로 조금씩 들어왔다.
상자 속 마카롱 여덟 개는,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