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그를 고치면, 전쟁이 진다

5화

기지로 돌아오는 길은 조용했다. 부상자를 실은 마차가 앞장서고, 정찰조가 그 뒤를 따랐다. 바퀴가 자갈길을 밟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강도현은 마차에 타지 않고 걸었다. 걸음걸이가 아까보다 훨씬 무거워 보였다. 발을 뗄 때마다 어깨가 조금씩 기울었고, 그 어깨 위로 저녁 햇살이 붉게 내려앉았다. 나는 그 뒷모습을 계속 눈으로 좇았다. (저 사람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정찰조원들도 그의 곁을 지날 때마다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 침묵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했다. 기지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한서경의 사무실로 불려갔다. 복도를 걷는 동안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방은 좁았지만 정돈되어 있었고, 벽에는 전선 지도가 붙어 있었다. 지도 위 붉은 표식들이 점점 기지 쪽으로 좁혀오고 있었다. 압정으로 고정된 종이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가 있었다. 누군가 자주 만졌다는 흔적처럼 보였다. "앉으세요." 한서경이 자리를 권했다. 나는 의자에 앉았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살짝 걸리며 삐걱, 하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서 있는 채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그녀의 옆얼굴에 걸쳐 있었다. "오늘 본 것에 대해 몇 가지 정리해두고 싶어요." "...네." "강도현의 스킬, 나선 섬멸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모든 방어력을 무시하고 치명상을 입힙니다. 대신 발동하는 매초마다 본인에게도 자해 피해가 누적돼요. 시간이 갈수록 그 강도는 지수적으로 늘어나죠." "그럼 오늘 얼마나..." 목소리가 미세하게 갈라졌다. "12초 정도 유지됐습니다. 그 정도면 회복에 사흘은 걸릴 겁니다." 나는 숨이 막혔다. 숨을 들이쉬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그런데... 왜 스킬을 그렇게까지 오래 유지하도록 방치했나요? 제압할 수 있었잖아요." 한서경이 처음으로 나를 돌아봤다. 그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방치가 아니에요. 판단이었죠." "판단이요?" "플래시백 상태에서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수록 스킬의 위력이 상승합니다. 이번처럼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는, 오히려 그 상태를 조금 더 유지하는 게 안전했어요." 그 말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손끝이 저절로 무릎을 움켜쥐었다. "그러면... 그 사람의 고통은요?" "그건 지금 우리가 고려할 우선순위가 아닙니다." 한서경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너무나 담담해서, 오히려 그 담담함이 더 잔인하게 들렸다. "이서윤 치료사님. 다시 한번 말하죠. 당신 임무는 강도현을 완치시키는 게 아니에요." "...알고 있습니다." "조정입니다. 그가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만, 딱 그만큼만 붙잡아주는 거예요." "만약 그가 완전히 나아진다면요?" 한서경이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길게 느껴졌다. 벽에 걸린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완전히 나아진 하이랜더는, 나선 섬멸자를 쓰지 않습니다." "...그럼 그를 치료하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치료하면 이 기지가 무너진다는 뜻이군요." 나는 목소리가 떨리는 걸 억누르며 말했다. 한서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지도 위 붉은 표식을 손끝으로 살짝 짚었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사무실을 나서는 내 발걸음은 무거웠다. 문을 닫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복도에 울려 퍼졌다. 그날 저녁, 나는 식당에서 윤미래를 다시 만났다. 식당 안은 따뜻한 국냄새와 낮은 대화 소리로 채워져 있었다. 그녀는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오늘 전투에서 다친 모양이었다. 붕대 위로 붉은 얼룩이 살짝 배어 나와 있었다. "단장님께 뭐라고 하셨어요?" 윤미래가 국그릇을 내 앞에 밀어주며 물었다. "...조정에 대해 다시 확인받았어요." 윤미래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눈까지 닿지는 않았다. "저도 처음엔 치료사님처럼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요?" "지금은... 저 사람 없이 이 기지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가 더 걱정돼요." 그녀는 국그릇을 내려다보며 낮게 말을 이었다. 숟가락을 든 손이 살짝 멈춰 있었다. "청연성 방어전 얘기 들으셨어요?" "조금요. 강도현 씨가 유일한 생존자였다고..." "그날 거기 있던 사람이 삼백 명이었어요." 윤미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식당의 소음이 순간 멀어지는 것 같았다. "강도현 혼자 나선 섬멸자를 서른 분 넘게 유지했어요.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시간이죠." "그럼... 그때부터..." "그때부터 지금 같은 상태가 됐어요. 정신이 그날 밤에서 멈춰버린 사람처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삼백 명 중 유일한 생존자. 서른 분 넘게 유지된 스킬. 그 시간 동안 그의 몸에 쌓였을 자해 피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숫자로만 들었던 것이 갑자기 무게를 가진 것처럼 가슴을 눌렀다. "박태식 님은... 그날 청연성에 계셨나요?" 윤미래가 나를 잠시 응시했다. 그 시선에는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그건 다른 사건이에요." "다른..." "반년 전, 다른 초소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그 얘기는... 지금 제가 할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맺었다.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짧게 났다. "치료사님이 직접 물어보세요. 언젠가는요." 식당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나는 오래 바라보았다. 붕대를 감은 손목이 문틈으로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날 밤, 나는 상담실로 돌아와 강도현의 서류를 다시 펼쳤다. 책상 위 램프 불빛이 종이 위로 노랗게 번졌다. 청연성 방어전 관련 기록은 대부분 검열되어 있었다. 검은 줄이 그어진 문장들 사이로, 몇 개의 단어만 살아남아 있었다. 손끝으로 종이의 결을 따라가며, 남은 단어들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생존자 1인... 스킬 지속시간 이상... 제국 특별 관리 대상 지정...] 그 아래, 다른 손글씨로 짧게 덧붙여진 메모가 있었다. 글씨체가 앞선 문장들과 확연히 달랐다. [완치 시 전력 손실 예상. 조정 프로토콜 유지 권고.] 나는 그 메모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누가 이걸 썼을까. 그리고 이 프로토콜은 언제부터...) 종이를 넘길수록 검열된 부분이 더 많아졌다. 마지막 장에는 아예 페이지 번호만 남고 본문 전체가 지워져 있었다. (이렇게까지 지울 이유가 뭘까.) 창밖으로 바람이 불었다. 마른 풀잎이 스치는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램프 불빛이 흔들리며 벽에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소리 사이로, 저 멀리 북쪽 황무지에서 다시 한번 희미한 붉은 빛이 번쩍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유리창에 이마를 대자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번엔 사라지지 않고, 아주 잠깐 더 오래 머물러 있었다. 그 빛이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조용히 깜박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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