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제7전선기지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창밖으로 황무지의 마른 바람이 불어왔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낯설었던 흙먼지 냄새가,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기지 안은 언제나 조용했다.
병사들의 발소리, 멀리서 들리는 훈련 구령, 그리고 이따금 하늘을 가르는 수송기의 엔진 소리.
그 소리들이 겹쳐질 때마다, 나는 이곳이 전쟁터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되었다.
나는 상담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강도현. 18세. 클래스 하이랜더. 스킬명 나선 섬멸자.]
서류는 이미 세 번쯤 읽은 뒤였다.
하지만 다시 읽어도 낯설게 느껴지는 문장들이 있었다.
서류 아래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임시 배속. 특별 관리 대상.
나는 그 도장을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인주가 아직 마르지 않은 듯, 손끝에 붉은 기운이 살짝 묻어나는 것 같았다.
(치료 대상이 아니라 관리 대상이라니.)
그 표현이 마음에 걸렸다.
관리라는 말은, 대개 사람보다는 물건이나 위험물에 붙이는 말이었다.
열여덞 살짜리 아이에게 그런 표현을 쓴다는 것이, 나는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서류 옆에는 그의 전투 기록도 함께 첨부되어 있었다.
숫자로만 나열된 전적들.
몇 번의 전투, 몇 명의 몬스터 처치, 몇 번의 부상.
그 숫자들 사이에서,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서류를 덮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걸어 들어왔다.
키가 컸고, 어깨가 넓었지만 걸음걸이는 이상하게 조심스러웠다.
마치 자신의 몸무게가 세상에 무슨 흔적을 남기는 게 두려운 사람처럼.
발끝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소리를 죽이려는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원래 색이 아니라는 걸, 나는 자료로 이미 알고 있었다.
스킬 각성 이후 눈동자에 남은 잔여 색소였다.
그의 손목에는 오래된 흉터 자국이 몇 개 보였다.
전투 중에 생긴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흉터들이 유난히 하얗게 도드라져 있다는 것만 눈에 들어왔다.
"앉으세요."
나는 의자를 가리켰다.
그는 대답 없이 자리에 앉았다.
등을 곧게 세운 채, 시선은 내 눈이 아니라 책상 모서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자세는 훈련받은 병사의 자세와도 비슷했지만, 어딘가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경계심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방어하려는 오래된 습관 같은 것.
"저는 이서윤입니다. 오늘부터 상담을 맡게 됐어요."
"...압니다."
짧은 대답이었다.
그 이상은 없었다.
나는 준비해온 질문지를 옆으로 밀어두었다.
(형식적인 질문으로는 이 사람 마음의 문을 열 수 없겠다.)
책상 위에 놓인 질문지는 상담 표준 절차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었다.
수면 패턴, 식욕, 감정 기복, 대인관계.
하지만 그 종이 위의 질문들이, 이 사람 앞에서는 전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어제 잠은 잘 잤어요?"
"...상관없는 질문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마치 오래전에 어딘가에 감정을 다 쏟아버리고, 남은 것으로만 말하는 사람처럼.
나는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
창으로 스며든 오후 햇빛이 그의 오른쪽 얼굴에만 닿아 있었다.
왼쪽 얼굴은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빛과 어둠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진 그 얼굴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그림자가 진 쪽 눈동자는 더욱 붉게 보였다.
마치 그 붉은 색이, 어둠 속에서만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강도현 씨."
"...네."
"저는 당신을 고치려는 게 아니에요."
그 말에 그가 처음으로 나를 똑바로 보았다.
붉은 눈동자 안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의심 같기도 하고, 경계 같기도 한.
그 눈빛은 마치 처음으로 낯선 언어를 들은 사람의 표정 같았다.
"고치지 않는다고요?"
"당신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예요."
정적이 흘렀다.
창밖에서 병사들의 훈련 구령이 멀리서 들려왔다.
그 소리가 오히려 방 안의 침묵을 더 두껍게 만들었다.
나는 그 침묵을 굳이 깨려 하지 않았다.
침묵도 상담의 일부라는 걸, 나는 오래전에 배웠다.
사람은 말보다 침묵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드러내는 법이었다.
그가 천천히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주 작은 떨림이었다.
남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하지만 나는 그의 손을 보는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다.
손끝의 떨림, 호흡의 미세한 흐트러짐, 시선이 향하는 방향.
그런 것들이 말보다 더 정확한 신호였다.
"손이... 떨리네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즉시 손을 무릎 아래로 감췄다.
그 동작이 너무 빨라서, 오히려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 더 선명해졌다.
(저건 훈련으로 다스릴 수 있는 떨림이 아니야.)
전투 후유증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떨림이 단순한 긴장 때문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나는 더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첫날부터 벽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는 오히려 그를 더 굳게 만들 뿐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서두른다고 열리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서두를수록 더 단단히 닫히는 법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는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등을 돌린 채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정지된 순간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치료사님."
"네."
"기대하지 마세요."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한동안 그가 앉았던 빈 의자를 바라보았다.
의자 등받이에 아직 그의 체온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 스며든 오후 햇빛이, 이제는 그 빈 의자의 절반만을 비추고 있었다.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나는 그 경계선을 오래 바라보았다.
(기대하지 말라는 말은, 어쩌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나는 기지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식당은 거의 비어 있었고, 창밖으로 어둠이 빠르게 내려앉고 있었다.
식판 위의 국은 이미 식어 있었다.
나는 숟가락을 몇 번 뒤적이다가, 결국 반쯤만 비운 채 내려놓았다.
강도현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빛과 그림자로 반씩 갈라진 그 얼굴.
손끝의 떨림을 감추던 그 빠른 손짓.
기대하지 말라던 그 목소리.
그 모든 것들이 하나로 이어지지 않는 조각들처럼 머릿속을 떠돌았다.
(무엇이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든 걸까.)
서류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가 분명히 있을 것이었다.
숫자로 정리된 전적들 뒤에, 사람의 진짜 이야기가 숨어 있을 것이었다.
그때였다.
기지 전체에 낮은 경고음이 울렸다.
웅- 웅-
짧고 반복적인 소리였다.
식당에 있던 몇몇 병사들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판이 부딪히는 소리,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뒤섞여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저게 무슨 소리예요?"
지나가던 병사를 붙잡고 물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북쪽 경계에서 이상 신호가 감지됐답니다."
"이상 신호요?"
"모르겠습니다. 정찰대가 확인하러 나갔다는데..."
그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서둘러 뛰어갔다.
식당 안은 순식간에 텅 비어갔다.
남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창밖으로, 저 멀리 기지 경계선 너머 어두운 황무지 쪽에서 희미한 붉은 빛이 한 번 번쩍였다.
그리고 사라졌다.
그 빛은 아주 짧았지만, 눈에 선명하게 남았다.
마치 어둠 속에서 누군가 잠깐 눈을 뜬 것처럼.
나는 창가에 서서 그 어둠을 오래 바라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마른 풀들의 소리가, 평소와는 다르게 들렸다.
삐걱거리는 듯한, 낯선 파문이 그 소리 사이에 섞여 있었다.
(단순한 오작동일까, 아니면...)
그 생각을 끝맺기도 전에, 등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짙게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