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며칠이 지나는 동안 현우는 자신에게 배정된 궁정 예법과 정무 교육을 받아야 했는데, 그 교육을 담당하는 시녀가 바로 서은채였다.
스물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짙은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린 그녀는 처음 인사를 나눌 때부터 유난히 깊은 눈빛으로 현우를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 속에는 존경이라기보다는 거의 신앙에 가까운 무언가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마주 앉을 때마다 은채는 필요한 말 외에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고, 현우가 무언가를 물으면 짧게 답한 뒤 곧바로 시선을 내려 다음 장을 넘겼다. 그 조심스러움이 처음엔 그저 시녀 특유의 몸가짐이려니 넘겼지만, 며칠을 겹쳐두고 보니 그것이 단순한 격식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무언가를 참는 듯한, 늘 한 걸음 물러서 있으면서도 시선만은 끝까지 놓지 않는 그런 태도였다.
게임 설정을 떠올려보면 서은채는 유일하게 원작에서 NTR 씬이 존재하지 않는 캐릭터였다. 다른 히로인들이 하나둘 비극적인 결말로 향하는 와중에도, 은채만큼은 끝까지 주인공에게 충성을 다하며 곁을 지켰다. 그 이유가 지나친 집착과 사랑 때문이라는 걸, 게임을 몇 번이고 플레이하며 알고 있었다. 그때는 그저 텍스트 몇 줄과 시디 아트로만 존재하던 정보였는데, 지금은 그 정보가 눈앞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그 사실이 묘하게 현실감 없이 느껴지다가도, 문득 서늘한 위화감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그날 아침, 현우는 서고에서 예법서를 정리하던 중 은채를 찾아 복도를 지나다가 그녀의 방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이상한 정적을 느끼고 걸음을 멈췄다.
복도는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했고, 창을 통해 스며든 아침 햇살이 마루 위에 길게 늘어져 있었지만, 그 정적 속에서 유난히 걸리는 소리 하나가 없다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늘 방 안에서 옷자락 스치는 소리라도 들려왔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없이 숨죽인 듯한 고요함만 감돌고 있었다. 현우는 그 이질감에 발걸음을 멈추고, 문 앞에서 잠시 귀를 기울였다.
문틈 사이로 보인 건, 책상 위에 놓인 얇은 단검과, 그 앞에 앉아 소맷자락을 걷어 올린 은채의 팔이었다.
피부 위로 이미 몇 개의 옛 흉터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걸 본 순간, 현우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며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손끝이 문고리를 잡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 것 같았다.
"뭐 하는 거예요!"
목소리가 예상보다 크게 터져 나왔다. 은채는 놀란 얼굴로 단검을 손에서 놓쳤고, 그것이 바닥에 떨어지며 쇳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갈라놓듯 날카롭게 울렸다.
"공, 공자님."
그녀는 황급히 소매를 내려 팔을 가리려 했지만, 이미 현우의 눈에는 그 흉터들이 선명하게 박혀버린 뒤였다. 오래된 것도 있었고, 아직 색이 채 가라앉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 사이사이의 간격을 보아,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왜 그런 짓을."
현우가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려 하자, 은채는 몸을 뒤로 물리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 거부의 몸짓이 오히려 현우의 가슴을 더 답답하게 만들었다.
"소인이, 어제 공자님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연회에서 검은 안개가 나타났을 때 소인이 좀 더 빠르게 움직였어야 했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런 실수를 한 자는 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이 정도 상처로는 부족합니다."
현우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자신이 알던 게임 속 설정 — 은채의 광적인 충성심 — 이 실제로 이렇게 자신의 몸을 해치는 방식으로 표출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목격했다.
'이게 충성이라고?'
그저 텍스트로만 읊었던 캐릭터 설정이, 지금 눈앞에서 피부 위 흉터로 실체화되어 있었다. 이건 그가 원하던 방식이 아니었다. 화면 너머로 보던 설정 소개창과, 지금 눈앞에서 소맷자락을 부여잡고 떨고 있는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현우는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조차 가늠하지 못했다.
"부족하다고요? 이게 왜 부족해요."
목소리를 낮췄지만 떨림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저 팔 위에 새겨진 흔적들이 하나같이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에,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은채는 현우의 침묵을, 그리고 뒤이은 되물음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자신이 실망을 안겼다고, 자신의 부족함이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고 여긴 그녀는 오히려 더 깊이 고개를 숙이며 단검을 다시 주우려 했다.
"소인을 벌하지 않으시겠다면, 소인이 직접."
"그만해요!"
현우가 소리쳤다. 자신의 목소리가 이렇게 크게 터져 나온 게 놀라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가 손을 뻗어 단검을 낚아채듯 집어 들고 창밖으로 던져버리자, 은채는 얼어붙은 얼굴로 그 행동을 지켜보았다. 마치 처음 보는 낯선 짐승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녀의 시선 속에는 당황과 두려움, 그리고 그 아래 깔린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뒤섞여 있는 것 같았다.
"공자님, 그것은 소인의 것이온데."
"필요 없어요, 그런 거."
현우는 숨을 몰아쉬며 그렇게 말했지만, 정작 그 말이 은채에게 어떤 의미로 닿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당신 몸을 그렇게 다치게 하는 게 나를 지키는 게 아니에요."
말이 끝나고도 한참, 방 안에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 남았다. 현우는 자신이 뭘 어떻게 더 설명해야 할지 몰라 그저 그녀의 팔을, 정확히는 그 위의 흉터를 다시 한번 눈으로 훑었다. 볼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은채는 그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모셔온 사람들 — 아니, 정확히는 게임 설정 속에서나 봤던 다른 남성 권력자들이라면, 이런 충성심을 오히려 이용하거나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다. 몸을 바쳐 증명하는 복종을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더 큰 헌신을 요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이 소년은 오히려 자신의 상처를 막으려 했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에 담긴 표정이 낯설어서, 은채는 순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조차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다르다.'
그 생각이 은채의 머릿속에서 처음으로 명확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 사람은 자신이 알던 그 어떤 권력자와도 다르다는 확신이, 서늘하게 식어 있던 그녀의 가슴 한쪽에 조그마한 균열을 만들어냈다. 그 균열 사이로 무언가가 비집고 들어오려는 것 같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다.
창밖으로 던져진 단검이 정원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고, 두 사람은 그 정적 속에서 서로를 마주한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침 햇살이 방 안 깊숙이 밀려들어 왔지만, 그 빛조차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지는 못하는 듯했다.
그저, 은채의 소맷자락 아래로 다시 감춰진 흉터와, 그것을 끝내 지우지 못한 현우의 시선만이 그 방 안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