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미궁을 밝힌 금지된 불

5화

"엎드려!" 애가 소리치며 지팡이를 뻗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와, 나 살고 싶어하는구나.' 이 와중에 그런 생각이 스쳤다. 지팡이 끝에서 보라색 빛이 확 터졌다. 작은 폭발이었다. 놈의 얼굴 정면을 때리고, 눈을 순간적으로 멀게 만들었다. 끼에에엑! 놈이 뒤로 물러나며 몸을 뒤틀었다. 부리가 허공을 몇 번 헛물었다. '저 지팡이, 진짜 마법이었나.' 솔직히 말해서 반신반의했다. 이런 미궁 안에서 마법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애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코스프레인가 싶었다. 아니면 관광객이거나. 그런데 지금 보니 진짜였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네.' 하지만 놈은 완전히 죽지 않았다. 독침 한 대로는 상위 개체를 재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눈이 멀었어도 냄새로 방향을 잡는지, 놈은 여전히 우리 쪽으로 부리를 겨누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독을 더 빠르게 퍼뜨릴 방법.' 시간이 없었다. 몇 초, 아니 몇 초도 안 될 시간이었다. 머릿속에서 재료 보관함의 내용물이 순서대로 스쳐 지나갔다. 독버섯 가루는 반응이 느리다. 마비독은 이미 다 썼다. 남은 건 딱 하나였다. 그때 애가 다시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지팡이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한 번 더 할 수 있다! 근데 이게 마지막이다!" 애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소리쳤다. '저 애도 재료가 한계라는 거네.' 목소리에서부터 여유가 하나도 없었다. 겁먹은 게 아니라, 진짜로 벼랑 끝이라는 뜻이었다. 똑같은 처지였다. 둘 다 마지막 한 수를 쓰기 직전이었다. 이렇게 처음 만난 사이끼리 같은 벼랑에 서 있다는 게 웃기지도 않았다. '그래, 여기까지 왔으면 갈 데까지 가야지.' 나는 결심했다. "내가 신호하면 그 마법 쏴." 나는 짧게 지시했다. "으, 응!" 애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눈은 여전히 반쯤 풀려 있었지만, 손은 지팡이를 놓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근성은 있네.' 나는 은신처 안쪽으로 뛰어들어 재료 보관함을 뒤졌다. 손이 떨려서 뚜껑 하나 여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독버섯 가루,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겨뒀던 정제된 독액 한 병. 원래는 아껴서 시간 들여 취독관용 독침으로 만들 재료였다. 삼 년 동안 애지중지 보관해온 놈이었다. 언젠가 상위 몬스터 사냥에 쓰겠다고 마음먹고, 손도 안 대고 모셔둔 병이었다. [경고: 재료 소진 임박] 시스템 창이 눈앞에 떴다. '그래, 알아. 안 그래도 소진되게 생겼어.' '상관없어, 오늘 못 살면 아낄 이유도 없잖아.' 나는 병을 챙겨 다시 뛰어나갔다. 놈은 여전히 부리를 흔들며 방향을 못 잡고 있었다. 지금이 기회였다. 나는 독액을 부리째 병에 부어 놈의 얼굴 쪽으로 확 뿌렸다. 차갑고 시큰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놈이 순간 부리를 흔들며 뒷걸음질 쳤다. 독이 눈과 콧구멍으로 스며드는 게 보였다. 끼에엑, 끼에엑 하는 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지금!" 나는 소리쳤다. 애가 지팡이를 뻗었다. 손끝까지 하얗게 질린 채로, 온몸으로 지팡이를 붙잡고 있었다. 보라색 빛이 다시 터졌다. 독에 젖은 놈의 얼굴 정면으로 폭발이 직격했다. 퍼엉! 그 순간, 독과 마법 폭발이 뒤섞이며 이상한 화학 반응이 일어났다. 연기가 초록빛으로 변하더니, 놈의 몸 전체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놈은 반쯤 뻗은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대상 완전 마비] [특수 조합 판정: 독액 + 마법 폭발 = 상성 발동] '이런 조합도 되는구나.'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다 지나갔다. '이거 나중에 레시피로 정리해둬야겠다.' 사경을 헤매다 살아난 순간에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좀 웃기긴 했다. 놈이 그대로 쿵, 쓰러졌다. 바닥이 살짝 흔들렸다.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었다. 뒤따라오던 다른 닭도깨비들도, 두목쯤 되는 놈이 쓰러지자 통로 안에서 어물쩡거리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서열이 있는 놈들이었다, 그것도 처음 알았다. 삼 년을 이 미궁에 있었는데 몰랐던 사실이었다. '하긴, 알 필요도 없었지, 마주칠 일이 없었으니까.' 한참을 그렇게 서서 숨만 몰아쉬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았다. 심장은 아직도 벌렁거리고 있었다. "...살았다." 애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지팡이를 놓지도 못하고, 그냥 손에 꽉 쥐고 있었다. "운이 좋았지." 나는 짧게 답했다. '운이 아니라 재료가 다 나가서 다행이었던 거지.' 솔직히 저 지팡이가 아니었으면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거다. 근데 그걸 대놓고 말하기엔 좀 민망했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아니, 나중에.' 주변을 정리하고 나서야 내 은신처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철문은 반쯤 뜯겨나갔고, 재료 보관함은 뒤집혀 있었다. 바닥에는 부서진 병 조각과 흩어진 가루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삼 년간 숨겨온 자리가, 오늘 하루로 반쯤 노출된 셈이었다. '이제 여기도 안전하다고 못하겠네.' 허탈했다. 삼 년 동안 조심조심 지켜온 자리였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냄새 하나까지 신경 쓰며 살았던 곳이었다. 그런데 그게 하루아침에 이렇게 됐다. 나는 애를 돌아봤다. 보라색 머리카락은 여기저기 흙투성이였고, 눈은 여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교복인지 로브인지 애매한 옷도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딱 봐도 여기 있을 애가 아닌데.' "넌 대체 뭐야." 나는 물었다. "...마법 배우는 사람인데. 여, 여기 뭐 있다고 해서 온 거고." 애가 더듬으며 답했다. 목소리가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뭐 있다고 누가 그래?" 나는 다시 물었다. "인터넷에... 소문이 있었어. 여기 뭔가 대박 나는 게 있다고." 애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말했다. '그 소문 낸 놈은 대체 누구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삼 년 동안 아무도 몰랐던 자리였다. 그런데 소문이라니. 누가, 왜, 언제부터 그런 말을 퍼뜨렸는지 도무지 짐작이 안 갔다. 그러고 보니, 이 미궁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지상에 퍼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정확히 어디서 들었는지는 기억이 안 났다. 그냥 스쳐 지나가듯 들은 얘기였는데, 이렇게 눈앞에서 현실이 되어 나타날 줄은 몰랐다. 삼 년 동안 조용했던 이 미궁이, 오늘 이후로 더 이상 조용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 예감이 든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설마 이 애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겠지.' 그리고 그 예감은, 며칠 뒤 지상 어딘가에서 실제로 소문이 퍼지는 순간 사실로 확인될 거였다. 지금은 나도, 저 애도, 그걸 전혀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 애는 여전히 바닥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고, 나는 뜯겨나간 철문을 붙잡고 이걸 어떻게 다시 세워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그 순간, 통로 안쪽에서 낮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물러났던 닭도깨비들의 것이 아니었다. 훨씬 크고, 훨씬 낮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설마.' 나는 반쯤 뜯긴 철문 틈으로 통로 안쪽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크기는, 방금 쓰러뜨린 놈보다 훨씬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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