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작전 승인이 난 지 사흘 뒤, 나는 최도진을 데리고 처음으로 하계에 발을 디뎠다.
관문을 넘어서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코끝에 걸리는 냄새부터 이상했다. 흙냄새인데, 뭔가 탄 것 같은 냄새가 섞여 있었다. 발밑의 땅은 갈라져 있었고, 그 틈새로 희끄무레한 먼지가 올라왔다.
하계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마른 들판, 무너진 돌담, 그리고 저 멀리 검은 안개가 낮게 깔린 산자락. 재앙의 영역이 이렇게까지 가까이 온 걸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마른 풀이 서로 부딪히며 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외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새도, 벌레도, 아무것도 없었다.
"조용하네." 내가 중얼거렸다.
"조용한 게 아니다." 최도진이 짧게 정정했다. "다 죽었거나 도망갔다는 뜻이지."
맞는 말이었다. 굳이 정정할 필요도 없었는데. 나는 입을 다물었다.
"신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최도진이 옆에서 나를 힐끔 보며 물었다.
"무슨 뜻이야."
"네 몸에서 나는 기운이 약하다. 여신이라면서 왜 이렇게 힘이 없냐."
정확한 지적이었다. 정확해서 더 짜증이 났다.
"3할이야."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제 와서 숨길 이유도 없었다. "원래 힘의 3할밖에 안 남았어."
최도진이 걸음을 멈췄다.
"그런 상태로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고."
"방법이 없었으니까."
"7할은 어디 갔냐."
"그건." 나는 잠깐 말을 골랐다. "지금 설명하기 복잡해."
"복잡한 게 아니라 말하기 싫은 거겠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대답 대신 걸음을 다시 옮겼다.
최도진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됐다. 이제 와서 물릴 수도 없지."
이상하게 그 말이 위로가 됐다. 아니, 정확히는 위로라기보다는, 이 남자가 나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는 확인 같았다.
걷는 동안 최도진은 몇 번 더 나를 힐끔거렸다.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 눈치였는데, 결국 묻지 않았다. 나도 굳이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이 편했다. 적어도 이 순간엔 그랬다.
다경이 우리보다 앞서 정찰한 결과, 관문 근처 마을 하나가 이미 마물의 습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우리는 곧바로 그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다경이 다시 한 번 신호를 보냈다. 급하다는 뜻이었다.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최도진도 말없이 속도를 맞췄다.
마을은 작았다. 열 몇 채쯤 되는 집들이 모여 있었고, 그중 몇 채가 이미 무너져 있었다. 지붕이 통째로 날아간 집도 있었고, 벽만 남고 안이 텅 빈 집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회당 안에 모여 숨어 있었고, 마물 무리가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회당 문틈으로 사람들의 눈이 보였다. 겁에 질린 눈들이었다. 아이도 있었다. 나는 그 눈을 보는 순간, 3할이라는 숫자가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숫자는 관문에서 봤던 것보다 적었다. 대신 크기가 더 컸다.
"이건." 다경이 마물들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하급이 아닙니다. 중급 이상입니다. 관문에서 나온 무리보다 등급이 높습니다."
"예상 밖이라는 거네." 내가 물었다.
"보고에 없던 개체입니다. 재앙 쪽에서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상치 못한 변수.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소식이었다.
마물들은 회당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돌고 있었다. 몸통은 개보다 크고 곰보다는 작았는데, 등에 뾰족한 돌기 같은 게 솟아 있었다. 그 돌기에서 검은 안개가 조금씩 새어나왔다. 관문에서 본 마물들은 저런 걸 달고 있지 않았다.
"저 돌기는 뭐야." 내가 다경에게 물었다.
"모릅니다. 처음 보는 형태입니다."
모른다는 대답이 제일 무서운 대답이었다.
최도진이 검을 뽑았다. 여전히 날이 무딘 장검이었다. 손잡이를 고쳐 잡는 손이 담담했다.
"몇 마리냐."
"다섯입니다." 다경이 대답했다. "관문 무리 전체보다는 적지만, 개체 하나하나의 힘은 훨씬 강합니다."
"그럼 다섯이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최도진이 앞으로 나섰다.
"안 돼." 나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지난번에 어떻게 됐는지 잊었어? 이번엔 상대가 더 강하다고 했잖아."
"저 회당 안에 사람들이 있다." 최도진이 내 손을 조용히 떼어냈다. "내가 여기서 뒤로 물러서면, 저 사람들은 죽는다."
"그건 알아. 하지만—"
"살아서도, 죽어서도, 뒤에서 사람이 죽는 걸 보고만 있었던 적이 없다." 최도진의 목소리가 낮고 단단했다. "이번에도 그럴 생각 없다."
나는 그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알고 있었다. 강. 화살. 그 순간에도 이 남자는 등을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대가로 죽었다.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말려도 듣지 않을 걸 알았다. 이 남자는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사람이었다.
다경이 서둘러 회복 마법 준비를 시작했다. 손끝에서 옅은 빛이 감돌았다. 나는 최도진의 등을 잠깐 바라봤다. 이미 결심이 선 등이었다. 말려도 듣지 않을 거라는 걸, 나는 이제 알고 있었다.
"내가 신력을 나눠줄게." 나는 대신 그렇게 말했다. "3할이라도 없는 것보단 나을 거야."
최도진이 잠깐 나를 돌아봤다. 그러곤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하면 부탁하지."
그 말 한 마디가 왜 그렇게 크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부탁한다는 말. 이 남자 입에서 나온 몇 안 되는 부탁 중 하나였다.
최도진이 마물 무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서걱.
첫 번째 마물이 반으로 갈라졌다. 등의 돌기가 잘리는 순간, 검은 안개가 흩어지며 짧은 비명 같은 소리가 났다. 사람의 비명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등골이 서늘했다.
그러나 곧바로 두 번째 마물이 최도진의 옆구리를 향해 날카로운 발톱을 뻗었다. 최도진이 몸을 틀어 피했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갑옷 위로 붉은 줄이 그어졌다.
"괜찮다." 최도진이 통증을 무시한 채 다시 검을 휘둘렀다.
세 번째 마물이 옆에서 달려들었다. 최도진은 그 자리에서 몸을 낮추고 검을 아래에서 위로 그었다. 마물의 아래턱이 갈라졌다. 재로 흩어지기까지 몇 초의 시간이 걸렸다.
하나, 둘, 마물이 쓰러졌다. 그러나 남은 두 마리가 동시에 달려들었을 때, 최도진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지난번처럼, 몸이 힘의 대가를 치르기 시작한 거였다.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검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그 떨림을 봤다.
"안 돼." 나는 정신없이 신력을 흘려보냈다. 손끝에서 빠져나가는 힘이 아깝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버텨."
최도진의 눈빛이 다시 변했다. 신력이 흘러든 순간, 검을 쥔 손에 힘이 돌아왔다. 남은 두 마리를 동시에 베어 넘겼다.
마지막 마물이 재로 흩어지는 순간, 최도진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괜찮아?" 나는 급히 달려갔다.
"괜찮다." 최도진이 대답했다. 그런데 이번엔 목소리가 이상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지난번과는 다른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몸을 갈아 쓰는 것과는 다른, 더 낯선 기운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눈동자 색이 조금 이상했다. 원래보다 짙어진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착각인지 아닌지 판단이 안 됐다.
다경이 급히 다가와 그의 상태를 살피더니,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이건." 다경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건 단순한 소모가 아닙니다. 뭔가가—"
"뭔가가 뭐." 나는 다경을 다그쳤다.
다경이 대답하려는 순간, 그의 손이 최도진의 손목을 짚었다. 그리고 그 손이 그대로 굳었다.
"맥이." 다경이 말을 잇지 못했다. "이상합니다. 사람의 맥이 아닙니다."
사람의 맥이 아니다. 그 말이 머릿속에서 몇 번을 굴러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을 회당이 있던 방향에서 땅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쿠구구구궁.
땅이 흔들렸다. 발밑의 흙이 잔물결처럼 움직였다. 회당 안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새어나왔다.
검은 안개가 갑자기 짙어졌다. 방금 쓰러뜨린 다섯 마리는, 아무래도 전초에 불과했던 모양이었다.
그 안개 속에서, 뭔가 거대한 형체가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다.
크기부터 달랐다. 방금 상대한 마물들이 개나 곰만 했다면, 저건 그 열 배는 되어 보였다. 형체가 완전히 드러나기도 전에, 주변의 마른 풀들이 그쪽으로 빨려가듯 눕는 게 보였다.
다경의 손이 떨렸다. 나는 다경이 이런 표정을 짓는 걸 처음 봤다.
최도진이 무릎을 꿇은 채로 그 형체를 올려다봤다. 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단순한 통증이 아닌 다른 감정이 스쳤다.
나는 그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강에서, 화살을 맞고 빠져 죽어가던 그 순간과 같은 표정이었다.
숨을 쉬는 게 잊혔다. 저 형체가 완전히 일어서기 전에,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을 채웠다. 그런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최도진의 무릎이 여전히 땅에 붙어 있었다. 일어나려는 기색도 없었다.
"일어나." 내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일어나야 해."
최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안개 속의 형체에 고정돼 있었다. 그 눈에서, 나는 처음으로 이 남자가 진짜로 두려워하는 걸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