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패배한 명장, 여신의 검

1화

천계 재무부, 정식 명칭은 '생명향(生命向) 신력관리원'. 나는 그 삼층 회의실 상석에 앉아 방금 받은 결산 보고서를 세 번째로 다시 읽고 있었다. 숫자가 바뀌지 않았다. 세 번을 읽어도 그대로였다. 보고서는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딱 서른두 장짜리였다. 표지에는 신력관리원 인장이 금박으로 찍혀 있었는데, 그 인장이 유독 반짝여서 짜증이 났다. 안은 반짝이지 않는데 겉만 번쩍거리는 게 딱 지금 우리 천계 사정 같았다. "마나 잔고, 지난 계절 대비 42퍼센트 감소." 신탁관이 보고서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목소리가 사무적이었다. 이런 순간에도 사무적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결계 유지 비용은 늘었고, 하계 기도 수신율은 줄었습니다. 이대로면 다음 절기 안에 천계 전체 결계 유지가 불가능합니다." "수신율이 왜 줄어." "전쟁이 두 곳에서 동시에 터졌습니다. 사람들이 기도할 정신이 없다고 합니다." 기가 찼다. 기도할 정신이 없어서 우리가 망하게 생겼다니. 인간들이 알면 미안해할까, 아니면 자기들 살기 바쁘다며 오히려 우리한테 뭐라고 할까. 둘 다일 것 같았다. 괜찮다. 괜찮을 리가 없지만 일단 괜찮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대지와 생명을 관장하는 여신이다. 하계의 강과 밭과 사람들의 기도가 곧 나의 힘이고, 그 힘이 다시 천계 전체를 굴린다. 순환이 원래 그렇게 짜여 있었다. 문제는 그 순환의 한쪽 끝을, 누군가 몰래 잘라먹고 있다는 거였다. "경계 지역 마나 유출은?" 내가 물었다. "셋째 관문 인근에서 계속 확인됩니다. 흡수원 추정 개체는—" 신탁관이 잠시 말을 골랐다. "재앙, 이라 부르는 그것입니다." 재앙. 이름을 붙이기도 싫어서 다들 그렇게만 부르는 존재. 한때는 나와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보고서를 읽던 신이었다는 걸, 이 방 안의 몇몇은 알고 있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회의실 벽에 걸린 지도 위, 셋째 관문 부근에 표시된 검은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저번 회의 때보다 손가락 하나 마디만큼 넓어져 있었다. 지도 관리 담당이 매주 색을 덧칠하는데, 이번 주는 유독 붓질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용사 소환 건은 어떻게 됐지." 나는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회의실 공기가 조금 이상해졌다. 신탁관 옆에 서 있던 다경이 슬쩍 눈을 피했다. 다경은 내 오른팔이자 천계 회복 마법 전담이고, 동시에 내가 사고를 칠 때마다 뒤를 치우는 담당이었다. 그 다경이 눈을 피한다는 건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세 명 모두," 다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탈했습니다." "이탈." 나는 그 단어를 그대로 따라 말했다. "도망갔다는 거야?" "첫 번째 용사는 소환 사흘째 되는 날 밤에 결계 틈으로 빠져나갔고," 다경이 손가락을 하나 접었다. "두 번째 용사는 재앙의 그림자만 보고 자결했고," 손가락 두 개. "세 번째는—" 다경이 헛기침을 했다. "셋째는 아예 소환진에서 눈을 뜨자마자 자기가 사기당했다고 소리치며 도망쳤습니다. 계약서를 흔들면서요." "계약서를 흔들면서 도망갔다고?" "소환진 밖으로 나가면서 계속 흔들었습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계약서 자체는 챙겨 나가지 않고 그냥 흔들기만 하다가 바닥에 떨어뜨리고 갔더군요." 사기당했다니. 억울한 표현이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정중한 소환문을 썼고 계약서까지 준비했다. 조항도 스물두 개나 됐고, 위약금 조항도, 하계 귀환 보장 조항도 다 넣었다. 다만 그 계약서 어디에도 재앙이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지금 천계의 마나 사정이 얼마나 나쁜지는 정확히 쓰지 않았을 뿐이다. 작은 누락이다. 세 명 다 도망갈 정도의 누락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보상금은 지급됐어?" "세 명 다 이탈 조항에 걸려서 지급 보류 중입니다." "그거 나중에 소송 걸릴 수도 있는 거 아니야?" "하계 법으로는 걸 수 있을 것 같은데, 천계 소환 계약은 하계 법정 관할이 아니라서요." 다경이 조금 안도한 얼굴로 말했다. 그 얼굴이 얄미웠다. 지금 우리가 안도할 처지가 아닌데. "그래서." 나는 보고서를 탁 소리 나게 덮었다. "용사도 없고, 마나도 없고, 재앙은 계속 몸을 불리고 있다는 거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곧 정답이었다. 창밖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하계로 이어지는 균열 사이로, 저 멀리 검은 안개가 조금씩 넓어지는 게 보였다. 재앙의 영역이었다. 지난달보다 눈에 띄게 커졌다. 안개는 마치 숨을 쉬듯 부풀었다가 줄었다가 했는데, 부풀 때마다 우리 결계 어딘가가 조금씩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실제로 들리는 건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느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심을 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원래도 그런 성격이었다. 생각을 오래 하는 편이 아니었고, 오래 생각해서 나은 결과가 나온 적도 별로 없었다. "내가 직접 내려간다." 회의실이 한순간 완전히 조용해졌다. 누군가 들고 있던 서류철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여신님." 다경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지금 신력이 3할 이하입니다. 강림하시면 하계에서 그 신력을 유지할 방법이 없어요. 형체를 유지하는 데만도—" "알아." "아신다면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다경이 이렇게 정면으로 말을 받아친 건 오랜만이었다. 화가 났다는 뜻이다. 나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말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셋 다 도망갔어. 다음 용사를 또 뽑는다고 해서 다를 것 같아? 소환 절차만 최소 열흘이야. 계약서 다시 쓰고, 검토받고, 예산 다시 배정받고. 그럴 시간도 없어." 나는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검은 안개가 아까보다 조금 더 짙어진 것 같았다. 착각이었으면 좋겠지만 착각이 아닐 것 같았다. "직접 가서 뿌리를 뽑는 게 제일 빠른 방법이야." "가서 죽으시면 뿌리를 뽑는 게 아니라 뿌리 옆에 하나 더 묻히는 겁니다." 말이 심했다. 그런데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게 더 짜증 났다. "방법이 없잖아." 내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감정을 조절하는 게 원래도 잘 안 되는 편이었다. 다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정면으로 반박하지 않는 게 보통이었는데, 다경은 오늘 이상하게 물러서지 않았다.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다경이 손을 들었다. 뭔가를 말리는 손짓이었다. "찾으면 있을 겁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시간이 없다니까. 방금 못 봤어? 저 안개 지난달보다 세 배는 커졌어." "세 배는 아니고 두 배쯤—" 신탁관이 조용히 정정하려다 내 눈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하루입니다." 다경이 다시 말했다. "딱 하루만 주십시오." 나는 다경을 노려봤다. 다경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지금쯤 시선을 내리고 "알겠습니다"라고 했을 텐데, 오늘은 눈에 뭔가 있었다. 이미 생각해 둔 게 있다는 뜻이었다. 다경이 저런 눈으로 버틸 때는 대체로, 뭔가 나한테 말하기 싫은 방법을 갖고 있을 때였다. 지난번에도 그랬다. 그때도 결과가 그렇게 좋진 않았지만. "뭔데." "비상시에만 쓰는 소환법이 있습니다." 다경이 조용히 말했다. "용사가 아니라, 이미 죽은 자를 데려오는 방식입니다." 회의실 안의 몇몇이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 신탁관은 아예 뒷걸음질을 반 발짝 쳤다. 그 소환법이 뭔지, 왜 다들 그렇게 얼굴이 굳는지, 나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했다. 이름조차 처음 듣는 소환법이었다. 다경이 이런 걸 알고 있으면서 지금까지 말 안 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조금 불쾌했지만, 그보다는 다경이 이 얘기를 이렇게 진지하게 꺼낸다는 것 자체가 상황이 이미 벼랑 끝이라는 뜻이라는 게 더 문제였다. "설명해봐." 다경이 입을 열려는 순간, 회의실 바닥이 흔들렸다. 짧게, 그러나 분명하게. 쿠구궁.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이 달그락거리다가 살짝 넘어졌다. 다행히 비어 있던 잔이었다. 신탁관이 반사적으로 창가로 달려갔다. "경계 셋째 관문, 마나 압력 급상승! 재앙 쪽 활동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저 검은 안개가 오늘 밤 안에 또 넓어질 거라는 걸. 다경이 말한 하루조차 사치일 수도 있다는 걸. 창밖으로 보이는 안개 끝자락이 마치 손가락처럼 결계 쪽으로 뻗어 나오는 게 보였다. 그 손가락이 결계 표면을 스치자, 결계 전체가 유리처럼 미세하게 떨렸다. "됐어." 나는 손을 저었다. "설명은 나중에 듣고, 지금 당장 그 소환, 시작해." "여신님, 이 소환법은 절차가 까다롭습니다. 재료도 준비해야 하고, 좌표 설정도—" "다경." 내가 이름만 부르자 다경이 말을 멈췄다. 회의실 안 다른 이들도 조용해졌다. 안개가 또 한 번 결계를 스쳤다. 이번엔 소리가 났다. 유리 갈라지는 소리 비슷한, 가늘고 높은 소리였다. 다경이 나를 잠깐 쳐다봤다.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삼켰다. 그리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하겠습니다. 다만—" 다경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떨렸다. "이 소환법으로 뭐가 오는지는, 저도 정확히 예측 못 합니다. 원래 이건 아무나 데려오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 상황에 가장 필요한 자를 끌어오는 방식이라서요. 그게 누가 될지는, 소환진이 열리기 전까지 아무도 모릅니다."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신탁관들이 다급히 흩어져 준비를 시작하는 동안, 나는 다시 창가에 섰다. 검은 안개는 이제 결계 표면에 완전히 달라붙어 있었다. 마치 무언가가 문을 두드리는 것처럼, 안개 끝이 결계를 규칙적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똑, 똑.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진동은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좋은 소식을 기대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는 걸, 나는 곧 알게 될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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