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죽은 성녀, 30년 후 귀환

5화

산길을 얼마나 뛰었는지 모르겠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는 이미 감각이 없었다. 발바닥에 닿는 흙과 돌부리의 감촉조차 무뎌져서, 내가 제대로 걷고 있는지 구르고 있는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발을 멈추지 못했다. 등 뒤에서 들려온 그 한마디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용사님께 보고한다. 짧은 문장 하나가 이렇게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 수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삼십 년 전 나를 죽인 사람에게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실마리가 하나 남겨진 셈이었다. 물론 이름을 밝히지 않았으니 당장 정체가 드러나진 않겠지만, 마력 오염 지역에서 이상한 힘을 쓰는 장인이 있다는 정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했다. 강도현이라면, 그 정보 하나로 지도를 그리고, 사람을 추리고, 결국 이 산자락까지 손끝을 뻗어올 인간이었다. 숨이 가빠질 때마다 코끝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아까 흘린 코피가 아직 다 멎지 않은 모양이었다. 손등으로 슥 닦아내니 검붉은 얼룩이 묻어났다. 화려하게 죽어가는 기분이었다. "…따라오는 사람은 없지?" [없다. 다만 안심할 처지도 아니다.] "알아. 알지, 알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서 더는 못 뛸 것 같았다. 나는 늑대를 안은 채 나무 그늘에 등을 기대고 미끄러지듯 앉았다. 등에 닿는 나무껍질이 까칠했다. 그 촉감이 오히려 반가웠다. 뭐라도 붙잡고 있다는 느낌이 필요했으니까. 새끼는 여전히 정신을 잃은 상태였지만, 숨소리는 안정적이었다. 가슴이 오르내리는 리듬이 일정했다. 마력 봉인이 다시 걸린 건지, 아니면 그냥 지쳐서 잠든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은빛 털에서 뿜어져 나오던 그 빛이 사라진 걸 보면 후자에 가까운 것 같기도 했다. "진리, 이제 진짜로 말해봐. 이 늑대, 뭐야." […어느 정도까지 말해줄지 정해야겠구나.] "정해지는 거야? 흥정하는 거야?" [둘 다니라.] 너무나 당당한 대답에 헛웃음이 나왔다. 방금까지 근위대 창에 찔릴 뻔했고, 코피를 흘리며 산속을 가로질러 도망쳤는데, 이런 순간에도 이 정령은 조건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정령이라는 존재가 이렇게까지 얄짤없이 실리적일 줄은 나도 몰랐다. "좋아. 뭘 원하는데." [사과 세 개.] "코피 흘리면서 산속을 뛰어다니고 왔는데 사과 세 개로 정보를 사라고?" [정보의 가치는 사과 세 개다. 흥정할 여지는 있느니라.] "…두 개." [두 개 반.] "…좋아, 콜." 어이없게도 협상이 성립됐다. 이런 상황에서 사과값을 놓고 흥정하는 나 자신도 웃겼지만, 진리라는 존재를 상대하려면 이 방식이 제일 빠르다는 걸 이제는 안다. 감정에 호소해봐야 소용없고, 논리로 밀어붙여도 소용없다. 사과 두 개 반, 그게 이 세계에서 제일 확실한 화폐였다. [저 늑대는 마왕이 남긴 잔재 중 하나다. 정확히는, 마왕의 마력을 소량 이어받은 개체지.] "…뭐?" [놀랄 것 없다. 마왕이 토벌될 때, 그 마력의 일부가 산산이 흩어져 근처 생물들에게 흡수됐다는 기록이 있느니라. 대부분은 그냥 사라지지만, 극히 드물게 그 마력을 온전히 흡수해 살아남는 개체가 나타난다. 저 늑대가 그런 경우다.] 마왕의 잔재. 그 말에 나는 품속의 늑대를 내려다봤다. 은빛 털이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방금까지 은빛 마력을 뿜어내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손끝으로 살짝 건드려보니 아직도 미열처럼 은은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보통 새끼 늑대의 체온이라고 하기엔 너무 높았다. "…그러니까 이 조그만 게, 마왕 그 인간의 부산물이라는 거지." [정확히 말하면 부산물이라기보다는 조각이다. 마왕이라는 존재가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일부가 다른 생명 속에 스며들어 살아남은 형태지.] "뭔가 되게 불길한 유산이네." [유산은 원래 다 불길하니라. 물려받는 순간부터 골칫거리가 되지 않느냐.] 이 정령은 가끔 뜻밖의 진리를 아무렇지 않게 던진다. 이름값은 한다는 뜻인지. "왕실이 이걸 왜 처리하려고 해?" [마왕의 잔재라는 존재 자체가 위험 요소니까. 만약 저 개체가 완전히 각성하면, 마왕에 필적하는 힘을 낼 수도 있다는 게 그들의 우려겠지.] "완전히 각성한다는 게 구체적으로 뭔데. 지금도 저렇게 빛을 뿜어대는데, 더 심해지면 어떻게 되는 거야." [지금은 본능적으로 마력이 흘러나오는 수준이다. 위협을 느끼거나 흥분했을 때 새어 나오는 정도지. 완전한 각성은 그 마력을 스스로 인지하고, 의지에 따라 다룰 수 있게 되는 순간을 말한다. 그렇게 되면 단순한 늑대가 아니라 하나의 재앙이 되는 게지.] "재앙이라니 표현이 참…" [사실이니라.] "그리고 그 조사를 강도현이 지휘하고 있고." [그렇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마왕을 홀로 잡았다고 세상에 알려진 강도현이, 마왕의 잔재를 추적한다는 명분으로 이 지역을 뒤지고 있다면, 그 이유는 단순한 안전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 잔재를 없애서 자기 서사에 흠집을 낼 요소를 모조리 지우려는 것일지도. 마왕을 완벽하게 끝장낸 용사, 그 완벽한 서사에 '사실은 조각이 남아 있었다'는 얼룩이 남는 걸 그가 두고 볼 리 없었다. "…이제 이해가 되네. 왜 이렇게까지 인원을 붙였는지." [그리고 왜 네가 위험한지도.] "내가?" [너는 방금 그 잔재의 마력을 조화의 힘으로 다뤘다. 그것도 성공적으로. 근위대원들이 그걸 봤지. 만약 그 정보가 강도현에게 전달된다면, 그는 반드시 관심을 가질 것이다.] 조화의 힘. 성녀만이 다룰 수 있는, 스킬창에는 뜨지 않는 힘. 그걸 다루는 사람이 이 지역에 있다는 사실이 강도현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가 무엇을 떠올릴지는 뻔했다. 삼십 년 전 자신이 죽였다고 믿는, 유일하게 조화의 힘을 다루던 여자. 속이 울렁거렸다. 코피가 다시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이건 그냥 순수한 공포였다. 계산할 필요도 없이, 몸이 먼저 알아채고 반응하는 종류의. "…망했네." [아직 이름은 밝히지 않았으니 시간은 있다.] "시간이 있어봤자 뭐 얼마나 있겠어. 근위대원들 눈으로 직접 본 걸 다 기억할 텐데. 조화의 힘을 쓰는 장인, 그 지역, 그 시기. 하나씩 짜맞추면 답이 나오는 게 시간 문제 아니야?" […맞는 말이다. 부정은 못하겠구나.] "위로 좀 해줘, 정령아. 사과값도 받아먹었잖아." [위로는 계약 조건에 없었느니라.] 기가 찼지만 딱히 반박할 말도 없었다. 이 정령은 원래부터 필요한 정보만 딱딱 잘라서 팔았지, 감정 서비스를 곁들여준 적이 없었다. 나는 늑대를 다시 살펴봤다. 상처는 얼추 아물었지만, 완전히 회복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해 보였다. 배 쪽에 남은 상처 자국이 아직도 붉은 기를 띠고 있었다. 이 상태로 마을 근처에 두면 근위대에게 다시 발견될 위험이 있었다. 흑암성으로 데려가는 게 가장 안전할 것 같았다. 적어도 거기는 내 구역이었고, 내 눈이 닿는 곳이었다. "…일단 성으로 데려간다." [좋은 판단이다. 다만 조건이 있느니라.] "또 뭔데." [저 늑대의 마력이 완전히 각성하면, 통제할 수 없는 힘이 될 수도 있다. 데려가겠다면 네가 책임지고 그 힘을 다뤄야 한다는 뜻이니라.] "책임진다는 게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목줄 채워놓으라고?" [비유가 상스럽구나. 말하자면, 저것이 폭주할 조짐을 보이면 네가 조화의 힘으로 억누르거나, 최소한 다른 이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결국 목줄이잖아, 좀 더 고급스러운 표현으로." […부정은 안 하겠느니라.] 책임진다는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안 그래도 몸뚱이 하나 건사하기도 빠듯한 처지에, 마왕의 조각이라는 물건까지 떠맡게 됐다. 이게 무슨 팔자인지. 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돌이킬 수는 없었다. 늑대를 내려놓고 돌아선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았다. 나는 늑대를 더 단단히 품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걸을 수는 있었다. 무릎이 시큰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이 정도는 참을 만했다. 오늘 겪은 일들에 비하면 다리 아픈 건 사치스러운 고통이었다. 산길을 되짚어 흑암성으로 향하는 동안, 안개는 여전히 짙었다. 발밑이 잘 보이지 않아 몇 번이나 나무뿌리에 발이 걸렸다. 그럴 때마다 늑대를 감싼 팔에 힘을 더 줘서 떨어뜨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 안개 어딘가에서 근위대의 발소리가 다시 들리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우며 걸었다. 나뭇잎이 부딪는 소리, 멀리서 새가 우는 소리 하나에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진리, 뒤에 뭐 없는 거 확실해?" [몇 번을 묻느냐. 없다.] "확인은 몇 번을 해도 나쁘지 않아." [불안한 것은 이해하나, 그런다고 안개가 걷히지는 않느니라.] 맞는 말이라 더 얄미웠다. 걷는 내내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산이 오갔다. 성에 도착하면 늑대를 어디 숨겨야 할지, 상처는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강도현의 귀에 내 이름이 들어가지 않을지. 답이 나오지 않는 계산을 계속 돌리다 보니 오히려 걷는 데 집중이 됐다. 나쁘지 않은 방식이었다. 최소한 다리가 아픈 것도, 숨이 찬 것도 잠시 잊을 수 있었으니까. 성문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쯤에서야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회색 돌담이 안개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자,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저기까지만 가면, 최소한 오늘 하루는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성문 앞, 낯선 그림자 하나가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걸음이 뚝 멈췄다. 심장이 아까보다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갑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아까 산에서 본 근위대의 것과는 다른, 더 화려한 장식이 달린 갑옷. 어깨선을 따라 은실로 세공된 문양이 안개 사이로도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 갑옷 어깨에 새겨진 문양을 확인한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용사 전용 부대의 표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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