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죽은 성녀, 30년 후 귀환

2화

신음 소리는 짧고 낮게,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졌다. 짐승이 다쳤을 때 내는 소리와 비슷했지만, 그 안에 섞인 마력의 파동이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어긋난 현을 억지로 뜯을 때 나는 잡음 같았다. 나는 발화석 마도구를 고치러 온 것이지, 이런 걸 확인하러 온 게 아니었다. 등에 멘 공구 가방에는 아직 뜯지도 않은 부품이 그대로 들어 있었고, 마을 사람에게 받은 수리비도 선불로 받아둔 상태였다. 일이나 마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그런데도 발이 소리 나는 쪽으로 저절로 움직였다. 직업병인가 싶었다. 아니면 그냥 오지랖이거나.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느냐.] "뭘 알고 하는 소리야?" [모르니까 하는 소리다. 모르는 곳엔 가지 않는 게 상책이니라.] "그런 소리를 이제야 하네."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느냐. 네가 듣지 않았을 뿐이지.]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진리는 늘 이런 식이었다. 위험이 코앞에 닥쳐야 경고를 하고, 그 경고조차 사후 변명처럼 들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나무 사이를 헤치고 나가자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안개가 낮게 깔려 있어서 시야가 그리 좋지 않았지만, 그 한가운데 은빛 털을 가진 새끼 늑대 한 마리가 다리를 절며 쓰러져 있는 건 똑똑히 보였다. 몸통에 화살이 하나 꽂혀 있었고, 그 화살대에는 낯익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성십자 방패. 청명왕국 왕실 근위대의 표식이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마을 사람이 쏜 게 아니었다. 이 근방 마을에서 근위대의 화살을 구할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면 진짜 근위대가 여기까지 왔다는 뜻인데, 왕실 소속이 왜 이런 산속 몬스터에게, 그것도 새끼 늑대에게 화살을 박아 넣었단 말인가. "이거 왜 이래." […흔한 몬스터라면 근위대가 쓸 화살은 아니지.] "흔한 몬스터가 아니면 뭔데?" [말해주면 사과가 하나 더 필요하다.] "지금 그거 따질 때야?" [따질 때가 아닐수록 확실히 따져야 하는 법이니라.] 세상 진리 같은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걸 보면 이름값은 한다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진리 놀음에 어울려줄 여유가 없었다. 나는 그 진리를 무시하고 늑대에게 다가갔다. 새끼 늑대는 낑낑거리며 뒷걸음질을 쳤지만, 다리 상처 때문에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몸만 뒤틀었다. 그 눈에 담긴 건 순수한 공포였다.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다는 걸 아는 짐승의 눈.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눈빛을 이미 한 번, 다른 사람에게서 본 적이 있었으니까. 삼십 년 전, 성검이 내 심장을 향해 내려오던 순간 강도현의 눈에도 저런 게 있었다. 죄책감과 두려움이 뒤섞인, 그러면서도 결국 방향을 바꾸지 않는 눈. 검을 쥔 손은 떨렸지만, 그 손을 멈추지는 않았다. 옛 생각이 스치는 걸 애써 밀어냈다. 지금은 그럴 시간이 아니었다. "괜찮아. 안 다치게 할게." 말을 걸어봤자 알아들을 리가 없었지만, 목소리의 톤은 짐승도 구분하는 법이다.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화살을 살폈다. 화살촉이 파고든 각도가 심장 근처를 살짝 빗겨나 있었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뽑아내면 출혈이 심해질 각도였다. 대신 상처 주변에 마력을 흘려 넣어 지혈부터 하는 게 먼저였다. 손끝에서 조화의 힘이 흘러나왔다. 원래대로라면 스킬창에 뜨지도 않는, 세상이 인정하지 않는 힘. 마도구 수리할 때나 겨우 쓸모 있다고 여겨지던 그 힘.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 힘이 얼마나 정밀하게 생명을 다룰 수 있는지를. 남들이 화려한 공격 스킬 하나에 목숨을 걸 때, 나는 이 힘으로 부서진 것들을 다시 붙여왔다. 상처 주변의 피가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늑대는 여전히 몸을 떨었지만, 도망치려는 기색은 조금 줄었다. 낑낑거리는 소리도 한 톤 낮아졌다. […독이 섞여 있다.] 진리의 목소리가 갑자기 심각해졌다. 평소의 능글맞은 어투가 사라진 게 먼저 신경 쓰였다. "독?" [화살촉에. 근위대가 흔히 쓰는 마비독이 아니다. 좀 더… 특수한 종류다.] "특수한 종류가 뭔데." […] 진리는 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사과 하나 더 뜯어내려는 흥정용 침묵이 아니라, 뭔가 알면서도 말하기를 주저하는 침묵. 그런 침묵은 대체로 좋은 소식을 감추고 있지 않았다. "진리." [급하다. 우선 독부터 제거해야 할 것 같으니라.] 뭔가 넘어간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늑대의 상태가 더 급했다. 나는 마력을 좀 더 세밀하게 조율해 화살촉 주변의 독을 분리했다. 조화의 힘은 이런 데 특화돼 있었다. 서로 어긋난 것들 사이의 균형을 잡아주는 힘. 독과 피, 상처와 살, 다친 몸과 회복하려는 몸의 균형을. 독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감각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끈적하고 무거운, 마치 진흙을 걸러내는 느낌이었다. 이런 걸 화살촉 하나에 발라 쏘다니, 근위대치고는 지나치게 정성스러웠다. 한참을 집중한 끝에 화살을 뽑아냈다. 늑대는 짧게 비명을 지르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숨은 쉬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안도할 틈은 오래가지 않았다. 공터 저편, 안개 속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 규칙적으로, 훈련된 사람의 발걸음이었다. 낙엽을 밟는 소리조차 절제돼 있었다. 산길을 오래 걸어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었다. 저건 사냥꾼이나 나무꾼의 발걸음이 아니었다. "근위대인가." […그럴 가능성이 크다.] "확실히 말해줘."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느니라. 다만 가능성이 크다는 것뿐.] 이 와중에도 말장난을 놓지 않는 걸 보면 위기감이 부족한 건지, 아니면 원래 이런 식으로 여유를 부리는 게 버릇인 건지 헷갈렸다. 나는 늑대를 품에 안고 몸을 낮췄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갑옷 부딪히는 소리까지 섞여 들리는 걸 보면 확실히 정예 병력이었다. 산속 몬스터 하나 잡으러 이렇게까지 인원을 붙일 필요는 없었다. 숫자를 헤아려봤다. 발소리로 짐작하기엔 최소 셋. 그것도 각자 무게가 다른 갑옷을 입은 걸로 보아 계급이 섞인 조합이었다. 단순한 순찰대라면 이렇게 조합을 짜지 않는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숨어야 하나 잠깐 고민했지만, 안개가 걷히기 전에 위치를 옮기는 것도 위험했다. 늑대를 안은 채로 움직이면 소리가 날 게 뻔했고, 그렇다고 늑대를 내려놓고 갈 수도 없었다. 상처를 지혈해놓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방치하면 그대로 죽을 게 뻔했다. 결국 그 자리에서 최대한 몸을 낮추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거기, 누구냐." 안개 사이로 갑옷 입은 남자 셋이 나타났다. 가슴팍에 새겨진 문양은 화살에서 봤던 것과 똑같았다. 성십자 방패. 왕실 근위대. 체격을 보아 하니 셋 다 상당한 실력자였다. 이런 인원을 새끼 늑대 하나 잡는 데 투입했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나는 애써 표정을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산책 나온 사람인데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목소리가 떨리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산책 나온 사람이 새끼 늑대를 품에 안고 있는 것도 이상하고, 그 늑대 몸에는 방금 뽑아낸 화살까지 옆에 떨어져 있으니, 누가 봐도 산책이라는 말은 설득력이 없었다. "산책이라. 산책 나온 사람이 왜 그 늑대를 안고 있지?" 선두에 선 남자의 눈이 내 품속 새끼 늑대를 훑었다. 그 시선에 담긴 건 단순한 경계가 아니었다. 뭔가 확인하려는, 확실히 알아야만 한다는 압박이 실려 있었다. 마치 이 늑대가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저울질하는 눈이었다. "다친 걸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라." 남자가 그 말을 그대로 되받으며 천천히 걸어왔다. 다른 두 명은 좌우로 갈라져 은근슬쩍 퇴로를 막는 모양새를 취했다. 몸에 밴 습관 같았다. 도망갈 구멍부터 차단하는 것.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일이 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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