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확인한 건 손끝이었다. 마력이 도는지,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는지. 그게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이런 걸 먼저 챙긴다는 게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성검에 심장을 뚫린 채로 삼십 년을 건너온 몸이었다. 확인할 건 확인해야 했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펴보고, 마지막으로 손바닥에 마력을 흘려 작은 불씨를 하나 만들어봤다. 노란 불씨가 순순히 피어올랐다. 오늘도 죽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자 낡은 침대가 삐걱거렸다. 이 성에서 새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침대가 제일 오래된 물건이었다. 마왕이 잠자리에 그리 신경을 안 썼는지, 아니면 취향이 그냥 소박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흑암성. 구 마왕성이라 불리던 폐허를 기지로 삼은 지도 이제 석 달째였다. 성벽 절반은 무너졌고 첨탑은 삼분의 일만 남았지만, 지하 마도구 공방만큼은 놀랍도록 온전했다. 마왕이라는 존재가 취향이 고급스러웠는지, 아니면 결계가 지독하게 튼튼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나한테는 다행이었다. 성 안을 걸을 때마다 무너진 돌더미와 깨진 유리창을 지나야 했지만, 정작 일할 공간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게 이 성의 유일한 자비였다.
창밖으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었다. 흑암성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낮에는 그저 폐허 하나일 뿐이었다. 밤이 되면 좀 다르지만.
"오늘도 주문이 들어왔던가."
혼잣말이었다. 대답은 뜻밖의 곳에서 왔다.
[들어왔느니라. 마을 상인이 발화석 마도구를 고쳐달라 하더군.]
허공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목소리라기보단 머릿속에 바로 새겨지는 느낌이었다. 진리. 삼십 년 전, 정확히는 마왕 토벌 직전에 숲에서 죽어가던 것을 내가 주워다 살려낸 정령이었다. 지금은 은혜를 갚는답시고 내 곁에 붙어 있는데, 도움을 줄 때마다 조건을 다는 버릇이 있어서 반갑지가 않았다.
"발화석이면 간단하잖아. 그런데 왜 말투가 그렇게 뜸을 들여?"
[뜸을 들이긴 누가. 그냥 알려준 것뿐이니라.]
"조건 없이?"
[…약간의 사과 하나 정도면 되느니라.]
역시나였다. 나는 한숨을 쉬며 선반 위에서 사과를 하나 꺼내 던졌다. 정령이 과일 하나에 넘어간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는 뭔가 세계관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그러려니 한다. 진리는 지혜를 다루는 존재라고 자기소개를 했으면서, 정작 자기가 좋아하는 과일 이름 하나로 나를 부려먹는 데는 세상 누구보다 명석했다.
사과가 허공에서 사라지는 걸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삼십 년 묵은 정령이 사과 하나로 정보를 팔아넘기는 세상이라니, 마왕 토벌 서사에는 이런 디테일이 절대 안 실렸겠지.
[더 줄 마음이 있느냐?]
"방금 준 거로 만족해."
[…그리하거라.]
살짝 서운한 기색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사과 하나에 서운해할 정도로 감정이 얇은 정령이라면, 애초에 조건을 걸지 말아야 했다.
마도구 장인. 그게 지금 내가 세상에 내놓은 얼굴이었다.
삼십 년 전 나는 성녀였다. 조화의 힘을 다루는, 그러나 스킬창에 아무것도 뜨지 않는 결함품. 용사 강도현의 혼약자였고, 마왕 토벌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지탱한 사람이었다. 결과는 알다시피 성검에 찔려 죽는 거였고.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그건 좀 억울한 결말이었다. 세상을 구하는 데 힘을 보탰으면 최소한 훈장이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물론 죽은 사람에게 훈장을 줄 수는 없으니, 그 부분은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은 다르다. 삼십 년이 지난 세계에서, 나는 죽은 성녀가 아니라 이름 없는 마도구 장인이다. 정체를 숨기는 이유는 단순했다. 강도현이 마왕을 혼자 잡았다고 역사에 새겨놓은 이상, 살아있는 내가 그 옆에서 웃고 있으면 그의 위대한 서사에 구멍이 난다. 그리고 그런 구멍을 낸 사람은 대체로 오래 살지 못한다는 걸, 나는 이미 한 번 죽어봤기에 잘 알았다.
용사라는 직함은 원래 그런 거다. 혼자 다 해냈다는 이야기가 완벽할수록 값이 올라간다. 그 이야기 속에 성녀가 함께 서 있으면, 값이 반으로 깎인다. 삼십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럴 거다.
그래서 나는 죽은 채로 사는 게 편했다. 적어도 마도구 장인으로 살면 누구도 내 얼굴을 두 번 쳐다보지 않으니까.
"의뢰 내용이나 말해봐."
[산 아래 마을, 벨하르트에서 온 의뢰다. 발화석 마도구가 갑자기 작동을 멈췄고, 근처에 몬스터의 흔적도 늘었다고 하더군. 마을 사람들은 두 가지가 관련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몬스터랑 마도구 고장이 관련 있다고?"
[마력의 흐름이 흔들리면 마도구도 오작동하느니라. 그리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지.]
"그건 알겠는데, 정확히 어떤 식으로 흔들려야 발화석이 멈추는데? 그냥 마력이 좀 짙어지는 정도로는 회로가 안 죽어."
[…그것까지는 나도 모른다. 상인이 그리 말했을 뿐이니라.]
역시 정령이라고 다 아는 건 아니었다. 지혜를 다룬다더니 정작 실무 지식은 얕았다.
일리는 있었다. 마력 밀도가 급격히 변하면 마도구 회로가 그 변화를 못 견디고 튕겨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문제는 그 원인이었다. 산 하나를 통째로 흔들 정도의 마력 변화라면, 그냥 몬스터 한둘로 설명되지 않는다. 최소한 던전 하나가 각성했거나, 아니면 뭔가 훨씬 골치 아픈 게 산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뜻이었다.
[의뢰료는 은화 열 냥이라 하더군.]
"싸네."
[생계형 장인이 뭘 그리 재느냐.]
"생계형 장인이니까 재는 거야. 은화 열 냥이면 회로 재료값 빼고 나면 하루 품삯도 안 나와."
[그럼 안 가면 될 것 아니냐.]
"그러려고 했는데, 산 근처 마력 이상이라는 말이 걸려서 그래."
나는 작업대 위에 흩어진 부품들을 정리하며 대답했다. 발화석 회로 하나 다시 새기는 데 걸리는 시간과 은화 열 냥을 비교하면, 사실 손해 보는 장사였다. 하지만 산 근처의 마력 이상이라는 말이 걸렸다. 그런 정보는 공짜로 오지 않는다. 직접 가서 봐야 뭐가 됐는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벨하르트는 흑암성 바로 아래 있는 마을이었다. 그 마을 뒷산에서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그건 내 코앞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뜻이었다. 모른 척하고 넘어가기엔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준비해야겠다."
[가겠다는 게냐? 재느냐고 물어놓고?]
"재긴 재는데, 안 갈 수는 없잖아. 산 하나가 흔들릴 정도의 마력 이상이면 그게 뭔지는 알아야지. 내 성 바로 아래 있는 마을인데."
진리는 잠깐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묘하게 길었다.
[…그리하거라. 다녀오고 나서 사과 하나 더 다오.]
"방금 줬잖아."
[방금은 어려운 정보의 대가였고, 이건 응원의 대가니라.]
논리가 이상했지만 반박할 기운이 없었다. 정령이랑 논리로 싸워봐야 지는 건 늘 나였다.
나는 짐을 챙기며 창밖을 바라봤다. 흑암성 너머로 보이는 산등성이가 흐릿한 안개에 잠겨 있었다. 평소보다 짙었다. 그게 마음에 걸렸지만, 별일 아니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작업대에서 회로 도구 몇 개와 여벌 발화석, 그리고 소형 방어용 마도구를 챙겨 배낭에 쑤셔넣었다. 마도구 장인이라고는 해도 삼십 년 전 성녀 시절의 감각은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위험한 곳에 갈 때는 무기보다 보험이 먼저였다.
[가는 길에 조심하거라.]
"조심할 게 있으면 네가 좀 알려주지."
[알려줄 게 있으면 알려주었겠지. 모르는 걸 어찌 알려주느냐.]
말은 되는데 얄미웠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문을 나섰다.
다음 날 새벽, 벨하르트로 향하는 산길에 올랐을 때 안개는 더 짙어져 있었다. 발밑의 흙이 평소보다 축축했다. 마력 밀도가 높아진 지역일수록 습기가 늘어나는 건 흔한 현상이었지만, 이 정도로 짙은 건 흔치 않았다.
걸음을 옮길수록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단순히 안개 탓이라고만 생각하고 싶었다.
산길 초입에서는 새소리가 들렸는데, 중턱에 다다르자 그마저 사라졌다. 새들도 뭔가를 알고 도망친 모양이었다. 새보다 감각이 둔한 인간이 이 길을 계속 걷고 있다는 게 우습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이미 한 번 죽어본 사람이었다. 몸이 위험을 감지하는 감각만큼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산길 중턱, 나무들 사이로 뭔가 낮게 울리는 신음 소리가 들렸다. 사람 소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흔한 몬스터의 울음소리도 아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머릿속에서 진리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이건 좀, 이상하구나.]
정령이 저렇게 말을 아끼는 건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