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밤이 되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천장의 나뭇결을 하나씩 세듯 바라보았다.
같은 무늬가 몇 번이나 반복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눈이 그 위를 미끄러졌다.
낮에 있었던 일이 자꾸 되풀이됐다.
백소라.
은발.
무너진 마을.
혼자 살아남았다는 아이.
상단 마차 안,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웅크리고 있던 몸.
누구도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던 그 아이만이, 이상하게도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 시선이 아직도 이마 어딘가에 박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남긴 말.
"네가 잃은 거, 저기 있잖아."
손끝으로 자신의 손등을 만졌다.
낮에 곽태산과 대련하다 생긴 상처가 그대로였다.
피부가 살짝 부어 있었다.
그런데 아프지 않았다.
원래라면 이쯤에서 통증이 올라와야 했다.
그런데 오지 않았다.
느껴야 하는데,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한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백소라의 눈을 떠올리면, 통증도 아닌 무언가가 가슴을 눌렀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무게였다.
몇 번이나 몸을 뒤척였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다시 천장을 향해.
결국 일어나 앉았다.
창밖은 어두웠다.
달빛만 희미하게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 빛이 바닥에 만든 창틀 모양의 그림자를 한동안 바라봤다.
"다시 나와봐."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반응이 없었다.
방 안의 정적이 더 짙어졌다.
숨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와. 물어볼 게 있어."
한 번 더 불렀다.
목이 살짝 마르는 게 느껴졌다.
그러자 그림자가 조금 더 짙어지는 자리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부르면 오는 강아지 아니야, 나."
여전히 온도 없는 말투였다.
사람의 목소리 같으면서도, 사람이 낼 수 없는 리듬이었다.
"내가 잃은 게 감정이야?"
"정확히는, 감정 중 일부. 넌 이제 대부분의 자극에 반응하지 않아. 아프고, 슬프고, 화나야 할 상황에서 아무것도 안 느껴지지."
숨이 막혔다.
머릿속으로 최근 며칠을 되짚었다.
곽태산에게 검을 맞았을 때.
한익서에게 혼났을 때.
공작이 다른 형제를 칭찬했을 때.
그 어느 순간에도, 있어야 할 감정이 없었다.
분노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서운함이 있어야 할 자리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공백.
그저 공백뿐이었다.
"그런데 왜 그 애를 보면..."
"그 애가 특별한 게 아니야. 네 안에 아직 남은 마지막 조각이, 우연히 그 애한테 반응한 거지."
"마지막 조각."
그 말을 되뇌었다.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이해가 됐다.
내 안에 뭔가 아직 남아 있고, 그게 아주 작은 파편이라는 뜻이었다.
그 파편이, 왜 하필 그 아이한테.
"되돌릴 수 있어?"
"할 수 있지. 그런데 되돌리면, 지금 가진 것도 같이 반납해야 해."
"뭘 반납해."
"재능. 곽태산이 놀란 그 속도, 한익서가 감탄한 그 이해력. 그것도 다 대가로 얻은 거니까."
손이 떨렸다.
지금까지 쌓은 것들이 스쳐 갔다.
곽태산과의 대련.
검을 맞부딪칠 때마다 곽태산의 얼굴에 스치던 당황.
한익서의 존경.
경전 한 줄을 읽고 바로 해석해낼 때마다 그가 짓던 표정.
공작의 자부심 어린 눈빛.
가문 회의 자리에서 다른 형제들과 나를 비교하며 짓던 그 미소.
그걸 다 내려놓고, 대신 다시 느끼는 걸 선택할 수 있을까.
손끝이 차가워졌다.
답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 줘."
"얼마든지. 어차피 시간은 네 편이 아니야."
그 말을 끝으로 목소리는 사라졌다.
방 안에는 다시 어둠과 정적만 남았다.
창틀 모양의 그림자는 그 자리에 그대로였다.
한동안 그 자리를 노려봤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로 하루를 시작했다.
오전 6시.
검술 수련장에 나갔다.
검을 쥐는 손에 평소와 다른 힘이 들어갔다.
곽태산이 곁눈질로 나를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전 9시.
학문 수업.
한익서가 문장을 짚어가며 설명했다.
평소라면 바로 이해했을 구절을, 세 번이나 다시 물었다.
한익서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디 안 좋으십니까."
"아니야. 잠을 못 자서."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진짜 이유는 말할 수 없었다.
머릿속은 계속 백소라에게 가 있었다.
그 아이의 은발이, 그 눈빛이, 마차 안에서의 웅크린 자세가 자꾸 떠올랐다.
오후 2시, 공작을 찾아갔다.
집무실 문을 두드리기 전, 잠깐 멈췄다.
심장이 빨리 뛰어야 할 순간인데, 그렇지 않았다.
대신 손끝만 차가웠다.
"아버지."
"응."
공작은 서류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제 본 그 아이, 백소라 말이에요."
공작이 잠시 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서 뭔가를 읽으려는 기색이 스쳤다.
"그 애가 왜."
"사고 싶어요."
예상치 못한 말이라는 듯, 공작의 눈썹이 올라갔다.
"...노예를 원한다고?"
"제 개인 시녀로 쓰겠습니다. 상단에서도 상품 가치가 낮다고 했으니, 값도 크게 들지 않을 거예요."
말을 하면서도,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려는지 스스로도 명확하지 않았다.
동정심이라고 하기엔 낯설었고, 그냥 흥미라고 하기엔 너무 절박했다.
둘 다 아니라면, 대체 이건 뭘까.
공작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 번 두드렸다.
그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한다면. 알겠다. 사람을 보내마."
허락이 떨어졌다.
집무실을 나오며,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놓여야 하는데, 놓이지 않았다.
복도를 걸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걸로 뭘 확인하려는 거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날 밤, 다시 그 목소리가 나타났다.
"결정했나 보네."
방 안 그림자가 짙어지는 자리에서, 낮은 웃음기 없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애를 데려오는 게 감정을 되돌리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상관없어. 근데 재밌잖아, 네가 뭘 선택하는지."
목소리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동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관찰이었다.
"넌 대체 뭐야."
"매수자라고 했잖아. 네 인생에 투자한 사람. 그리고 지금, 더 큰 투자를 제안하고 싶어."
숨이 멎었다.
"무슨 투자."
"네가 지금 가진 힘, 그거 시작에 불과해. 원한다면 더 줄 수 있어. 세상을 정말로 무릎 꿇릴 수 있을 만큼."
세상을 무릎 꿇린다는 말이 이상하게 귀에 남았다.
그런 걸 원한 적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런가.
"대가는."
"똑같지. 뭔가는 나가야 해. 근데 이번엔, 네가 직접 골라볼래?"
그 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골라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남은 감정을 전부 내놓으라는 뜻인지, 다른 걸 요구하는 건지.
하지만 분명한 건, 이 거래가 처음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었다.
백소라의 눈빛이 떠올랐다.
곽태산의 놀란 얼굴도, 한익서의 존경 어린 눈빛도, 공작의 자부심도 함께 떠올랐다.
그것들을 다 가진 지금, 나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곳까지 와 있었다.
처음 거래를 받아들였을 때는 뭘 잃는지도 몰랐다.
이번엔 알면서도 손을 뻗으려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스스로도 낯설었다.
"...조건을 들어보고 싶어."
입 밖으로 나온 그 말에, 스스로도 놀랐다.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전에, 머릿속에서 먼저 승인이 난 것 같았다.
목소리가 낮게 웃었다.
웃음소리에도 온도가 없었다.
"좋은 자세야. 그럼, 다음에 자세히 얘기하지."
"기다려. 지금 말해."
방 안 공기가 다시 무거워졌다.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목소리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방 안에는 다시 어둠과 정적만 남았다.
창밖으로, 상단에서 데려올 백소라를 태운 마차가 도착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바퀴가 자갈길을 밟는 소리, 말이 낮게 우는 소리.
그 소리를 따라 창가로 다가갔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은발이 흐릿하게 달빛 아래 드러났다.
그 아이가 고개를 들어 이쪽 창을 올려다본 것 같았다.
착각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순간, 가슴을 누르는 그 무게가 다시 느껴졌다.
나는 아직, 그 애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그 목소리의 제안을 받아들일지도 정하지 못한 채였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미 시작된 거래는, 멈추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창밖 마차에서 내려서는 그 아이의 그림자가,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