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일곱 살, 악당을 삽니다

2화

눈을 떴다. 천장이 낯설었다. 금빛 조각이 새겨진 새하얀 천장이었다. 시선을 돌리자 커튼 사이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부드러운 빛이었다. 옥상에서 봤던 마지막 빛과는 달랐다. 몸을 일으키려 했는데, 손이 작았다. 너무 작았다. 손등에 잡히던 굳은살도, 흉터도 없었다. 야근으로 굽었던 등도, 계약서에 수백 번 서명하며 생긴 손가락의 굳은살도 사라져 있었다. 손바닥을 뒤집어 봤다. 핏줄이 얇았다. 손톱 밑에 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이 손이 내 것이라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거울을 찾았다. 방 한쪽에 전신 거울이 있었다. 걸어갔다. 걸음이 이상했다. 다리가 짧아 발을 헛디딜 뻔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째에는 아예 균형을 잃고 침대 기둥을 붙잡아야 했다. 스물아홉 해 동안 익힌 걸음이 통째로 무용지물이 되어 있었다.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낯선 얼굴이 있었다. 은빛에 가까운 금발, 커다란 회색 눈,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작은 코, 아직 살이 덜 빠진 볼, 겁먹은 듯 커진 눈동자. 그게 나였다. 숨이 멎었다. 다시 숨을 쉬었다. 또 멎었다. 세 번째로 숨을 들이켰을 때, 겨우 숨이 제대로 붙었다. 거울 속 아이가 나를 따라 숨을 쉬고 있었다. 당연한 일인데, 그 당연함이 무섭게 느껴졌다. 기억이 두 갈래로 흘러들었다. 하나는 스물아홉 해를 살았던 남자의 기억. 대출, 배신, 옥상, 목소리. 다른 하나는, 일곱 해를 살아온 소녀의 기억. 따뜻한 손, 어머니의 노래, 아버지의 무뚝뚝한 등. 둘 다 내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두 기억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았다. 마치 원래부터 한 사람의 것이었던 것처럼,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름은 선우설. 선우 공작가의 외동딸. 아버지는 선우현 공작. 어머니는 세 해 전 병으로 죽었다고, 소녀의 기억이 말해주었다. 소녀의 기억 속 어머니의 얼굴은 이미 흐릿했다. 목소리만 선명했다. '설아, 밥은 먹었어?' 그 흔한 말 한마디가, 왜인지 코끝을 시큰하게 만들었다. 방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일정한 속도, 절제된 걸음. 기억이 먼저 그 발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렸다. "아가씨, 일어나셨습니까." 중년 남자의 목소리였다. 문이 열리고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집사 김도율이라고, 기억이 알려주었다. 키가 크고 등이 곧은 남자였다. 머리는 반백이었고, 눈매에는 오래 이 집안을 지켜온 사람의 관록이 있었다. "몸은 어떠십니까. 어제 갑자기 쓰러지셔서 다들 걱정했습니다." 쓰러졌다는 말에 뭔가 짐작이 갔다. 원래 이 몸의 주인이었던 선우설도, 아마 어딘가에서 나와 자리를 바꾼 모양이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세계로 넘어온 원리도, 대가를 요구했던 그 목소리의 정체도, 지금은 알 도리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지금 이 몸에 있는 게 나라는 사실이었다. "괜찮아." 짧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가늘고 높았다. 낯설었다. 내 목소리가 아니라 누군가의 목소리를 빌려 쓰는 느낌이었다. 김도율이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다행입니다. 의사가 별다른 문제는 없다고 했지만, 밤새 열이 좀 있으셨습니다." "그랬어." "조식은 방으로 올려드릴까요, 아니면 식당으로 내려가시겠습니까." 식당으로 내려가겠다고 말하려다 멈췄다. 일곱 살 몸이, 아직 이 낯선 세계의 지리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방으로." "알겠습니다." 김도율이 허리를 숙이고는,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다시 돌아봤다. "공작님께서 곧 오실 겁니다." 그 말을 남기고 문이 닫혔다. 혼자가 되자 다시 거울 앞에 섰다. 일곱 살. 공작 영애. 귀족. 세 단어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전생의 기억이 머릿속을 채웠다. 대출, 배신, 옥상, 목소리. 한 글자씩 떠올릴 때마다 위장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돈을 빌려줬을 때 웃던 얼굴. 갚지 않겠다고 통보했을 때도 웃던 얼굴. 그 웃음이 옥상 난간 앞에서도 눈앞에 떠 있었다. 그 목소리가 말했던 대가는 아직 오지 않았다. 무엇을 요구할지, 언제 요구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대가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 이번엔 다르게 살 것이다. 한소미와 유정훈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친구라고 믿었던 얼굴, 사랑한다고 믿었던 얼굴. 돈을 갚으라는 말에 오히려 화를 내던 표정. 그때 느꼈던, 손이 떨리고 이가 갈리던 그 감각이 다시 올라왔다. 지금 이 작은 손도 떨리고 있었다. 일곱 살의 손가락이 스물아홉 해의 분노를 담기에는 너무 작았다. 그런데도 떨림은 똑같았다. 세상은 나를 착취했다. 돈을 빌려준 나를, 사랑한 나를, 믿었던 나를 짓밟았다. 그런 세상이라면, 이번엔 짓밟히지 않겠다. 짓밟는 쪽에 서겠다. 최악의 악당이 되겠다. 그렇게 결심했다. 두 번, 세 번 되뇌었다. 한 번 되뇔 때마다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딱딱하게 굳어가는 느낌이었다. 다짐할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가벼워지면 안 되는데, 가벼워졌다. 거울 속 아이가 웃고 있었다. 내가 웃고 있었다. 웃으면 안 되는데,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 있었다. 문이 열렸다. 큰 키의 남자가 들어왔다. 검은 머리, 날카로운 눈매, 몸에 밴 위엄. 선우현 공작이었다. 그가 방에 들어서는 것만으로 공기가 달라지는 느낌이었다. "설아." 낮은 목소리에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몸은 좀 어떠니." 소녀의 기억 속 아버지는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사람이었다. 지금 눈앞의 남자도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넓은 어깨, 굳게 다문 입술, 그러나 눈동자만은 딸을 향해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괜찮아요, 아버지." 대답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연기가 아니었다. 일곱 살 몸이 그렇게 말하도록 시켰다. 공작이 침대 옆에 앉았다. 침대가 그의 무게로 살짝 기울었다. "어제 그렇게 쓰러져서 걱정했다. 의사가 별문제 없다고는 했는데..." 말끝이 흐려졌다. 그의 손이 이불 위에 놓인 내 손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크고 단단한 손이었다. "이제 진짜 괜찮아요." 나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전생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를 오래 보지 못했다. 명절에도 얼굴을 마주하기 힘들었던, 서로 안부만 묻던 사이였다. 그런데 이 낯선 남자 앞에서, 목이 살짝 메었다. 메면 안 되는데 메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뭔가가 목구멍에 걸려 있었다. "아버지." "응." "저, 검을 배우고 싶어요." 공작이 잠시 멈췄다. 방 안의 시간이 잠깐 정지한 것 같았다. "검? 여자아이가 검을 배운다는 게..." "배우고 싶어요. 그리고 공부도요. 영지 경영이랑 법률도." 말이 입에서 술술 나왔다. 전생의 기억이 시키는 대로 흘러나오는 말이었다. 돈에 무지해서 당했던 배신, 법에 무지해서 놓쳤던 기회들이 떠올랐다. 이번엔 무지하지 않을 것이다. 너무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공작의 눈에 의아함이 스쳤다. 하지만 그 의아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내 눈을 한참 들여다봤다.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눈빛이었다. "...알겠다. 원한다면 지원해주마." 그렇게 쉽게 허락이 떨어질 줄은 몰랐다. 일곱 살 딸이 갑자기 검과 학문을 배우겠다고 하면 보통 말리지 않나. 그런데 공작의 얼굴에는 걱정보다 기대가 더 크게 떠올라 있었다. "검술 교사는 내가 직접 붙여주마. 학문은 궁정 학자 중에서 골라야겠구나." "감사해요, 아버지." "무리하지 마라." 낮은 목소리였다. 전생의 어머니가 했던 말과 닮아 있었다. 가슴 어딘가가 다시 조여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원래 선우설은 몸이 약하고 소극적인 아이였다. 방 안에서 자수를 놓거나 책을 읽는 것 외에는 밖에 나가는 일도 드물었다고 했다. 갑자기 눈빛이 달라지고 목표를 말하는 딸의 모습이, 공작에게는 다르게 보였던 것이다. 공작이 방을 나서고 나서도,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손바닥에는 아직 그의 손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매일 새벽 검술 수련을 시작했다. 동이 트기 전, 훈련장에 나가 목검을 쥐었다. 작은 손으로는 목검조차 무거웠다. 몇 번을 휘두르다 팔이 저려 놓치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다음 날 다시 나갔다. 매일 오전 학문 수업을 들었다. 숫자와 법령, 영지의 지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전생에서 배웠던 회계와 계약의 지식이 뜻밖에도 이 세계의 법률과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그 겹침이 이상하게도 위안이 되었다. 세상을 무릎 꿇리겠다는 결심이, 이 작은 몸 안에서 조금씩 자라났다. 목검을 쥔 손에 조금씩 굳은살이 잡히기 시작했다. 숫자를 외우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리고 그 결심이 자라는 만큼, 뭔가가 조용히 줄어들고 있다는 걸,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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