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폐기던전의 포식자

5화

동굴 안은 생각보다 훨씬 깊었다. 들어갈 때만 해도 "뭐 얼마나 깊겠어" 싶었는데, 걸으면 걸을수록 입구의 빛이 손톱만 해지더니 아예 사라졌다. 휴대폰 손전등도 없는 이세계에서 이딴 식으로 어두운 데를 걸어야 한다니, 굴다리 밑 흉가체험 유튜버들 존경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걸을수록 썩은 냄새가 심해졌다. 비유하자면 여름철 음식물 쓰레기통을 삼 일쯤 방치했을 때 나는 그 냄새에, 학교 급식실 하수구 냄새를 한 스푼 얹은 느낌이었다. 코를 막고 싶었지만 두 손이 다 필요할 것 같아서 참았다. 심연이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듯 둥실둥실 떠갔다. 몸통이 흐물흐물 흔들리는 게 마치 마트 시식 코너에서 파는 대왕 젤리 같았는데, 저게 지금 내 목숨줄을 쥐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아이러니했다. [전도서 12:5, 사람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동굴 끝에 그 영원한 집이 있는 건 아니길 바랐다. 성경도 가끔 너무 시적으로 나와서 이럴 때는 좀 불길하다. 동굴이 갈라지는 지점마다 심연이 멈춰 서서 방향을 가리켰다. 말을 못 하는 대신 몸을 기울이거나 진동을 일으켜서 뭔가 신호를 줬다. 생각보다 눈치가 빨랐다. SHHHHHHH... "이쪽?" SHRRRRR... 긍정인지 부정인지 헷갈렸지만 일단 따라갔다. 어차피 이 던전에서 나 말고 믿을 건 이 젤리 덩어리 하나뿐이었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슬라임한테도 의지하게 된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몇 번을 더 갈라지는 길을 돌고 나니, 슬슬 내 발걸음 소리에도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타박, 타박. 누가 뒤에서 따라오는 것 같은 착각이 계속 들었다. 뒤돌아보면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그냥 동굴 벽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였다. 심장이 벌렁거리는 게 억울할 지경이었다. 동굴 깊은 곳에 이르자 넓은 공간이 나왔다. 천장이 높고 바닥엔 뼈들이 흩어져 있었다. 인간의 뼈로 보이는 것들도 섞여 있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한눈에 봐도 여기서 얼마나 많은 게 죽어 나갔는지 짐작이 갔다. 동물 뼈, 몬스터로 추정되는 형태 불명의 뼈, 그리고 명백히 사람의 두개골로 보이는 것까지. 전시장이라기보다는 그냥 거대한 쓰레기 매립지 같았다. 누가 여기다 이런 걸 다 쌓아놓은 건지, 아니면 뭔가가 여기서 계속 뭔가를 잡아먹었던 건지. [욥기 21:26, 다 같이 흙 속에 누우니 지렁이가 그들을 덮을 것이니라] 지렁이는 안 보이는데 뭔가 더 큰 게 여기 살았던 흔적이었다. 지렁이라도 나오면 그나마 정겨웠을 텐데. 뼈 무더기 사이에서 창 한 자루가 눈에 띄었다. 녹슬긴 했지만 형태는 온전했다. 자루 부분은 손잡이 가죽이 삭아 있었지만 창날은 이상하게도 날카로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장인이 제대로 만든 물건이라는 게 딱 느껴졌다. 그리고 그 창을 쥔 채 쓰러져 있는 시신이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옷차림이 낯익었다. 작업복 위에 걸친 조끼, 회사 이름이 새겨진 명찰. 박도현. "아저씨..." 순간 뭔가 목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야자실에서 붙잡혀 온 그 아저씨가, 사투리 쓰면서 나를 걱정해주던 그 사람이 여기서 이렇게 되어 있었다. 머릿속에서 그날 야자실 풍경이 떠올랐다. "학생, 괜찮은 겨? 이런 데 끌려오면 무섭지 않남?" 그렇게 걱정 반, 능청 반으로 말 걸어주던 아저씨였다. 같이 잡혀온 처지에도 남 걱정할 여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지금 뼈 무더기 속에서 창을 쥐고 굳어 있었다. [전도서 9:5,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아저씨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오히려 다행인 것 같기도 했다. 적어도 여기가 얼마나 을씨년스러운 곳인지, 자기가 얼마나 오래 방치돼 있었는지는 모를 테니까. 창을 자세히 보니 표면에 상처가 잔뜩 나 있었다. 찍히고 긁히고 휘어진 흔적이 창날 전체에 어지럽게 퍼져 있었다. 뭔가와 마지막까지 싸운 것 같았다. 한 번 휘두르고 끝난 싸움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부딪혔던 흔적이었다. 탐식왕이 데려간 A등급 스킬 소유자가 왜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탐식왕도 이 던전을 이용하는 방법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사람을 던전에 처넣고, 살아남으면 스킬을 뽑아먹고, 죽으면 그냥 방치. 말 그대로 인간을 소모품처럼 굴리는 시스템이었다. 생각만 해도 열이 올랐다. 심연이 시신 근처로 다가가 조용히 몸을 낮췄다. 마치 조의를 표하는 것 같았다. SHHHHHHH... 낮고 길게 울리는 그 소리가 어쩐지 애도처럼 들렸다. 슬라임 젤리한테서 이런 정서적인 걸 느낄 줄은 몰랐는데, 사람이 죽고 나니 나도 감정이 이상하게 흐트러졌나 보다. "너도 알아보는구나." [스킬: 잡식이 반응합니다.] 순간 팔이 저절로 움직였다. 시신 쪽으로 손이 뻗어갔다. "안 돼, 잠깐만!" 스스로 놀랐다. 방금 내 손이 뭘 하려던 건지 뒤늦게 깨달았다. 잡식 스킬이 시신을 대상으로 자동 발동하려 했던 거였다. 내 몸이 내 의지보다 먼저 반응한다는 게 이렇게 오싹할 줄이야. 스킬이 사람 죽으면 자동으로 침 흘리는 방식인 거냐고, 이거 완전 사이코패스 흡수 기능 아니냐고 속으로 소리쳤다. [욥기 34:15,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면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나한테 돌아오려는 것 같았다. 갈등이 됐다. 아는 사람이었다. 짧게나마 대화도 나눴다. 먹는다는 게 도리에 맞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사람 도리 챙긴다고 이런 데서 굶어 죽으면 그건 또 무슨 개죽음인가 싶기도 했다. 머릿속에서 별의별 생각이 다 지나갔다. 장례식장 예의범절 같은 걸 배운 적은 있어도 이런 상황에 대한 예의범절은 아무도 안 가르쳐 줬다. 목사가 되겠다고 신학교 다니면서 이런 걸 마주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교회에서 배운 건 장례 위로예배 순서였지, 시신에서 스킬 뽑아내는 법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던전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뭐라도 먹어야 했다. 살아남는 것과 도리를 지키는 것,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순간이 자꾸 나를 밀어붙였다. [전도서 3: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지금이 그 때인가. 너무 편리한 논리인 것 같긴 한데, 다른 답이 없었다. 목사 지망생이 성경 구절을 이렇게 갖다 붙이는 게 맞나 싶긴 한데, 지금 나한테는 이게 최선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마음속으로 짧게 사과했다. "편히 쉬세요, 아저씨."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르는 와중에도 이상하게 손끝이 떨렸다. 이건 무서워서가 아니라, 뭔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는 기분 때문이었다. 손끝이 시신에 닿는 순간, 뭔가 다른 감각이 밀려왔다. 단순한 흡수가 아니었다. 박도현이 살아있던 기억, 창을 다루던 감각, 마지막 순간 느꼈던 감정까지 전부 밀려들었다. 그 짧은 순간에 아저씨가 이 던전에서 뭘 겪었는지 조각조각 스쳐 지나갔다. 어두운 통로를 헤매던 발걸음, 알 수 없는 존재와 맞서 싸우던 손아귀의 힘, 그리고 마지막에 느꼈던 것 같은 이상한 안도감까지. 싸움에서 진 게 아니라, 뭔가를 지키다가 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게 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헛되이 죽은 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잡식 스킬이 대상의 스킬을 흡수합니다.] [마창 소환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등급: A] 순간 온몸에 힘이 확 들어왔다. 등급 A 스킬이 통째로 내 안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팔뚝이 저절로 부풀어 오르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헬스장 삼 개월 다녀도 안 생기던 근육 뽕이 이렇게 한순간에 생기다니, 이거 사람 몸에 무슨 짓을 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동시에 던전 전체가 흔들렸다. 쿠구구구궁! 천장에서 흙먼지가 쏟아졌다. 심연도 몸을 급격히 부풀렸다가 줄였다. 마치 뭔가 큰 변화를 감지한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등급 A 스킬 하나 흡수했다고 던전 전체가 반응하는 게 정상인가. 지진 난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방탈출 카페 마지막 스테이지 폭탄 타이머 같은 느낌이었다. 심연을 쳐다봤지만, 저 젤리도 이런 상황은 처음인 듯 몸통을 계속 부풀렸다 줄였다 하고 있었다. "야, 너도 몰라?" SHHHHHHRRR... 대답이라고 하기엔 너무 불안한 진동이었다. * 나는 왕궁 정원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채영이 하준이라는 학생을 절벽으로 밀어 넣은 지 반나절이 지났다. 채영은 손목에 남은 감촉을 애써 지우려 했지만 지워지지 않았다. 그 학생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던 순간의 표정이, 이상하게도 잊히지 않았다.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마지막까지 뭔가를 노려보던 그 눈빛이 자꾸 눈앞에서 재생됐다. 산맥 저편, 폐기 던전이 있는 방향의 하늘이 갑자기 검게 물들었다. 구름이 소용돌이치듯 뒤틀렸고, 대기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정원의 나뭇가지들이 바람도 없는데 흔들리기 시작했다. 새들이 일제히 그 방향에서 도망치듯 날아올랐다. 왕궁 경비대장이 다급히 뛰어나와 오만왕에게 보고했다. "폐하, 폐기 던전 쪽에서 마력 반응이... 지난 백 년간 감지된 적 없는 규모입니다." 오만왕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여유가 사라졌다. 그 표정 변화를 채영은 놓치지 않았다. 채영은 자신도 모르게 손목을 감쌌다. 방금까지 아무 감정도 없다고 스스로 믿으려 했는데, 갑자기 알 수 없는 불안이 명치 아래에서 올라왔다. 하준이 그 안에서 살아 있을 리 없었다. 등급 F였다. 죽는 게 당연했다.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다. 하지만 검게 뒤틀리는 저 하늘을 보는 순간, 그 확신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등급 F짜리가 죽고 나서 던전이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저건... 뭐지?" 채영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경비대장도, 주변에 있던 시녀들도 하늘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백 년 넘게 조용하던 폐기 던전이었다. 아무도 저 안에서 뭔가가 살아 움직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산맥 너머에서, 지금까지 그 누구도 감지해본 적 없는 종류의 존재감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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