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야간자율학습 3교시, 창밖은 이미 컴컴했다.
형광등 불빛 아래서 다들 좀비처럼 문제집을 붙잡고 있었고,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전투불능 상태가 된 병사였다.
책상에 엎드려서 반쯤 자고 있었단 얘기다.
반쯤이 아니라 사실 거의 다 자고 있었다.
꿈속에서 배달앱으로 치킨을 주문하려는데 자꾸 결제가 안 되고 있었다.
현실에서도 안 되는 게 꿈에서도 안 되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그런데 갑자기 교실 전체가 하얗게 번쩍였다.
뭐지?
번개인가 싶었는데 소리가 없었다.
천둥이 빠진 번개라니, 이거 완전 사기 아닌가.
할인만 있고 정가는 없는 앱 같은 느낌이었다.
촤아아아악!
눈을 떴을 땐 대리석 바닥이었다.
형광등 대신 샹들리에가 머리 위에서 반짝였다.
나는 순간 잠결에 "야자실 리모델링했나" 하는 생각부터 했다.
학교 예산이 갑자기 그렇게 늘 리가 없는데, 뇌가 아직 현실 감각을 못 잡고 있었던 거다.
반 친구들 마흔일곱 명이 전부 여기 서 있었다.
자다 깬 얼굴, 문제집 붙잡고 있던 얼굴, 이어폰 낀 얼굴까지 표정은 다 달랐지만 공통점은 하나였다.
전부 "여기 어디임?" 하는 얼굴이었다.
야자 감독 선생님만 없었다.
선생님만 소환 안 된 건가, 그건 좀 부럽네.
나중에 알았지만 선생님은 그날 마침 조퇴하고 병원 갔다가 이 사태를 통째로 놓쳤다고 한다.
인생 최고의 타이밍이란 게 저런 거구나 싶었다.
[전도서 1:9, 이미 있던 일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그러니까 이세계 소환이라는 게 나름 클리셰라는 뜻인가.
클리셰인데 왜 나한테는 사전 안내도 없이 훅 들어오는 건지.
넷플릭스 정주행하듯 예고편 좀 보여주고 데려가면 안 되나.
납득은 안 됐지만 일단 서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성벽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왕궁 알현실 같았다.
바닥은 대리석, 기둥은 금박, 천장엔 벽화까지 그려져 있었다.
영화 세트장이라 해도 예산이 너무 많이 든 세트장이었다.
이 정도면 제작사가 부동산까지 손댔다는 소리가 나올 규모였다.
누가 여기 임대료 계산이라도 해봤으면 아마 기절했을 거다.
"이게... 게임 세계인가?"
누군가 중얼거렸다.
나도 속으로 같은 생각을 했다.
근데 여기서 죽으면 리스폰이 안 될 것 같다는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확인 버튼 누르면 "정말 나가시겠습니까?" 창도 안 뜨는 세계 같았다.
왕좌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왼쪽엔 금빛 갑옷을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표정에서부터 "내가 제일 잘났다"는 게 뿜어져 나왔다.
오만왕이라고 나중에 알았다.
오른쪽엔 살덩이가 출렁이는 뚱뚱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탐식왕이었다.
둘이 나란히 앉아있는 걸 보니까 저 왕좌 두 개가 서로 임대 계약이라도 맺은 건가 싶었다.
오만왕이 손을 들자 허공에 글자가 떴다.
[소환된 이계인들의 스킬을 감별합니다.]
감별사로 보이는 로브 입은 노인들이 학생들 앞을 하나씩 지나갔다.
순서대로 이름이 불렸다.
"김민재."
반에서 축구 좀 한다고 소문났던 애였다.
[스킬: 화염구 - 등급 B]
오만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쓸 만하군."
김민재는 갑자기 어깨를 펴고 뭔가 있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까지 야자 시간에 몰래 폰 게임 하다 걸려서 혼나던 애였는데, 등급 하나 뜨니까 저렇게 변하는구나.
사람 참 간사하다.
몇 명 더 지나갔다.
"박서윤."
[스킬: 은신 - 등급 C]
"이거 은신인데 뭘 숨기라는 거지" 하고 본인이 제일 어리둥절해했다.
감별사도 애매하게 웃기만 했다.
"유채영."
내 옆에 서 있던 유채영의 이름이 불렸다.
유채영은 우리 반에서 나랑 가장 자주 짝이 됐던 애였다.
급식 시간마다 반찬 나눠 먹고, 시험 전날 같이 도서관에서 밤새우고, 그런 사이였다.
감별사가 눈을 크게 떴다.
[스킬: 성속성 친화 - 등급 SSS]
주변에서 웅성거림이 터졌다.
오만왕이 몸을 일으켰다.
"성속성이라니, 이건 하늘이 내린 인재로군."
유채영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나도 옆에서 같이 놀랐다.
와, 채영이 대단하네.
순수하게 그런 생각만 들었다.
질투 같은 건 별로 안 들었다.
왜냐면 나는 애초에 저 반열에 낄 거라는 기대 자체를 안 했으니까.
그리고 내 차례가 왔다.
"이하준."
감별사가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서늘한 기운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꼭 겨울에 목욕탕 나와서 찬바람 맞는 느낌이었다.
[스킬: 잡식(雜食) - 등급 F]
[스킬: 굼벵이의 걸음 - 등급 F]
알현실이 순간 조용해졌다.
아니, 이 정적은 좀 부담스러운데.
차라리 웅성거리기라도 하지, 이 침묵은 뭐냐.
감별사가 미간을 좁혔다.
"잡식은... 그냥 아무거나 소화할 수 있다는 뜻이고, 굼벵이의 걸음은 대상의 시간 흐름을 아주 미세하게 늦추거나 당기는... 거의 무의미한 수준의..."
말끝이 흐려졌다.
설명하는 사람도 자기가 지금 뭘 설명하고 있는지 헷갈리는 눈치였다.
오만왕이 코웃음을 쳤다.
"편식 안 하고 밥 잘 먹는다는 게 스킬이라니."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나는 그냥 서 있었다.
뭐지, 이 상황?
분명 나도 소환된 용사 같은 사람인데 스킬이 급식 완식왕이라니.
남들은 화염구니 은신이니 하는데 나는 편식 안 한다는 거 하나로 F등급 두 개를 받았다.
이건 스킬이 아니라 학교 급식 실천상 수준 아닌가.
[욥기 6:6, 짠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짠 것도 소금 없이 먹을 수 있는 게 내 능력인 것 같은데, 이게 자랑할 일인지는 모르겠다.
아니, 성경까지 소환해서 위로하려는 건 아는데 위로가 하나도 안 된다.
탐식왕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걸걸했고 기름진 느낌이었다.
목소리부터 이미 삼겹살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잡식이라... 재밌군. 저놈은 내가 데려가지."
오만왕이 손을 저었다.
"됐네, 자네가 알아서 데려가게. 어차피 우리 왕국엔 쓸모없는 놈이니."
쓸모없는 놈.
그 말이 알현실 벽에 반사되어 몇 번이고 다시 울리는 것 같았다.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뭐야, 이거 진짜 폐기 처분 되는 흐름 아닌가?
분리수거도 등급 나눠서 하는데 나는 등급도 없이 그냥 종량제 봉투에 담기는 느낌이었다.
나는 애써 웃으며 유채영 쪽을 쳐다봤다.
유채영이 나를 보며 살짝 웃어줬다.
그래, 채영이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같은 반이었고, 짝도 몇 번 했고, 서로 챙겨줬던 사이니까.
저 SSS등급 옆에 붙어 있으면 나도 콩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착각이라도 좋으니까 일단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알현실 저편에서 감별사들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박도현."
삼십 대 중반쯤 보이는 아저씨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야자 감독하러 왔다가 같이 끌려온 학원 강사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들으니 건설회사 총무였다.
하필 회식 마치고 편의점 들르다 소환됐다고 했다.
삼각김밥 사려다가 이세계로 끌려온 사람의 표정이 어떤지 그날 처음 봤다.
표정 관리가 아예 안 되고 있었다.
[스킬: 마창 소환 - 등급 A]
탐식왕의 눈이 번쩍였다.
"오, 저 아저씨도 내가 가져가지."
박도현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 저는 그냥 편의점 가는 길이었디..."
사투리가 섞인 말투로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병사들이 그를 끌고 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저 아저씨 스킬은 A등급인데도 끌려가네.
등급이 높아도 끌려가고 등급이 낮아도 끌려가는 거면, 대체 등급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그럼 F등급인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답은 곧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답이 절대 좋은 쪽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 서늘하게 등을 타고 올라왔다.
탐식왕의 시선이 다시 내 쪽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그 눈빛에서 뭔가 결정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저건 그냥 훑어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장바구니에 담긴 물건을 계산대로 옮기기 직전의, 그런 확정적인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