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 형체가 나무 사이를 완전히 헤치고 나오는 순간, 나는 그것이 마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재앙이라고 부르는 게 옳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통은 검은 갑각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 표면에는 마치 균열처럼 붉은 실선이 그물처럼 뻗어 있었으며, 팔다리 대신 여러 개의 다리가 관절을 꺾어가며 기괴하게 움직였다. 눈은 하나뿐인데 그것이 붉은 빛을 내며 우리 쪽을 정확히 겨누고 있었는데, 그 눈알만 유독 매끈하게 젖어 있는 것이 마치 살아있는 보석처럼 번들거렸다. '이런 걸 도감에서 봤으면 나는 그냥 뒤로가기를 눌렀을 텐데.' 그런 실없는 생각이 스치는 사이, 놈의 몸에서 풍겨오는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찔러왔다.
"저건 상위종입니다! 다들 물러나십시오!" 병사 하나가 목이 터지도록 외쳤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대한 다리 하나가 땅을 내리찍으며 지면이 통째로 흔들렸고, 그 충격으로 나는 균형을 잃고 나뒹굴었다. 흙먼지가 시야를 가리며 입안까지 파고들었고, 나는 그 텁텁한 맛을 느끼며 헛기침을 토해냈다. '상위종이라니, 그럼 하위종은 대체 뭐였던 건가.' 이런 상황에서도 딴생각이 새는 걸 보면 나도 참 어지간한 놈이다 싶었지만, 지금은 그런 자기평가나 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이건 게임이면 튜토리얼 몹이 아니잖아.' 어이없는 생각이 스치는 것과 동시에, 나는 옆구리를 스쳐 지나가는 다리 하나를 겨우 피해내며 몸을 굴렸다. 다리 끝이 지나간 자리의 땅이 움푹 꺼지는 것을 보며, 저게 내 몸이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온전히 서 있지도 못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어깨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시야를 흐리게 만드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는 검을 다시 고쳐 잡고 서은아가 서 있는 방향을 확인했다.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두 손으로 자신의 팔을 감싸 쥔 채 몸을 떨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눈빛이 나를 향한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면서도 동시에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이 등을 짓눌렀다. '저 얼굴을 보고도 안 지키면 그게 사람인가.' 나는 그런 생각으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병사들이 창을 던지며 상위종의 주의를 끄는 사이, 나는 낮은 자세로 달려들어 놈의 다리 하나를 겨눠 검을 내리찍었는데, 갑각이 단단해서 검이 튕겨 나가는 충격에 손목이 저릿하게 울렸다. 손바닥까지 전해지는 그 진동은 마치 강철 기둥을 때린 것 같은 느낌이었고, 나는 순간적으로 검을 놓칠 뻔했다가 이를 악물고 다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이대로는 상처만 늘겠는데.' 그런 판단이 서는 순간, 상위종의 눈이 정확히 나를 향했고, 그것이 입을 벌리며 검은 액체를 뿜어내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입이 벌어지는 각도와 속도가 예사롭지 않아서, 나는 반사적으로 옆으로 몸을 던졌지만, 액체 몇 방울이 다리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살갗이 지글거리는 통증이 치솟아 올랐다. '독인가.' 나는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지만, 다리에서 힘이 급격히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무릎이 꺾였다. 살갗이 타들어가는 냄새가 코끝에 스치자, 나는 이게 단순한 화상이 아니라 뭔가 더 지독한 것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용사님!" 서은아의 외침이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상위종의 다리 하나가 나를 향해 곧게 내려꽂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이제 정말 끝인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머릿속에는 이상하게도 지구에서 마지막으로 먹었던 라면 맛이 스쳐 지나갔다. '이런 순간에 라면 생각이라니, 나도 참 어지간하다.' 그 순간 누군가 나를 옆으로 밀쳐내는 충격이 느껴졌고, 병사 하나가 대신 그 다리에 몸을 관통당하며 짧은 신음을 흘리는 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입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그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나 대신…' 그런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분노와 죄책감이 동시에 치솟는 걸 느끼며, 몸을 일으켜 검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버텨야 합니다! 여기서 무너지면 전부 끝입니다!" 다른 병사 하나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그 말이 얼마나 허황된 희망인지 알고 있었다. 상위종의 갑각은 우리가 가진 무기로는 제대로 흠집조차 낼 수 없었고, 놈의 다리는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병사 한둘을 확실하게 처치할 만큼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전멸이다. 그런 계산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돌아가는 사이에도, 나는 몸이 저절로 앞으로 나아가는 걸 느꼈다.
그때였다. 몸 안 깊은 곳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낯선 힘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잠겨 있던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그 문 너머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이게 뭐지.' 스스로 의아해하는 사이, 손끝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검신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고, 검이 붉은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빛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검신을 따라 넘실거렸고, 나는 그것이 위험한 건지 도움이 되는 건지조차 판단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그 힘의 정체를 파악할 여유도 없이, 그저 몸이 이끄는 대로 검을 휘둘렀는데, 그 한 번의 베기가 상위종의 눈을 정확히 갈라놓았다.
놈이 괴성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는 순간, 그 울음소리가 숲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커서 나는 잠시 귀가 먹먹해지는 걸 느꼈다. 검은 액체가 놈의 눈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며 땅을 검게 물들였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병사들 사이에서 짧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나는 그 환호를 제대로 들을 여유조차 없었다. 다리에서 완전히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그대로 무너져 내렸고, 검이 손에서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시야가 점점 흐려지는 와중에도, 나는 서은아가 달려와 나를 부축하는 감각과 병사들이 상위종을 향해 다시 창을 던지는 소리를 어렴풋이 느꼈다. "용사님, 정신 차리세요! 제발!"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며 갈라지는 것이 귓가에 아득하게 울렸고, 그 손길이 내 어깨를 흔드는 감각마저 점점 멀어져 갔다. '이대로 죽는 건가.' 그런 생각이 스치는 순간, 시야 한구석에 붉은 글자 같은 것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을 제대로 읽어내기도 전에 의식이 완전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의식이 사라진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이상한 감각이 이어졌다. 마치 물속에 잠긴 채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모든 감각이 뭉개지면서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 그런 애매한 느낌이었다. 눈을 뜬 곳은 숲도 마차도 아니었고, 온통 새하얀 공간이었는데, 발밑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면서도 서 있는 감각만은 또렷했다. '여긴 또 어디야.' 어이없는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이곳이 죽음 이후의 세계인지, 아니면 단순히 기절해서 보는 환각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어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발을 내디뎌 봐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고, 공간의 끝이 어디인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저 멀리 희미한 형체 네 개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그 형체들은 서서히 윤곽을 갖추기 시작했는데, 검을 든 청년과 지팡이를 쥔 소년, 활을 멘 소녀, 그리고 순백의 로브를 걸친 여성의 모습이 차례로 드러났다. 그들의 복장은 하나같이 낡아 있었고, 마치 오랜 시간을 견뎌낸 유물처럼 곳곳에 흠집과 얼룩이 남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그리움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는데, 나는 그 감정의 정체를 알아내려 애썼지만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 저 사람들 아는 건가, 아니면 그냥 기시감인가.' 그런 의문이 머릿속을 스치는 사이, 그중 검을 든 청년이 나를 향해 입을 벌려 무언가 말을 하려는 순간, 온 세상이 새하얗게 뒤집히며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