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림자의 형체가 완전히 드러났다.
네 발로 서 있는 거대한 짐승이었다.
몸통 길이는 대형 승용차만 했고, 검붉은 털가죽이 온몸을 덮고 있었다.
턱에서는 누런 침이 흘러내렸고, 눈은 붉은 인광을 뿜었다.
숨을 들이켜는 순간 콧속으로 비릿한 냄새가 밀려들었다.
피와 흙이 섞인 냄새였다.
(이게 진짜 있을 수 있는 거야...)
나는 나뭇가지를 쥔 손에 힘을 줬다.
손바닥이 땀으로 젖어 미끄러웠다.
손끝이 저릿하게 떨리고 있었다.
짐승이 낮게 울부짖으며 앞발로 땅을 긁었다.
흙이 튀어 오르는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그 소리에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쫙 퍼졌다.
(도망갈까, 맞설까.)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갔다.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오르는 것 같았다.
판단할 시간이 없었다.
짐승이 몸을 낮추며 도약 자세를 취했다.
근육이 부풀어 오르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굴렸다.
퍽.
조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자리에 짐승의 앞발이 내리찍혔다.
흙먼지가 사방으로 튀었다.
바닥이 움푹 파여 있었다.
저 발톱에 걸렸다면 지금 내 몸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나뭇가지를 짐승의 눈을 향해 내질렀다.
하지만 손끝이 떨려 정확히 닿지 않았다.
나뭇가지는 짐승의 턱을 스치듯 지나갔다.
저항감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허무한 손맛이었다.
짐승이 고개를 돌리며 나를 노려봤다.
붉은 눈동자 속에 내 모습이 작게 비쳐 보였다.
다시 도약할 자세를 취하는 순간이었다.
(끝인가.)
그때였다.
허공에서 은빛 섬광이 번쩍였다.
빛이 지나간 궤적이 눈에 잔상으로 남았다.
짐승의 몸이 순식간에 갈라지듯 베어졌다.
쿵.
거대한 몸통이 옆으로 쓰러지며 땅을 흔들었다.
발밑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놀란 채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시선을 들었다.
심장이 아직도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짐승이 쓰러진 자리 너머로, 한 여성이 서 있었다.
긴 은백색 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얇고 정교한 갑옷 위로 붉은 망토가 걸쳐져 있었다.
손에는 얇고 긴 검을 들고 있었는데, 검신에서 아직 은은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짐승의 시체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검을 가볍게 휘둘러 피를 털어냈다.
그 동작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방금 사람 목숨을 구한 게 아니라 일상적인 손질을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괜찮으신가요?"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말투는 정중했지만 위압감이 느껴졌다.
나는 겨우 목소리를 냈다.
"네... 괜찮습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아직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검을 등 뒤 검집에 꽂으며 다가왔다.
걸음걸이가 흐트러짐 없이 우아했다.
가까이서 보니 갑옷 표면에 미세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빛을 받을 때마다 옅게 반짝이는 것 같았다.
"이곳은 위험한 지역입니다. 다른 이들과 떨어지신 겁니까?"
"네, 소환되고 나서 혼자 남았습니다."
그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소환... 그럼 당신도 이번 마법진에 휩쓸린 사람이군요."
"이번... 마법진이요?"
그녀는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나를 훑는 것 같았는데, 경계라기보다는 확인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안전한 곳에서 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 근방에 다른 마물이 더 있을 수 있으니까요."
나는 그 말에 다시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방금 겪은 일이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이름은 리셰나입니다. 리셰나 로크하르트 팔렌시아."
그녀가 짧게 자신을 소개했다.
이름을 말하는 태도에 어떤 무게가 실려 있었다.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신분을 밝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는... 강도현입니다."
"강, 도현."
그녀는 내 이름을 낯선 발음으로 되뇌었다.
마치 처음 접하는 언어를 익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발음이 자연스럽게 내 귀에 들어왔다.
(말이... 통하고 있어?)
분명 그녀는 내가 쓰지 않는 언어로 말하는 것 같았는데, 내용은 완벽하게 이해되었다.
반대로 내가 하는 한국어도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듯했다.
입 모양과 소리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는데, 뜻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이 세계의 마법 중에는 언어를 초월해 뜻을 전달하는 것도 있습니다. 놀라실 것 없습니다."
그녀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짧게 덧붙였다.
설명을 하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주변 나무들 사이를 훑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숲길을 걷기 시작했다.
발밑에서 마른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드는 빛이 흔들렸다.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이었지만, 나는 방금 본 짐승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리셰나는 걸으면서도 계속 주변을 경계하는 눈빛을 늦추지 않았다.
그녀의 손은 검자루 근처에서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이곳은 팔렌시아 왕국의 변경 지역입니다. 백 년마다 발동하는 소환 마법진이 이번에도... 작동한 것 같습니다."
"백 년마다요?"
"네. 정확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세계와 당신의 세계 사이에 오래된 연결이 존재합니다."
리셰나의 목소리에는 어떤 무게가 실려 있었다.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감 같은 것이 배어 있는 어조였다.
말을 끊고 잠시 침묵하는 순간에도, 그 무게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따라 걸으며 문득 생각했다.
(이 사람이... 우리를 도와줄 수 있을까.)
리셰나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압도적인 힘으로 마물을 베어낸 그 순간부터, 그녀는 단순한 낯선 사람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숲을 벗어나자 넓은 평원이 펼쳐졌다.
탁 트인 하늘 아래로 풀들이 바람에 물결치듯 흔들렸다.
저 멀리 낮은 언덕 위로 작은 야영지 같은 것이 보였다.
천막 몇 개와 사람들의 형체가 흐릿하게 눈에 들어왔다.
"저곳에 다른 이들이 모여 있을 겁니다."
리셰나가 그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그 말에 걸음이 빨라졌다.
(서현이랑 지호도... 저기 있을까.)
야영지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한국어였다.
그 익숙한 소리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강도현!"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서현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뛰어갔다.
다리에 힘이 다시 돌아온 것처럼 발이 빨라졌다.
서현이가 나를 보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달려왔다.
"살아있었네, 다행이야..."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그대로 내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야말로 다행이야. 다들 어디 있어?"
"거의 다 모였어. 근데..."
서현이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방금까지의 반가움이 순식간에 다른 색으로 바뀌었다.
"지호가 좀... 이상해."
"이상해?"
서현이는 천막 쪽을 가리켰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호가 소은이의 곁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소은이는 발목을 감싸 쥐고 있었고, 지호는 그 손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표정이 창백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어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발걸음이 저절로 조심스러워졌다.
"지호야, 괜찮아?"
지호가 나를 올려다봤다.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도현아... 나..."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입술이 몇 번 움직였다가 다시 닫혔다.
나는 그 순간, 지호의 표정에서 뭔가 알 수 없는 불안을 읽었다.
단순히 소은이를 걱정하는 것 이상의, 훨씬 더 깊고 무거운 무언가가 그 안에 있었다.
그 눈빛은 마치 뭔가를 숨기려다 실패한 사람의 것 같았다.
(뭐지... 저 표정은.)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공기가 미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방금까지 느꼈던 안도감이 다시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